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을 전후로 예술경영의 폭발적 성장을 이야기하지만, 예술경영이 하나의 분야로 확립되기 이전부터 예술경영은 존재해왔다. [weekly@예술경영]은 창간2주년을 맞아 특별기획

이상만의 생에는 음악평론을 비롯하여 다른 장르인 연극이나 무용, 심지어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 등 교육기관에도 관여한 인연들이 많다. 하지만 무엇보다 음악공연기획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언론사가 주도해온 20세기 한국의 음악공연계에서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거나 영향을 미쳐 온 큰 음악제들을 그는 처음으로 일궈왔다.

이상만
<가거라 38선아> 레코드 출처
<가거라 38선아> 레코드
출처 www.gayo114.com
국제극장
국제극장
출처 blog.naver.com/jjh4858
심포니 오브 더 에어(1955) 공연 팸플릿
심포니 오브 더 에어(1955) 공연 팸플릿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조선악극단 ⓒ 가요114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조선악극단
ⓒ 가요114
제1회 국제음악제 출처 blog.naver.com/kjbyang
제1회 국제음악제
출처 blog.naver.com/kjbyang
광복 30주년 기념음악제 결산 좌담회 오른쪽이 이상만 선생 출처 [경향신문] 1975년 9월 3일자
광복 30주년 기념음악제 결산 좌담회
오른쪽이 이상만 선생
출처 [경향신문] 1975년 9월 3일자
김용현 국제문화회 회장
출처 [경향신문] 1983년 2월 14일자

&ldquo;1920년대부터 해방을 거쳐 1980년대까지 대략 70여년간 우리나라의 굵직굵직한 공연기획은 거의 신문, 방송 등 언론사의 차지였어요. 최초의 공연도 동아일보가 당시 유형문화재인 광화문을 &lsquo;헐지 말라&rsquo;는 주장을 펴서 일제 침탈 하에서도 우리 문화재를 살리는데 큰 역할을 했던 일본인 야나기 미네요시(柳木峰吉, 한국명 柳宗悅)의 부인이자 성악가(알토) 야나기 가네꼬를 초청하여 공연한 것이지요. 이때가 [동아일보]가 막 창간의 포성을 울린 1920년 5월이었습니다. 뒤이어 조선일보도 유사한 음악사업을 하기 시작했고요.&rdquo;

&ldquo;1920년대에는 언론사를 제외하면 음악매니지먼트가 주로 대학을 중심으로 펼쳐졌죠. 개교 당시(1897년)부터 음악을 필수과목으로 가르쳤습니다. 안익태, 현제명, 김동진, 박태준 등 쟁쟁한 음악인들을 배출한 평양 숭실전문학교가 선두주자였고 1925년에는 이화여전이 본격적인 음악과를 개설하여 주로 합창중심의 활동을 해왔습니다. 1928년 현제명(玄濟明, 1902~1960)이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연희전문학교에도 본격 음악부를 창설해서 관현악부, 합창부를 만들어 음악보급 활동을 했고요.

이처럼 미션스쿨들의 역할이 컸는데 공연은 물론 콩쿨대회를 통해 음악문화를 확산시키는 역할도 맡았던 거죠. 여기에 1926년에 선교사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부츠(Boots) 여사와 피아니스트 박경호(朴慶浩)가 중심이 되어 30명 규모의 본격적인 관현악단으로 창설된 중앙악우회와 1928년 아마추어로 구성된 경성제대 오케스트라가 활동을 시작했어요. 학교 중심의 활동이었지만 자연스럽게 기획이라는 개념이 따르게 되었습니다.&rdquo;

2010년 10월 22일 금요일 오후의 번잡한 인사동. 물결처럼 흐르는 인파의 숲을 헤치고 약속시간에 도착한 이상만 선생을 안내하여 인사동에서 제법 알아주는 전통 찻집 조그만 온돌방에 마주앉았다. 앉자마자 나름대로는 숨도 좀 돌릴 겸, 이 기획의 의도와 취지의 서두를 꺼내들었다. 그런데 선생은 솟아나는 기억을 빨리 쏟아내지 않으면 다시 사라져 버릴까봐 걱정이라도 되는 듯 서둘러 구술을 시작해 나갔다. 그것도 선생을 모시고 듣고자 했던 공연기획 분야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받아만 적기에도 숨이 가쁠 지경이었다. 그래서 전반부는 선생의 구술을 토대로 선생이 주역으로 활동하기 이전 공연계의 전반적인 흐름을 간단하게나마 정리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다른 모든 분야의 구술에도 실마리를 던질 수 있는 것들이라서 한편으로는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연대는 물론 사람 이름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는 선생의 정리는 거침없이 계속된다.




