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 위원장은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 학자, 행정가로서 뿐만 아니라 예술위의 수장으로서 한국미술계의 가장 중요한 미술경영인의 한 사람이다. 그는 미술평론가로서 [공간] 편집장, 환기미술관장, 국립현대미술관장, 광주비엔날레 전시 총감독,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등 한국현대미술사에 중요한 지점마다 중책을 맡아 현장을 지키며, 중요한 정책적 결정과 현대 미술 담론 생산의 중심에 서 있었다.

2000년을 전후로 예술경영의 폭발적 성장을 이야기하지만, 예술경영이 하나의 분야로 확립되기 이전부터 예술경영은 존재해왔다. [weekly@예술경영]은 창간2주년을 맞아 특별기획


오광수
‘좌담회-’80 동아미술제를 앞두고’  왼쪽부터 오광수-김구림-윤명로  [동아일보] 1980년 2월 5일자
‘좌담회-’80 동아미술제를 앞두고’
왼쪽부터 오광수-김구림-윤명로
[동아일보] 1980년 2월 5일자
《청년작가전》(1981) 도록 표지
《청년작가전》(1981) 도록 표지
‘환기미술관 세운다’ 신문기사 [매일경제] 1991년 7월 26일자
‘환기미술관 세운다’ 신문기사
[매일경제] 1991년 7월 26일자
김환기 도록 환기미술관이 개관기념으로 발간했다.
김환기 도록
환기미술관이 개관기념으로 발간했다.
2002 광주비엔날레 포스터
2002 광주비엔날레 포스터

필자 김찬동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오광수

우리 미술계에 전시기획자로서의 역할은 대개 1970년대에 와서야 초보적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전에는 주로 공모전방식을 취하거나 대개는 기획자가 없이 작가들끼리 동인차원에서 표제를 건 전시형태가 주종을 이루었다.

한국현대미술에 있어 전시기획이란 용어가 등장한 것은 70년대 중반 이후라 할 수 있다. 당시 동아미술제, 중앙미술대전, 한국미술대상전 등과 같이 주요 신문사를 중심으로 재야전 형태의 전시들이 신설되게 되는데, 운영위원제를 도입하여 전시의 세부내용을 기획하도록 하였다. 운영위원들은 대개 평론가들로 위촉이 되었고 오 위원장은 이러한 재야전에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구체적인 전시기획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재야전의 주된 관심사는 새로운 형상성의 추구였다. 이러한 테제는 전시기획의도를 분명히 표명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1970년대 재야전시, 전시기획의 출발

“중앙, 한국미술대상전은 조금 색깔은 있지만, 3개 신문사 가운데 동아미술제는 출발부터 새로운 형상성을 추구한다는 테제를 만들고 전시를 만들자는 기획으로 운영위원도 작가가 아닌 평론가 중심이었습니다. 일이 상당히 논리적으로 잘 짜임새 있게 전개되었는데, 왜 새로운 형상상이냐 하면 당시 특히 현대미술의 주류가 추상일변도라는 말이 많았고 너무 치우치고 편향적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기 때문입니다. 평론가들이 모여서 균형발전을 위해서 이런 상황을 지양하고 동아미술제는 새로운 구상성의 미술을 발굴하는 사업을 전개하자고 논의했고. 그래서 새로운 형상성을 추구한다는 테제를 내걸었습니다.”

이후 그는 1979년도에 상파울로 비엔날레 커미셔너로 지명되었는데, 그 당시의 커미셔너 는 대체로 한국미술협회(이하 미협) 국제운영위원회에서 지명해서 전시를 맡기지만 관행적으로 이미 작가가 다 지명되어 있었고, 작가선정은 늘 해외전시에 출품하는 몇몇 작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있는 폐단을 가지고 있던 상황으로 형식뿐인 커미셔너제도였다. 그는 커미셔너로 선정되면서 자신의 분명한 주장을 가지고 작가를 선정함으로써 과거의 관행의 고리를 끊는 역할을 수행한다.

“커미셔너라고 하는 것은 책임자, 권한자, 권한 대행자이니까 자기 뜻대로 전시를 구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작가를 넣어달라든지 어떤 것을 해달라는 등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지만 완전히 무시 해버리고 내가 꾸며 보겠다하고 했죠. 상파울로 가는 작가들을 7명을 선정했는데 좀 숫자가 많았던 이유는 그 당시 우리 미술의 가장 에센스를 특히 중견 작가를 중심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꾸며보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 때 나갔던 작가들이 김기린, 진옥선, 이건용, 박현기, 이상남, 김용기, 최병소입니다.”

