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예술경영’이라는 말을 낯설어 하는 이들을 종종 만나곤 한다. 이들은 대략 다음의 두 부류로 나뉜다. 그 하나는 ‘예술’이라는 말에 지레 주눅 들거나 반발심(?)을 가지고 ‘나는 문외한이라 아무것도 몰라요’ 혹은 ‘관심 없어요’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들이다. 다른 하나는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래서 적잖이 들어봤으련만, 여전히 낯설어 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전자이건 후자이건 이 말이 낯선 이유는 마찬가지인데 ‘예술’과 ‘경영’이라는 이 두 말이 어떻게 아무 거리 없이 조합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그것이다.

숨 가쁘게 전개되는 예술계의 미학적 논의가 어떠하건, 장삼이사의 상식으로는 ‘예술’이란 먹고 사는 문제와는 저만치 동떨어져있는 혹은 그것을 뛰어넘는 무엇이고(아니면 뛰어넘는 무엇이어야만 하고), ‘경영’은 바로 내 삶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필요한 무엇이다. 그러니 이 두 단어의 조합이 어찌 낯설지 않겠는가.

그런데 비단 세상의 변화를 뒤따라 갈 수밖에 없는 상식의 보수성만이 이 둘의 간극을 벌려놓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물론 예술경영이 ‘예술을’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위한’ 경영이라는 교과서적인 정의를 알고 있다. 예술을 경영의 잣대로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예술이 만들어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그것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매개하는 것이 예술경영의 일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역시 이러한 교과서적인 정의에서도 ‘예술’과 ‘경영’ 사이의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을 지키려는 조심스러움이 묻어난다. ‘예술’의 일과 ‘경영’의 일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과서적인 정의를 대할 때마다 궁금증이 생기는 것은 그럼 예술경영이 싹을 틔우고 뿌리내리게 하고 꽃 피고 열매 맺게 해야 할 ‘좋은 예술’이란 무엇일까 라는 것이다. 예술경영의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시스템과 프로세스가 그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을까? 아니면 평론이라든가 예술계의 논쟁이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있을까? 그도 아니면 ‘관객’의 반응이 우리의 좌표인가?

‘그 모든 것이 맞물려 작동할 때’라는 정답은 이미 알고 있다. 그렇지만 하나하나의 것들이 각각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평론과 예술계의 논쟁은 영향력은 고사하고 그 존재감마저 미미한 실정이다. 티켓사이트에서 공개하는 매출액 말고는 아직 관객들의 선택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통계자료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예술경영의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시스템과 프로세스는, ‘결과로써’ 좋은 예술을 지지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답을 구해야 할까. 아마도 그 누구도 모범답안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모범답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질문만이 있을 뿐이다. 그 질문은 비단 예술가, 평론가 혹은 관객들만이 아니라 예술경영계, 예술경영인 역시 묻고 답해야 할 것이다. 결국 예술경영의 출발점은 ‘좋은 예술’이 아닌가. 또한 예술경영이 세상을 설득할 수 있는 무기 역시 ‘좋은 예술’이 아닌가.

창간2주년 100호를 발행하면서, ‘예술’과 ‘경영’이 두 낱말이 유독 예사롭게 보이지 않아, 들었던 생각이다. 지금까지 이끌어 준 독자와 필자 여러분께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김소연 필자소개
김소연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다원예술소위 위원, [컬처뉴스] 편집장을 지냈다. 무대가 어떻게 세상과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연극평론을 쓰고 있다. ‘상업지구 대학로를 다시 생각하다’ ‘이 철없는 아비를 어찌할까’ 등의 비평이 있다.
kdoonga@naver.com

  • 페이스북 바로가기
  • 트위터 바로가기
  • URL 복사하기
정보공유라이센스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