언론사와 대학 그리고 최초의 민간기획자 최성두

&ldquo;방송사의 공연사업은 경성중앙방송이 시초였습니다. 경성중앙방송은 1927년 설립 초기에는 하나의 채널에서 주로 일본어(일본어7, 조선어3의 비율)로 전파를 발사하지만 청취자가 적으니까 청취자의 증대와 청취료 징수를 위해 조선어의 비중을 늘리게 되었죠. 1933년 제2방송이 설립돼 이중방송을 하게 됩니다. (제1방송은 일본어로 제2방송은 조선어로). 우리말 방송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공연사업도 하게 되었지요.&rdquo;

이글을 정리하면서 자료를 찾아보니 총독부가 주도하여 설립한 경성중앙방송 개국 축하공연에도 이왕직 전속 경성음악대와 중앙악우회 관현악단 등 음악단체가 참여한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

&ldquo;언론사나 학교 중심으로 전개되던 음악공연계에서 민간기획사의 효시는 최성두(崔聖斗)입니다. 그이는 1934년 당시 본정통(本町通, 지금의 충무로)에 악기점 &lsquo;음악사(音樂社)&rsquo;를 설립하고, [음악](1935)이란 잡지를 발행하면서 일본에서 음악가들을 초빙하거나 한국음악가들의 공연을 주최하거나 후원합니다. 그는 연희전문 상과 출신이지만 현제명의 공연 등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던 음악인이기도 했고, 해방 후에는 레코드사업도 계속합니다.&rdquo;

최성두가 세운 고려레코드사에서는 <애국가> <대한의 노래>는 물론 남인수의 가요 <가거라 38선>을 내기도 했다. 한편 60년대 말경 대중 스타(가수, 배우)였던 최영희의 부친이 바로 최성두라는 기록도 나온다. 그는 공연사업뿐만 아니라 악기점 운영에 잡지 발행까지 오늘날에도 보기 드문 &rsquo;사업포트폴리오&lsquo;를 가지고 있었음이 짐작된다.

&ldquo;주요 극장으로는 1934년에 설립된 명치좌(해방 후 국제극장이란 이름으로 존속하다가 1957년-1973년 사이 명동국립극장을 거쳐 현재의 명동예술극장), 경성부민관(1935, 현재의 서울시 의회 건물), 연극 중심의 동양극장(1935-1976) 등이 있었지요. 당시에는 영화관인 우미관이나 단성사에서도 공연을 많이 했는데, 변사가 내레이션을 맡은 무성영화시대에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 국악단이나 서울선소리패 등이 무대에 서서 공연을 하곤 했습니다. 상세한 기록들이 부족하여 겉으로는 단순한 것 같아도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 시대에 이미 &lsquo;기획&rsquo;이라는 개념이 앞섰던 시대였고 이를 주도한 인물들이 있었어요.&rdquo;




1950년대, 공연예술 기획 최초의 사건들

&ldquo;해방이후 음악계의 주요 공연활동을 보면 현제명이 주도한 고려교향악단이 광복 직후인 45년 9월에 창단되고 한 달 뒤인 10월 국제극장(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첫 연주회를 가졌어요. 이것은 국내 모든 오케스트라의 모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휘는 바이올리니스트 출신의 계정식이 맡았고 연주곡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과 <에그몬트> 서곡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려교향악단은 재정난으로 3년여 후에 해체됩니다.

47년 초 김생려가 고려교향악단 단원 가운데서 서울관현악단을 창설해서 활동을 하다가 48년 서울교향악단을 발족시킵니다. 당시 서울교향악단의 인기는 월2회 정기연주회를 열고 한 프로그램을 2~3일씩 연주할 만큼 대단했지요. 그때는 KBS방송국 고문으로 있던 루돌프 자코비라는 미국인이 상임지휘자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6.25로 납북이나 월북 인사들이 많아 결국 악단은 유지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해군 총참모장이던 손원일 제독의 도움으로 음악가들을 규합해서 합창과 관현악단으로 구성된 해군정훈음악대가 50년 11월 출범하게 되고 그때 김생려가 지휘를 맡게 되었어요. 이것이 54년 해군교향악단으로 명칭을 바꾸었다가 57년 서울시립교향악단으로 새 출발을 하게 된 것입니다.&rdquo;

서울관현악단은 1946년 3월 이후 고려교향악단을 탈퇴한 김생려 등이 발족했다. 좁은 의미에서는 이것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효시로 보고 있다.

