[weekly@예술경영]은 창간2주년 맞아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견 학자, 오피니언 피더들의


만화<갤러리 페이크>의  한장면
만화<갤러리 페이크>의  한장면

얼마 전 술자리에서 어느 출판사 사장님 얘기를 들었다. 그 사장님 왈, &ldquo;이제 편집자들은 기획자가 되어야 한다&rdquo;고 했단다. 뭐, 그런 당연한 얘기를 정색하고 했을까 했더니 반전이 있었다. 지인이 전한 말에 따르면 그 사장님이 말한 &lsquo;기획&rsquo;이란 &lsquo;이벤트&rsquo;였다. 그러니까 편집자들은 저자와 독자의 만남을 주선하는 이벤트를 기획할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소리였단다. 하, 이벤트라&hellip;.

난 이 말을 듣고 쓴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집에 돌아올 때쯤 문득 만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후지히코 호소노(細野不二彦, 1959~ )의 인기작『갤러리 페이크』(ギャラリーフェイク)의 한 장면이었다.

미츠시마 액자라는 액자공방의 젊은 일꾼 모리 하루오는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독립하려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미츠시마 사장의 딸 히토미. 히토미는 미대생으로서 동창생 오사다 조지의 구애를 받고 있다. 히토미 역시 모리를 좋게 생각하지만 자기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는 모리에게 남자로서의 매력을 못 느낀다. 그렇다고 &ldquo;21세기의 예술을 새로이 창출하는 작품을 낼 거다&rdquo;라고 너무 자신만만해하는 오사다도 별로. 사건은 히토미와 오사다가 갤러리 페이크를 대여해 대학생그룹전을 개최하고, 히토미가 모리에게 작품 설치를 도와달라고 부탁하면서 시작된다. 모리가 제작한 액자를 구입한 오사다가 &ldquo;&lsquo;액자&rsquo;라는 기성의 틀에 얽매일 수 없는 정념과 충동의 표현&rdquo;을 나타내는 작품이라며 모리의 액자를 때려 부순 것.

자신의 멱살을 잡고 난생 처음 히토미에게 분노를 표시하며 밖으로 뛰쳐나간 모리에게 오사다가 혼잣말로 말한다. &ldquo;하기사 고작 액자장이 따위한테 내 작품의 예술성을 이해하란 것 자체가 무리였어.&rdquo; 이때 우리의 주인공 후지타 레이지가 일갈한다. &ldquo;예술가가 액자장인보다 항상 격이 높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착각일세.&rdquo; 왜냐? &ldquo;액자기술자는 화가와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는 존재&rdquo;이기 때문이다.

액자장인과 편집자

편집자도 그렇다. 편집자는 저자와 싸운다. 어떻게? 교정과 교열을 통해서이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교정과 교열의 차이를 잘 모르는데 교정(校正/校訂)이란 &ldquo;원고상의 잘못된 글자나 글귀 따위(오자, 오식 등)를 바르게 고치는 것&rdquo;을 말하며, 교열(校閱)이란 &ldquo;원고의 내용 가운데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고치는 것&rdquo;을 말한다. 요컨대 교정이 &lsquo;형식&rsquo;상의 문제를 바로잡는 일이라면, 교열은 &lsquo;내용&rsquo;상의 문제를 바로잡는 일이다.

내용 중 잘못된 것의 예는 부지기수이다. 연도의 오기, 인명의 오류, 잘못된 인용, 참고문헌 표기의 오류 같은 단순한 것부터 앞뒤가 안 맞는 구절, 논리적 오류나 비약, 잘못된 예시, 원문과 다른 잘못된 해석, 단어・문장・문단 누락 등까지.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단순한 오류는 바로 고치면 그만이나 논리적 오류나 비약 같은 문제는 저자와 상의해 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번역서의 경우엔 저자와 직접 상의하기가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단 옮긴이와 상의하고 원문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문제를 고쳐야 한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지에 대해 옮긴이와 합의가 되지 않는다면? 저자에게 직접 연락해 해결해야 한다. 요새는 대부분 이메일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 아니며, 실제로 나는 그렇게 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편집자가 점검하는 대상은 저자가 글을 쓸 때 점검해야 하는 대상과 거의 일치한다. 저자가 편집자보다 결코 격이 높은 게 아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lsquo;격&rsquo;(格) 은 각자가 맡고 있는 일의 &lsquo;다름&rsquo;에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 각자가 맡고 있는 바로 그 일에 대한 &lsquo;완성도&rsquo;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각자의 완성도를 걸고 편집자와 저자는 계속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존재이다.

격(格)은 &lsquo;다름&rsquo;이 아니라 &lsquo;완성도&rsquo;

사실 출판사 사장님들은 다 아는 내용이다. 그런데 안 한다. 그러면서 정당화한다. &ldquo;내용은 저자가 책임져야지.&rdquo; 솔직한 사장님들은 이렇게 말한다. &ldquo;빨리 책 내서 먹고 살아야지.&rdquo; 확실히 사장님들 입장에서야 편집자가 시간을 줄여주면 좋다. 그래야 더 많은 책을 찍을 수 있고, 자금순환도 더 빨리 될 테니. 그러나 그런 &lsquo;먹고사니즘&rsquo;이 편집자를 &lsquo;시다바리&rsquo;처럼 대하도록 저자를 부추기는 건 아닌지 고민해볼 문제이다. 편집자가 스스로 자신의 &lsquo;격&rsquo;을 높일 수 있도록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이래서야 쓰겠는가?

우리는『갤러리 페이크』의 후지타가 던지는 마지막 일갈을 다 같이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나는 자꾸 후지타의 말이 이렇게 들린다. &ldquo;과연 자네가 편집한 책이 그 정도 각오로 만들어진 책이라 할 수 있나? 그 편집하다 만 것 같은 책이 말이야!!&rdquo; 후지타의 말이 사장님들과 저자들의 귀에도 이렇게 들렸으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ldquo;과연 자네가 돈 받고 파는 책이 그 정도 각오로 만들어진 책이라 할 수 있나? 과연 자네가 쓴 책이 그 정도 각오로 쓰인 책이라 할 수 있나?&rdquo;


[창간2주년 특집] &ldquo;시대진단 :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rdquo; 다른 기사 보기
① 철학 ② 과학 ④ 경제 ⑤ 건축

이재원 필자소개
이재원은 도서출판 난장 편집장으로 중앙대학교 문화연구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테리 이글턴의『이론 이후』, 수전 손택의『사진에 관하여』『타인의 고통』, 하워드 진의『하워드 진, 역사의 힘』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jaewoni@hotmail.com

  • 페이스북 바로가기
  • 트위터 바로가기
  • URL 복사하기
정보공유라이센스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