당시 출품 작가들의 작품들은 화단의 주류적 흐름인 모노크롬 회화가 중심이었는데, 중견작가들의 주류적 경향인 모노크롬 회화를 나름으로 해석해 보고자하는 기획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1979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는 비디오 작가인 故 박현기, 이건용 등 4명이 동행하였는데, 커미셔너와 작가가 현장제작을 위해 해외 비엔날레에 간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현장에서의 작업의 경험은 해외커미셔너들의 활동과 해외전시동향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기회로서 그에게는 전시기획에 있어 상당한 체험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경험은 후일 국립현대미술관의 전문위원(1980~1983)으로 활동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에 큐레이터라는 직제가 없었다”

“그때는 큐레이터라는 직제가 없어서 타이틀을 전문위원으로 붙여서 3년 계약으로 있었는데 국립현대미술관이 덕수궁에 있었던 시기였는데 그때 기획전을 처음 만들었습니다. 그전에는 기획전이라는 게 없고 고작해야 현대작가 100인전, 한국 서양화 대전, 동양화 대전 이런 식의 누구든지 만들 수 있는 끌어 모으기 위한 전시였지 색깔 있는 전시는 못했습니다. 80~83년까지 현대 미술관에 있었는데 그때부터 기획전을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가 국립현대미술관의 전문위원으로 처음 기획한 전시는 1981년 《청년작가전》(현재《젊은 모색전》의 전신)이었다. 이 전시는 비엔날레 형식으로 격년제로 추진되었으며, 당시 새로운 청년작가들을 발굴하기 위한 목적에서 신설되었고, 신진작가들의 새로운 창작활동에 초점을 맞춘 매우 야심찬 기획전이었다. 초청된 작가들에게는 개인전에 버금가는 규모의 공간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작가들에게는 새로운 창작 의욕을 고취하였다. 1980년 당시까지도 화단의 주도세력이었던 모노크롬 작가들에 의해 크게 위축되어 있던 젊은 작가들의 활동을 견인해 내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금년으로 30주년을 맞는 역사적 전시로 자리매김하였고 이 전시를 통해 배출된 유수한 작가들이 중진, 중견으로 한국미술계를 이끌고 있다.

“자기 작품을 제대로 발표하지 못했던 시점이었는데 새로운 작가를 발굴한다는 타이틀을 내걸고 작가를 많이 선정하지 않고 10~20명 선에서 선정해서 그 당시 덕수궁을 다 채웠습니다. 과거에 국전이 덕수궁에서 열렸는데, 그 큰 장소를 20명이 메우려고 하니까 거의 개인전 형식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7~10점 정도 내야해서 그 당시 젊은 친구들도 굉장히 부담스러워했지만, 상당히 의욕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한국화를 전공한 평론가답게 《한국 수묵화전》을 비롯하여《드로잉전》《판화대전》등 당시로서는 주변부로 인식되던 장르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며, 수묵화 운동과 드로잉 및 판화에 대한 자각과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기획전들을 통해 이전까지 대관전, 공모전 위주로 운영되던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최초의 기획전이 열리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특히 수묵화전이 계기가 되어서 80년대에 이른 바 수묵화 운동이 번져나가게 되었습니다. 수묵화를 하는 젊은 작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10년 가까이 전시를 전개했습니다. 이로써 수묵화 운동이라는 타이틀이 붙었습니다. 상당히 위축되어 있던 동양화 화단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어주었던 계기가 수묵화 운동이었고, 단초를 해주었던 것이 수묵화대전이었습니다. 드로잉전의 경우에도, 그 당시 드로잉에 대한 인식이 빈약하여 드로잉을 소묘, 밑그림 이런 식으로 이해되었지 드로잉 자체가 독립된 영역으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드로잉전》을 열면서 드로잉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졌고 그린다는 문제에 대한 어떤 촉매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80년대 되면서 세계 전반적으로 그런 인식, 안 그리는 미술에서 그리는 미술로 변화, 안 그린다는 미술은 개념미술, 미니멀리즘과 같은 소위 안 그린다고 생각하는 미술형식인데, 그리는 걸로 바로 드로잉이겠죠. 묘한 것은 모노크롬이나 개념미술을 하던 현대작가들이 상당한 부분 드로잉을 시작했습니다. 그 드로잉도 매체자체가 매우 흥미로운 데 한지 위에다가 드로잉 하는 작업을 시작했어요. 말하자면 드로잉이라는 새로운 형식이 발굴되면서 동시에 한지가 발굴된 것입니다. 한지라는 매체가 왜 중요성을 갖냐면 그 당시 순수한 한지 생산이 수익성이 없기 때문에 완전히 단절되다시피 했던 것이죠. 그 당시 작가들이 한지를, 순수한 우리의 닥종이를 찾고자 생산하는 곳을 전국적으로 찾아보았는데 원주에 한곳이 있었습니다. 원주에서 공장을 하고 있었던 사람은 돈이 돼서 하는 게 아니라 한지를 살려야겠다는 문화의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에 의해서 한지가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순수한 우리의 재래식 공정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한지였고 현대작가들이 그것을 구입하기 시작했고 캔버스 사이지로 주문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지가 활기 있게 전파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은 한지를 쓰는 사람들이 많고 캔버스 위에 한지를 붙여서 하는 사람도 많고 또 그것에 연유해 한지작가 협회라는 것도 만들어 지고 하여튼 새로운 문화운동 형식으로 번져나갔다고 볼 수 있죠. 기획전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그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전파력이 있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건축부터 살림살이까지 미술경영 전반 체험