&ldquo;1948년도에 있었던 한국최초의 오페라 공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일제시대에 이태리에 유학했던 테너 이인선(1906-1960)은 국제오페라사(社)를 운영하면서 <산타루치아> <오 솔레미오> 등 이태리 노래를 많이 보급했습니다. 당시에는 일제에 의해 서양노래를 부르는 것이 금지되었는데, 이태리와 일본이 동맹관계여서 이태리 노래만은 허용되었지요. 그래서 그는 이태리 노래집을 만들어 배포하여서 널리 알렸던 것입니다.

목사의 아들이자 의사였던 이인선은 신념을 가지고 오페라 <춘희>를 제작하고 주역을 맡았으며 비올레타 역에는 마금희와 김자경을 더블캐스팅 했습니다. 국제극장에서 1주일간 공연을 했는데 도하(都下) 각 신문의 사회면 톱기사가 될 정도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공연으로 적자를 크게 본 그는 집과 피아노까지 팔았지만 빚을 다 갚지 못하고 감옥살이까지 하게 돼요. 결국 시달리다 못해 미국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활동하다가 사망합니다.&rdquo;

&ldquo;이 시기 공연계를 보면 놀랍게도 부산 피난살이 궁핍한 시절에도 외국인 음악가들의 내한 공연이 있었어요. 1952년에 부산 보수동 광장에서 흑인 성악가 마리안 앤더슨의 공연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아마 미군 쪽의 주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쟁 후에는 외국의 유명 오케스트라의 초청공연도 이어지게 됩니다. 최초의 것으로는 1955년 미국 NBC 심포니의 후신인 심포니 오브 더 에어(Symphony of the Air) 초청공연이 평화신문 주최로 경복궁 임시무대(중앙청광장 특설연주회장)에서 열린 것입니다. 이듬해인 1956년에는 서울신문 초청으로 LA필하모닉(지휘, 알프레드 웰렌스타인)의 공연이 같은 장소에서 있었지요. 저도 대학생 신분으로 그 공연에 가봤습니다.&rdquo;

언젠가 지휘자 금난새 선생이 1955년 심포니 오브 더 에어의 중앙청 공연을 언급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8살 때 부친(작곡가 금수현)의 손에 이끌려 이 공연을 보러 갔는데, 이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으면서 지휘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것이었다. 간혹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듣는데 필자가 전 직장에서 맡아 했던 볼쇼이발레 공연의 실황방송을 보고 발레리나가 되었다는 후배도 있다. 러시아의 전설적인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도 6살 때 어머니와 처음 본 발레 공연에서 발레리나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고 했던가. 이런 사례가 어디 한 둘 일까마는 내 주변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는 예술의 힘이, 또는 기획의 힘이 새삼 경이롭다는 생각이 더 커진다.

&ldquo;한편 해방 이후의 공연사업 특히 클래식 음악 공연사업은 주로 신문사가 많이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6.25 이전에는 [중앙일보], 이후에는 [한국일보]가 주도를 했고 [동아일보]는 민족예술 쪽에도 많은 배려를 했습니다. [한국일보](1954)창립자인 장기영 사장은 특히 문화사업에 주도적이었습니다.&rdquo;

&ldquo;이후 1959년에는 우리 공연단의 최초 해외공연도 이루어집니다. 연극인이면서 주로 악극단 매니지먼트를 하던 김관수(金寬洙, 1908~?)가 그 해에 우리 민속예술단을 파리에 보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적인 프로모터라고 할 수 있지요. 첼리스트이자 지휘자인 김인수의 동생이기도 한데 앞서 말한 음악사(社)의 최성두와 비슷한 연배였죠.&rdquo;

&ldquo;이 무렵의 큰 공연장으로는 명동국립극장 외에도 이화여대 김활란 총장 시절에 세운 대강당이 많이 활용되었지요. 그러다가 1961년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시민회관이 들어서서 비록 대관 위주의 공연장이었지만 1972년 화재로 전소될 때까지 서울의 주요한 공연장 역할을 하게 됩니다. 시민회관은 원래 자유당 시절인 1955년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딴 우남(雩南)회관이란 이름으로 건립을 시작하였으나 4.19로 그 명칭은 좌절이 되고 5.16 직후 시민회관이란 이름으로 준공이 된 것이지요. 시민회관을 중심으로 흥행사업도 본격화 됩니다. &lsquo;악극쇼&rsquo;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당시 시민회관에서 공연하던 악극단만도 90개 정도나 되었어요. 당시 주류를 이룬 관객을 가리켜 고무신 부대(=아줌마, 아저씨 관객층)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어요.&rdquo;

KBS 음악PD로 첫발, &lsquo;정사인 1주기 음악회&rsquo;의 성공

숨 가쁘게 넘어온 여기까지가 이상만 선생 활동 이전의 대략적인 우리 공연계의 흐름이다. 그럼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공연기획자로서의 선생의 활동 궤적을 따라가 보자. 우선 선생은 누구인가. 그를 소개하는 한 언론의 기술을 보자.



