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조 이미지 -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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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 스타일 매뉴얼>표지

다른 분야도 그렇겠지만, 특히 미술현장에는 &lsquo;입문&rsquo;하는 공식적인 방법이 별로 없다. 그래도 찾아본다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작동할지 알 수 없는 &lsquo;인맥&rsquo; 정도겠다. 뿐만 아니라, 현장에 나가면 체계적으로 일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ldquo;회사가 학교냐&rdquo;는 말과 함께 무너지기 십상이다. 그냥, 선배들 보면서 눈치껏 알아서 하는 식이다. 그것이 가장 좋은 학습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뭔가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내가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미술계 현장에 입문한 방식도 &lsquo;인맥&rsquo;이었고, 일을 배운 방식도 &lsquo;눈치&rsquo;였다. 미술사학과를 수료한 후, 선배의 소개로 처음 화랑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나의 상사는 샘플 하나 던져주고는 전시 보도자료를 써오라고 했다. 좋은 보도자료를 쓰기 위해서는 작가와의 인터뷰가 필수적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사실조차 몰랐던 병아리 시절, 온갖 자료들을 토대로 열심히 작성한 보도자료에 대해 상사가 했던 말은 &ldquo;너 지금 논문 쓰냐. 다시 해와&rdquo;였다.

이후, 논문과 보도자료의 차이를 알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 외에도 전시 기획하는 법, 작품 설치하는 법, 작가를 만나 대화하는 법, 동료들과 함께 일하는 법, 낯선 사람에게 일 시키는 법 등등 학문으로서의 미술밖에 공부해본 적 없는 내가 현장에서 알아야 할 많은 것들을, 여기저기 민폐를 끼치면서 눈치껏 해결해나갔다.

그 과정을 통해 깨달은 것은 잘 하지 못하면 며칠 밤을 새워가며 아무리 열심히 해봐야 전혀 소용없다는 사실이었고, 일을 잘 하려면 일 잘하는 사람 밑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백지상태의 인물이 일을 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선배이니, 그가 일을 이상하게 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이상한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없는 나 역시 이상하게 일하는 사람으로 &lsquo;성장&rsquo;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곳에서 일을 시작한다면 좀 나을 수도 있겠지만, 한국 미술계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그런 직장은 또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니, 선배만이 &lsquo;교과서&rsquo;인 위험한 환경에서 다양한 &lsquo;참고서&rsquo;를 만날 수 있으려면 일과 놀이가 잘 구분되지 않는 미술계라는 정글을 쏘다니면서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 긴 시간과 체력을 요하는 일이다.

그렇게, 대부분의 미술계 인력들은 본능적인 감을 기반으로 한 눈치에 기대어 일을 배우면서 조금씩, &lsquo;현대미술의 장에서 통용되는 독특한 역할 분담의 구조와 행동양식&rsquo;을 파악해 나간다. 그리고 마치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던 양 &lsquo;우아하게&rsquo;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들이 온몸으로 깨달은 &lsquo;일하는 법&rsquo;이 딱히 비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입 밖으로 잘 나오는 편도 아니다. 미술계 일이라는 게 그냥 그렇게 마치 자전거를 배우는 것처럼 각자 깨달아 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흥미진진한 책이 한 권 등장했다. 바로,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파블로 엘구에라의 『현대미술 스타일 매뉴얼』이다. 저자는 미술계를 체스판에 비유하는 등, &lsquo;재치 있는 유머와 신랄한 풍자&rsquo;를 섞어 오늘날의 미술계가 어떻게 작동하고, 그 안에서 통용되는 규칙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 이 매뉴얼을 정리하기 위해 그는 지난 10여 년 간 &lsquo;미술계 전문가들이 무대 뒤에서 행한 논평과 관찰을 공식인터뷰와 비공식적인 대화를 통해&rsquo; 수집했다고 한다. 그렇게 발품을 팔았기 때문일까. 일을 배우는 과정에서,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궁금해 하고 있는 &lsquo;미술판 게임의 원리&rsquo;에 대해 꽤 유용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lsquo;글&rsquo;로 배우는 미술현장에 한계야 있겠지만, &lsquo;병아리&rsquo; 시절 읽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책이니, 눈치 빠른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놓치지 않을 것 같다.

김지연 필자소개
김지연은 미술사와 미술이론을 전공했다. 가나아트센터 전시기획자를 거쳐 현재 학고재갤러리 기획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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