그는 전시기획자로서 한국현대미술의 중요한 담론생산에 기여한 최초의 기획전들을 다수 기획함으로써 전시기획이나 기획자라는 명칭이 명확하게 서있지 않던 한국미술계에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그의 역할은 이후 환기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하면서 좀 더 미술경영의 현장책임자로서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데, 사립미술관과 공립미술관의 경영자로서 단순한 기획자라기보다는 큰 의미의 한국 미술 전체를 대상으로 정책적 고민과 또 그것을 구체화시키려는 사명을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그는 91년 환기미술관이 신설되면서 초대 관장을 맡았다. 건축부터 미술관의 건립 운영전반에 관여하고 재정, 인사 등 미술경영의 구체적 현장을 책임지게 됨으로써 미술경영인으로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관장은 큐레이터와 달리 전체를 아우르는 위치이기 때문에 단순 기획자보다는 소위 말하는 예술경영이라는 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큐레이터라는 것은 순수한 기획자로서 경영에 어느 정도 거리가 있지만 관장은 경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본래 기능이 있고 미술관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살리는 역할이 있는데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경영적인 마인드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환기미술관에는 90년에 들어가서 99년까지 10년 가까이 운영을 했는데 상당히 좋은 경험이 되었죠. 미술관장으로서의 경험 외에 조직을 운영하는 것을 많이 배웠죠. 지금 예술위에서도 기금 문제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데, 작은 환기미술관도 재정 문제 등으로 여러 시도를 했었죠. 전체를 관장 혼자 다 해나가야 하니까. 그런 과정에서 사회적 경험도 많이 쌓은 것이죠. 예를 들자면 월말에 가까워지면 직원들 봉급을 줘야 되는데 관장이 책임주고 봉급을 줘야 되는 고민부터 순수한 임명제 관장이 아니고 살림을 사는 사람으로서의, 주인은 미국에 있고 그 분은 가끔 왔다 갔다 하는 처지고, 모든 것을 제가 처리해야 되기 때문에 사회적인 경험을 많이 쌓았다고 볼 수가 있죠.”

환기미술관에서의 관장으로의 경험은 그가 예술경영, 미술경영에 대해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된다. 이 경험은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또 예술위의 위원장으로 발탁되는 매우 중요한 경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관장이라는 자리는 발이 넓어야 되고 많은 자원을 끌어들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고 순수한 미술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외부적인 사회관계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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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 중심의 미술관 운영에 힘썼다”

환기미술관장으로서 그는 10년간은 전시기획과 미술관경영 두 측면에서 매우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시간을 보냈다. 자율권을 가지고 전시를 기획하고 운영을 책임지는 상황에서 큐레이터를 훈련시키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후 1999년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는데, 소규모의 환기미술관과 달리 국립미술관이 가지는 위상으로 매우 중대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당시까지도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있는 큐레이터 중심의 미술관 운영에 매진하며, 미술관에서 학예연구원들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일에 매진하게 된다. 그는 당시 미술관장으로 부임하면서 외형과는 달리 미술관의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점을 크게 고민하고 이에 대한 대책에 고심하였던 것 같다.