선생의 첫 이력은 방송국 음악 PD이다. 대학 재학중이던 1957년(만 22세) 선생은 KBS에 입사하여 행사성 프로그램 기획을 맡는다. 첫 프로그램은 &lsquo;정사인(鄭士仁, 1881 ~ 1958) 1주기 음악회&rsquo; 공개방송이었다. 정사인은 플루트 연주가로 우리나라 관악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독일 출신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ret)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군악대를 조직(1901년)한 이듬해 군악대에 입대한 정사인은 그 밑에서 플루트와 작곡법을 배운다. 국권 피탈 후 군악대가 이왕직양악대(李王職洋樂隊)로 이름이 바뀐 후에도 계속 남아 활동하다가, 1916년 에케르트가 죽은 뒤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로 가서 음악교사로 관악대를 지도하며 행진곡 <추풍> <돌진>, 민요 <닐리리야>, 가곡 <타향> 등을 남겼다. 어쨌거나 공개방송은 성공적이었고 패기만만한 젊은 음악학도는 프로듀서이자 공연기획자로 알려지게 된다.

오사카페스티벌을 모델삼아 치룬 &lsquo;제1회 국제음악제&rsquo;

KBS 음악 PD로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1961년 5.16이 일어나고 얼마 안 있어 당시 음악계 실력자이던 안익태가 5.16 혁명 1주년을 기념하는 &lsquo;국제음악제&rsquo; 창설을 제의했다. 당시 공연기획자로 이름이 제법 알려졌던 이상만은 공보부에 발탁되어 이 일을 맡게 되었다. 공보부에 가보니 서울대 성악과 2기 출신으로 당시 &lsquo;시민위안의 밤&rsquo;이라는 전국 순회공연을 기획하는 등 공연계의 대부격이었던 문공부 과장 김창구(金昌九, 후에 국립극장장 역임)가 나를 추천했다는 것이었다. 그가 국제음악제를 총괄하고 있었고, 그 밑에서 이상만은 김종설 사무관(행정담당), 영어를 잘했던 김영호 주사 등과 호흡을 맞추면서 음악제를 준비해 나갔다. 국제음악제 개최 예산은 당시 유명했던 간첩 황태성의 공작금 20만 달러 중 KBS TV를 설립하고 남은 돈의 일부로 충당하게 되어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치르는 국제음악제니 이런 행사를 경험해본 사람도 노하우도 있을 리 없었다. 모델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 때 3년째 시행 중이던 일본의 오사카국제음악페스티벌을 참고하기로 하고 거기에 한국적이고 독창적 프로그램을 가미하기로 하였다. 개막작을 우리 아악으로 했듯이 말이다. 그리고 자료 수집에 들어갔다.

그러나 당시 오사카페스티벌의 프로그램은 엄두도 못 낼 규모였다.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빈국립오페라단의 오페라 <살로메>, 실내오케스트라인 비르투오지 디 로마, 산타체칠리아 오케스트라(교수들로 구성된) 등 쟁쟁한 구성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 중에서 비르투오지 디 로마, 빈국립 오페라의 <살로메> 출연자 중 1명의 성악가와 하피스트 미카놀 자바레타, 첼리스트 앙드레 나바라(Andre Navarra, 1911 - 1988) 등 수명의 솔리스트 정도가 오게 되었고, 국내에서는 안익태 지휘 베토벤 교향곡 9번 환희와 애국가 한국환상곡 공연 등이 더해졌다.

<살로메> 출연자가 주역을 맡은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를 무대에 올렸는데, 외국의 주역은 원어로, 한국가수들은 한국어로 공연을 했다. 당시 지휘자였던 만프레드 구를리트(Manfred Gurlitt)와 연출가 게라르트 휘슈(Gerard H&uuml;sch)는 서로 앙숙이었으나 주최측에서 요령껏 구슬러서 공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안익태의 한국환상곡 공연에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원이 합쳐서 600여 명이 출연하여 장관을 이루었다. 당시 시민회관의 음향이 매우 좋았던 이유도 컸다.

페스티벌 기간은 1962년 4월 18, 19일부터 5월 16일까지로 정해졌다. 4.19와 5.16 두 날을 모두 기념한다는 의미가 있었으나 그 기간을 모두 채우기에는 프로그램이 부족했다. 결국 4월 18~19일에는 전야제와 비르투오지 디 로마 연주만 하고 대부분의 공연은 5월에 치루는 방식을 택했다. 공교롭게도 비르투오지 디 로마의 공연은 오사카 페스티벌에 초청을 먼저 받았으면서도 스케쥴 때문에 한국 공연을 먼저 하게 되어 일본인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 최초의 규모 있는 국제음악제를 성황리에 치르게 되었다. 그것도 주어진 예산 안에서 적자 없이 치를 수 있었다.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음악회의 주요 관객은 미군들이었는데, 어느 날 미 8군에서 왔다면서 단체로 표를 사겠다고 외상으로 달라는 일이 있었다. 고마워 얼른 표를 주었는데, 가져간 후 끝내 소식이 없었던 것이다. 달리 생각하면 그만큼 이 행사의 홍보가 잘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국내 관객으로는 성인도 있었지만 대학생 할인도 있었고, 특히 고등학생 단체관객에게는 입장료를 3분의 1로 할인해 주면서 인솔교사들에게는 별도의 인사치레를 하기도 했다.



페스티벌 기간은 1962년 4월 18/19일부터 5월 16일까지로 정해졌다. 4.19와 5.16 두 날을 모두 기념한다는 의미가 있었으나 그 기간을 모두 채우기에는 프로그램이 부족했다. 결국 4월 18~19일에는 전야제와 비르투오지 디 로마 연주만 하고 대부분의 공연은 5월에 치루는 방식을 택했다. 공교롭게도 비르투오지 디 로마의 공연은 오사카 페스티벌에 초청을 먼저 받았으면서도 스케쥴 때문에 한국 공연을 먼저 하게 되어 일본인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고음반 수집 열풍, <잘 살아보세>
그리고 KBS교향악단 지휘자 연속공연

서울국제음악제 말미에 당시 양태조 서울신문 사회부기자가 사회면에 인터뷰 기사를 큼지막하게 실어주기도 해서 개인적으로는 국내 공연기획의 &lsquo;1인자&rsquo;로 떠오르는 계기도 되었다. 불과 28세의 나이였다. 그만큼 교만해할 만한 시절이기도 했다. 요즘에야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그 당시에 그 정도로 언론에 나갔다는 것은 자칫 미운 털이 박힐 만큼의 &lsquo;사건&rsquo;에 속할 일이었다.

음악제가 성대히 끝나자 당시 공보부 장관인 오재경 씨가 사무관으로 공보부에 그대로 눌러 앉을 것을 제안하였다. 그 나이에 정부부처의 사무관이라면 당시로서는 대단한 특혜였다. 필연코 좋지 않은 일들이 생길 것 같아 응하지 않았다. 그 대신 한양대 전임강사로 몇 개월 지내다가 민간방송인 동아방송에 음악PD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민간 방송은 공영인 KBS보다 월급이 세배 정도 많았다. 3년여 동안 동아방송에서는 서양음악과 국악을 같이 맡았는데, 유행가, 판소리, 국악 등의 고음반 수집에 매달려 고음반에 대한 관심을 불어 일으켰다.

동아방송에서 일하던 중 장충체육관에서 정부 주관으로 &lsquo;민족의 제전&rsquo;이라는 행사가 있었다. 5.16의 &lsquo;당위성&rsquo;을 홍보하고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행사였는데, 이 때 그 유명한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가 &lsquo;뜬다&rsquo;. 이상만 기획, 한운사 작사, 김희조 작곡, 소프라노 황영금과 테너 이인영 노래로 첫 선을 보인 이 노래는 박정희 정권의 철학을 상징하는 노래이자 이후 <새마을 노래>로 이어지는 이른바 건전가요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동아방송에서 3년을 근무한 뒤 1966년 음악계장이라는 직책으로 다시 KBS로 돌아간다. 거기서 한 때는 KBS교향악단의 기획을 맡기도 했다. 임원식 지휘자의 사퇴 후 체코출신으로 독일에서 활동하던 오펠라라는 지휘자가 와 있었는데 그와 함께 한사람의 지휘자로 연속공연을 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데 한몫을 하기도 했다.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 30주년 기념음악제'의 화제는 첫 귀국연주를 가진 백건우였따. 국위를 선양하고 있었던 백건우에게는 당시 병역문제가 있었는데, 이상만은 당시 공화당 의장 김정렬의 딸 김태자를 통해서 백건우의 병역이 면제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백건우 첫 귀국연주회 열린 &lsquo;광복 30주년 기념음악제&rsquo;

국제음악제의 성공덕분에 그는 1969년 두 번째로 &lsquo;제1회 서울음악제&rsquo; 창설에 참여했다. 음악협회가 주최가 된 이 음악제는 한국 음악인들의 작품만으로 구성되었는데 조상현 씨가 사무국장을 맡았고 그는 프로그램 기획담당 차장이었다.