“바깥 모양은 상당히 잘 꾸며져 있는데 그것을 운영하는, 말하자면 운전하는 사람들의 인식이라든지, 구조, 시스템이 굉장히 열악했습니다. 그래서 뭔가 혁신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미술관은 큐레이터가 주인이니까 큐레이터 중심으로 간다고 아주 못을 박았어요. 그래서 모든 것을 큐레이터 회의에서 결정하고, 작품 사는 것에서 수급하는 것, 전시를 기획하는 것 전체를 큐레이터가 다했습니다. 그전에는 큐레이터 가운데 한두 사람만 관장과 함께 전시를 하는 것이에요. 다른 사람은 다 들러리고 심부름만하고 큐레이터 스스로의 능력을 제대로 안줬습니다. 그대로 둬선 안 되겠다 생각해서 각자 전부에게 전시를 맡겨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현대미술관 큐레이터들이 전시기획자로서 자부심을 느끼기 시작했죠. 그런 경험이 있고 아마 그런 것을 해본 것이 어떻게 보면 현대미술관측이나 나한테 다 공부가 되었다고 볼 수 있죠. 현대미술관도 지금까지 일방적인 통로로 가던 그런 것이 여러 기획자들에 의해서 다른 생각들을 조합하고 그런 것들이 한사람이 전시를 기획하면 혼자서 독단적으로 해버리는 것이 아니고 자꾸 의논하면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면 다른 큐레이터들도 가끔 거들기도 하고 비판을 하기도 하고 그래서 넘어가는 훈련을 했기에 큐레이터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미술관 운영에서 핵심적 기능인 학예기능을 강화함으로써 미술관의 체계를 정비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노력을 기울였고 큐레이터중심의 미술관운영을 시스템화하였다. 실제 국립미술관의 학예중심의 체제정비는 이후 공립 및 사립미술관 운영의 전범을 제시하며 중요한 파급효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다.


오광수

환기미술관에는 90년에 들어가서 99년까지 10년 가까이 운영을 했는데 상당히 좋은 경험이 되었죠. 미술관장으로서의 경험 외에 조직을 운영하는 것을 많이 배웠죠. 예를 들자면 월말에 가까워지면 직원들 봉급을 줘야 되는데 관장이 책임지고 봉급을 줘야 되는 고민부터 사회적인 경험을 많이 쌓았다고 볼 수가 있죠.

“비엔날레는 한 시대의 물결을 바꾸어 놓는다”

90년대 중반 이후 미술계가 글로벌화되면서 미술계의 대표적 주체인 비엔날레의 신설에도 참여하게 되고 광주비엔날레 전시총감독(2000),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1997)를 역임하는 등 변화된 한국현대미술의 현장의 중요한 사령탑으로서 활동을 하게 됨으로서, 미술관의 전시와는 다른 맥락에서 한국미술의 세계화에 기여하게 된다. 그는 광주비엔날레가 창설되는 과정에도 관여하여 산파 역할을 하였고 특히 2000년도 제3회 광주비엔날레의 총감독을 맡아 ‘인+간’이라는 주제의 전시를 총괄한 바 있다.

“광주 비엔날레는 95년에 만들어졌는데 처음 만들 때부터 관여했습니다. 작고한 김영중 조각가가 광주 출신인데 그 양반이, 95년도 제가 평론가협회회장을 할 때 같이 광주에 가자고 해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시장을 만나서 의논을 해야 하니까 협조해달라고 했습니다. 현 강운태 시장이 임명 시장이었는데, 이런 계획서를 내놓고 비엔날레를 광주에서 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강운태 시장도 마인드가 열려있는 사람으로 해보자고 해서 광주 비엔날레가 된 것입니다. 광주 비엔날레가 만들어 지면서 우리 미술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상당히 높아진 것은 틀림없죠. 물론 그 뒤에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은 다른 과제이지만 일단 광주 비엔날레가 만들어짐으로써 국제전을 이끌어 갈만한 역량이 우리 속에서 나왔기 때문에 나름으로 국제적으로 상당히 인정을 받는 차원에 도달한 것이죠.