앞의 두 음악제 경력 때문에 그는 당시 박정희 정권의 실세이자 국무총리였던 김종필 씨와도 알게 되어서 1974년 40세에 &lsquo;광복 30주년 기념음악제&rsquo;의 집행사무국장을 맡게 된다. 그 때 한 팀을 이루어 일했던 이들이 문공부 예술과의 김문무(전 경기도문예회관 관장), 박중암(전 국립극장 공연과장, 현 문공회 사무국장), 국악원의 이승렬(전 국립국악원장) 등이었다. 이듬해 음악제가 열리던 해에는 당시 민간기획사인 국제문화회 대표였던 김용현(초대 한국공연예술 매니저협회장)도 참여하여 광고유치와 관리를 맡게 된다.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lsquo;광복 30주년 기념음악제&rsquo;의 화제는 첫 귀국연주를 가진 백건우였다. 1972년 뮌헨에서부터 인연이 이어지던 배우 윤정희와의 스토리도 한몫을 한 것 같았다. 국위를 선양하고 있었던 백건우에게는 당시 병역문제가 있었는데, 이상만은 당시 공화당 의장 김정렬의 딸 김태자를 통해서 백건우의 병역이 면제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도 이 음악제에 출연하였고 김남윤, 이대욱, 문용희 등 해외파들도 대거 참여하였다.

음악제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1976년에는 문공부가 주관했던 &lsquo;제1회 대한민국음악제&rsquo;에도 참여하였다. 그 때의 본직은 KBS 부장이었다. &lsquo;대한민국음악제&rsquo;는 그때까지 교류가 없었던 동구권 음악인들과 교류를 트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lsquo;대한민국무용제&rsquo; &lsquo;대한민국연극제&rsquo; &lsquo;대한민국국악제&rsquo; 등이 줄을 잇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977년에는 세계청소년음악연맹 세계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민간단체인 한국청소년음악연맹과 국제문화협회(현 국제교류재단)가 공동으로 주관하였는데, 이때는 국제문화협회의 김광과 공동사무국장으로 참여하였다. 우리나라는 세계청소년음악연맹에 73년 가입했는데, 가입 후 이스라엘의 골고다에서 개최된 세계대회에 가보고 한국유치를 결심하였고 4년 만에 결실을 맺게 되었다. 서울대회에는 3천여 명의 외국음악인들이 참가하여 장관을 이루었다.



세종문화회관은 1972년 시민회관이 불탄 자리에 1974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이 해에 개관한다. 100일 동안 총 157회의 공연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축제를 통한 관객동원 목표가 50만 명이었는데, 이는 당시 서울인구 5백만 명의 10%였고, 5만 명으로 추산되었던 전체 클래식음악 인구의 10배나 되는 수치였다. 결과적으로는 27만 명이 개관예술제를 다녀갔으니 당시로서만이 아니라 지금에 견주어도 대단한 일이었다.

27만 명이 다녀간 세종문화회관 개관예술제

1975년의 광복 30주년 기념음악제, 1976년 제1회 대한민국음악제, 1977년 세계청소년음악연맹 세계대회 등을 1년마다 숨 가쁘게 치르고 난 뒤에도 쉴 틈이 없었다.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예술제의 사무국장을 또 맡은 것이다.

세종문화회관은 1972년 시민회관이 불탄 자리에 1974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이 해에 개관한다. 100일 동안 총 157회의 공연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축제를 통한 관객동원 목표가 50만 명이었는데, 이는 당시 서울인구 5백만 명의 10%였고, 5만 명으로 추산되었던 전체 클래식음악 인구의 10배나 되는 수치였다. 결과적으로는 27만 명이 개관예술제를 다녀갔으니 당시로서만이 아니라 지금에 견주어도 대단한 일이었다.

[Time]지(誌)가 이 개관공연을 다룰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당시 타임지 동경지국장 S. Chang(여)은 그를 가리켜 &lsquo;촛불 같은 사람&rsquo;이라며 박스 기사로 선생을 다루겠다고 제안해 왔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가 만만치 않았던 관계로 &lsquo;사건&rsquo;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거절하고 말았다.

그때 사무국에서 같이 호흡을 맞추었던 기획자들이 강석흥(현 한국공연예술경영인협회장), 양인식(전 예술의전당 공연부장), 강인(한국문화예술진흥원), 최충식, 김원구(음악평론가, 작고) 등이었다. 영문 교열을 담당하던 브라이언 베어리라는 외국인도 있었다.



기획사의 재정적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삼익피아노 대리점까지 겸업하였으니 흡사 해방전 최성두의 음악사와 유사한 포트폴리오를 가졌던 셈이다. 국제문화회는 당시 국내 정상급 연주자들의 공연을 도맡아 했는데, 그때그때 주어지는 대로 한 것이 아니라, 반기별로 또는 연단위로 공연기획을 했으며, 그때만 해도 연주가가 직접 뛰어다니며 연주회를 주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비로소 연주가는 개런티를 받으며 연주만 하고 매니지먼트는 전문가가 맡는 시스템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민간기획사로서 연간 주최하는 공연에 회원을 모집하는 시도를 한 것도 김용현 대표의 국제문화회였다.

김용현 국제문화회 회장, 매니지먼트 전문시스템의 정착

김용현(1936-1997) 국제문화회 회장도 사무차장으로 같이 일했다. 김용현 회장은 서울중학교 합창단 출신으로 서울문리대 철학과 졸업 후에 [사상계]에서 총무부장을 하다가 김지하의 <오적(五賊)> 필화사건으로 잡지가 폐간되면서 숨어 다니기도 했다. 이후 김자경오페라라단에서 총무로 일하다가 1972년도에 국제문화회를 설립하고 한때 [콘서트가이드]라는 얇은 정보지도 발간하였다. 근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민간 공연기획 사업을 했던 사람이다.

기획사의 재정적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삼익피아노 대리점까지 겸업하였으니 흡사 해방전 최성두의 음악사와 유사한 포트폴리오를 가졌던 셈이다. 국제문화회는 당시 국내 정상급 연주자들의 공연을 도맡아 했는데, 그때그때 주어지는 대로 한 것이 아니라, 반기별로 또는 연단위로 공연기획을 했으며, 그때만 해도 연주가가 직접 뛰어다니며 연주회를 주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비로소 연주가는 개런티를 받으며 연주만 하고 매니지먼트는 전문가가 맡는 시스템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민간기획사로서 연간 주최하는 공연에 회원을 모집하는 시도를 한 것도 김용현 대표의 국제문화회였다.

이후의 공연기획사로는 2~3년 늦게 소아음악사무소(대표 임석규)가 출범을 하였고, 이로부터 한참 후 1984년 한국무지카(송희영), 1986년 서울예술기획(박희정)과 미추홀예술진흥회(전경화) 등으로 이어진다. 국제문화회는 이들보다도 10여년이나 앞섰고, 요즘을 대표하는 기획사 (주)크레디아(1994, 정재옥), 빈체로(1995, 이창주), 마스트미디어(1997, 김용관) 등 보다는 20여 년을 먼저 시작했던 셈이 된다.

김용현은 1982년도에 당시 일본기획사들의 해외 연주단체 알선 독주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강석흥(KBS 교향악단 공연기획), 강인(문예진흥원 공연담당), 강준혁(당시 공간사랑 대표), 양인식(숭의음악당 사무국장), 한진석(중앙일보 차장) 등과 함께 한국공연예술매니저협회(현 한국공연예술경영인협회)의 설립을 주도하고 초대 회장이 되어 공연계의 합리적인 비즈니스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후에도 음악관련 세계적인 이벤트와 이상만 선생의 인연은 계속되는데 1981년에는 세계민속음악학회에 관여하였고, 가장 최근인 2009년에는 제주도에서 열린 예술올림픽이라 할 세계델픽대회를 유치하여 위원장을 맡았다가 곡절 끝에 도중에 손을 떼기도 하였다.



예음홀 프로그램 운영에서는 서양음악 위주의 공연계에 가야금산조 유파전, 판소리 유파전 등 한국음악 공연의 씨앗을 뿌린 점들이 보람으로 남았다. (주)예음 이전에 88서울올림픽준비추진위원단에서 문화행사전문위원으로 개폐회식 프로그램  구성에 관여하면서 국악이 전면에 등장하는데도 그의 노력이 컸다. '문화올림픽'이란 말도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70년대 말 유학길 올라 예술경영, 극장경영,
예술의 재정경제 공부