비엔날레를 통한 전시 기획은 한 시대의 물결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물고를 다른 데로 틀 수 있는, 또는 한 시대를 정리하는 여러 가지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획자마다 의뢰받은 전시를 끌고 가는 것은 그 사람의 아이디어에 달려 있지만 큰 것은 역시 한 시대를 어떻게 정리하느냐, 한 시대의 비전을 자기 나름으로 어떻게 만들어 가냐는 것에 맞춰지는 것이죠. 광주도 상당히 그런 쪽에 맞춰줘 왔다고 봅니다.”

그는 97년 베니스 비엔날레 커미셔너를 맡아 참여하게 되었는데 과거 7~8명, 10명씩을 내보내던 관행과 달리 2인을 선정하였다. 특히 규모가 적은 한국관의 공간을 감안하여 강익중, 이형우의 매칭을 통해 회화와 조각의 본질에 관해 질문하는 내용의 전시를 매우 짜임새 있게 기획하였다. 이 전시에서는 강익중이 특별상을 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베니스 비엔날레 때 과거식으로 하지 않고 개인전을 갈 것이냐 고민하다가 두 사람을 했는데 그 이후로 사람이 줄었죠. 올해는 한명으로 줄었죠. 오히려 그게 보여주는 데 굉장히 효과적이죠. 한두 사람의 경우 색깔을 살릴 수 있는 것이죠. 또 역설적인 생각도 해봤습니다. 한국에서 베니스비엔날레에 두 번째로 우리 관을 만들고 나갔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가고 싶어 하는데 이 사람들을 다 채워주는 방법이 없을까하다가 엽서만한 사이즈에 가고 싶은 작가는 다 그려라 하고 전시장 전체를 도배를 해볼까,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비엔날레가 뭐냐 하는 비판을 던져줄 수도 있고요. 그렇게 하려니 절차가 너무 복잡하고 혼자서는 도저히 안 되겠어서 강익중, 이형우 두 사람이 바닥과 벽을 채우는 것으로 하자 해서 만든 것이죠. 그때도 평가가 좋았습니다. 내가 의도하는 것이 그림이란 것이 뭐냐, 조각이란 무엇이냐는 근원적인 문제를 두 사람이지만 압축해서 보여주자는 의도를 살려서 그 나름으로 평가는 좋았습니다. 그래서 강익중 씨는 특별상도 받고 그랬죠.”




“순수예술 지원이 더욱 필요한 시대”

현재 예술위의 수장인 오 위원장은 명실상부한 공공기관의 CEO로서 중책을 맡고 있다. 국가전체의 예술지원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제도와 이를 운영할 주체인 위원회의 조직과 재원 등 숱한 과제를 풀어가느라 여념이 없다. 특히 미술평론가로서 현재 지나치게 상업화로 흐르는 미술계의 동향에 비추어 공공영역의 지원프로그램을 통해 미술계를 활성화할 수 있는 방안들에 대해 고심하고 있다. 상업화는 불가피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순수예술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창작 여건을 조성하는 일을 통해 미술계를 정화시키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상업성에 의해서 병들어 가고 있는 그런 몰골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어떤 측면에 있어서는 상업성을 전혀 배제 할 수는 없어요. 그건 그 나름으로 가고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순수성을 지원하고 창작의 틀을 만들어주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기 때문에 순수예술 지원이 강할수록 상업성이 아무리 날뛴다 하더라도 오히려 상대적으로 순수예술이 살아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를 보면 너무 작품을 상품화하고 파는 것에 골몰하는 경향이 상당히 많이 보이고 어떻게 하면 뜨는가, 어떤 형식으로 그리면 빨리 상품화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젊은 친구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시대적 풍조이고 예술가만 그런 게 아니고 워낙 사회전체가 그렇죠. 그러나 순수예술을 지원하는 게 강하면 강할수록 그런 것은 나중에 없어지겠죠.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순수예술에 대한 지원을 지속, 활성화해서 우리 미술계를 정화시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 이 기사는 필자의 요청에 의해 11월 19일에 수정되었습니다.


김찬동 필자소개
김찬동은 홍익대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를 수료하였다, 84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 입사하여 미술회관 큐레이터, 팀장, 문학미술팀장, 미술전문위원 등을 역임하고 현재는 아르코미술관장으로 있다. 80년대 중반 META-VOX 그룹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93년까지 개인전 2회, 그룹전 40여회 참가하였다. 광주비엔날레 특별전큐레이터 등 전시기획자로 활동하였으며, 비평웹진 [미술과 담론]의 편집위원, 한국예술경영학회 부회장이다.
kcdong@ark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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