세종문화회관 개관예술제가 끝난 뒤에는 숙원이던 미국 유학길에 올라 예술경영을 공부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1970년도에 벨기에 고등기술학교에서 뉴미디어예술을 공부하고(이 덕분에 이후 (주)SKC에서 CD사업을 하는데 자문을 하기도 함) 귀국길에 미국에 들러 UCLA의 예술경영 프로그램을 견학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때부터 언젠가는 이 과정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1974년 풀브라이트 장학생 시험에 합격하여 여건을 만들어 놓은 다음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예술제가 끝난 다음 마음먹었던 일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UCLA(MBA과정)에서는 예술경영 전반을, 예일대(MFA과정)로 옮겨서는 극장경영을, 뉴욕대에서는 예술의 재정경제를 들었다. UCLA의 졸업논문 「올림픽과 문화」는 역대 올림픽의 예술행사를 정리한 것이었는데, LA올림픽에서도 참고하였다. 국내에서는 문예진흥원이 발간하던 [문예진흥]에 발췌 게재되기도 했다. 이후 예일대 예술철학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다니고 있었으나 장학금도 끊기고 해서 2년 만에 귀국하였다. 인생의 첫 직장이자 입신(立身)의 기반이 되었으며, 웬만한 음악제마다 차출되기를 거듭하면서도 20여 년 동안 적을 두어 온 KBS에는 귀국 후 복직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완전히 퇴직을 하였다.



이상만

한국음악, 한글에 남다른 애착으로 프로그램 극장 운영

이후에도 기획자로서, 음악평론가로서 이런 저런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중 적어도 수년 동안 연봉을 받은 직장생활은 두 군데가 더 있었으니 하나는 (주)예음이고 또 하나는 가장 최근의 고양문화재단이다. 다움문화예술기획에서도 이사장으로 초기부터 6년여를 관여했지만 보수를 받는 직장의 개념은 아니므로 제하고 보면 그렇다.

1984년부터 91년까지 일했던 (주)예음은 공연기획과 예음홀 운영, [월간객석] [시사저널] 등을 발간하던 회사였다. 여기서의 활동은 예음홀 프로그램 운영이었다. 서양음악 위주의 공연계에 가야금산조 유파전, 판소리 유파전 등 한국음악 공연의 씨앗을 뿌린 점들이 보람으로 남았다. (주)예음 이전에 88서울올림픽준비추진위원단에서 문화행사전문위원으로 개폐회식 프로그램 구성에 관여하면서 국악이 전면에 등장하는데도 그의 노력이 컸다. &lsquo;문화올림픽&rsquo;이란 말도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상만의 개인적 스승은 국악학자인 만당(晩堂) 이혜구(1909-2010) 박사인데 그가 국악에 대해서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실제로 기획도 많이 하였던 것은 스승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이었다. 서양음악 중심인 &lsquo;제1회 국제음악제&rsquo;에서는 우리음악인들의 음악 연주로 시작하였는데 이때 종묘제례악을 처음으로 재현하였다. KBS 재직 당시에는 전국의 민요수집을 시작했고, 아악, 판소리, 진도씻김굿 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도록 노력하기도 했다. 1959년 서울신문에 &lsquo;연예천일야화&rsquo;라는 이름으로 60회 동안 개화기 이후 음악의 흐름을 연재하여 한국의 근대음악사 정리의 단서를 최초로 던진 바도 있다.

특히 그는 국어사용에도 남다른 애착이 있다. 이런 그의 특성을 말해주는 사례로 고양문화재단 소속 공연장 이름을 그 흔한 &lsquo;문화예술회관&rsquo;이나 &lsquo;예술의전당&rsquo;이라는 이름들을 다 물리치고 &lsquo;덕양어울림누리&rsquo; &lsquo;일산아람누리&rsquo;라는 순수한 우리말로 정한 것, 공연장 도우미를 &lsquo;돌보미&rsquo;로 바꾸고 한복을 입힌 것, 보통 R, S석 등으로 구분하는 좌석 이름을 &lsquo;으뜸 자리&rsquo; &lsquo;좋은 자리&rsquo; 등으로 시도한 것 등이 있다. 이런 애착 때문에 한글학회로부터 &lsquo;한글으뜸지킴이&rsquo;라는 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이제까지 문화예술에 끼친 공로로 대한민국예술상과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이제까지 남들이 안하던 것을 처음으로 시도했던 한 사람의 궤적을 거칠게나마 살펴봤다. 이상만의 생에는 음악평론을 비롯하여 다른 장르인 연극이나 무용, 심지어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 등 교육기관에도 관여한 인연들이 많이 있지만 무엇보다 음악공연기획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언론사가 주도해온 20세기 한국의 음악공연계에서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거나 영향을 미쳐 온 큰 음악제들을 처음으로 일궈온 역사는 예술경영사의 한 장(章)으로 기록될만하다.

필자소개
이용관은 중앙일보/호암아트홀 문화사업부장, 부천문화재단 전문위원, 안양문화예술회관 관장을 역임했다. 부천과 안양에서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공연시즌제를 도입하여 성과를 거둔 바 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공연예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사)한국예술경영연구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본지 편집위원. speed26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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