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을 전후로 예술경영의 폭발적 성장을 이야기하지만, 예술경영이 하나의 분야로 확립되기 이전부터 예술경영은 존재해왔다. [weekly@예술경영]은 창간2주년을 맞아 특별기획

그의 프로필은 극작가로 시작하지만 한국 연극계에서 그의 자리 중에서 가장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제작자로서의 김의경이다. 그는 1960년 실험극장의 창단부터 줄곧 제작자 또는 그와 유사한 역할을 맡았다. 특히 1976년에 창단한 현대극장 제작자인 김의경은 우리 공연사에 프로듀서 또는 제작자의 한 전형을 보여주었다. 공연기획과 관객개발, 연극경영이라는 말이 그에게서 비롯되었다.

김의경
『실험극장 10년지』
실험극장 창단 10주년 파티
▲▲『실험극장 10년지』
▲ 실험극장 창단 10주년 파티
[경향신문] 국립극장 개관 기사(1973.10.13)
[경향신문] 국립극장 개관 기사(1973.10.13)
 ◀‘전문극단 현대극장 창단’  (신아일보, 1976.9.4) ▶ ‘연극의 직업화에 새 시도’ (서울신문, 1976.9.6)
◀ ‘전문극단 현대극장 창단’
(신아일보, 1976.9.4)
▶ ‘연극의 직업화에 새 시도’
(서울신문, 1976.9.6)
현대극장의 어린이연극
현대극장의 어린이연극
현대극장의 어린이연극
현대극장의 대표 레퍼토리 공연
현대극장의 대표 레퍼토리 공연
김의경
베세토연극제 창립의 주역들. 왼쪽부터 서효종, 김의경, 스즈키 다다시
2000년 베세토연극제 <한중일 합동 춘향전> 포스터
▲▲ 베세토연극제 창립의 주역들.
왼쪽부터 서효종, 김의경, 스즈키 다다시
▲ 2000년 베세토연극제
<한중일 합동 춘향전> 포스터

서울시립극단 시절 만든 프로그램 겸 잡지 [시민연극]
서울시립극단 시절 만든 프로그램 겸 잡지
[시민연극]

연극인 김의경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연극인’ 정도가 그의 다양한 활동의 테두리를 그나마 맞게 표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그의 연극인생을 관통하는 몇 가지 활동을 나열해보면 이렇다.

먼저 극작가. 1964년 [문학춘추]를 통해 극작가로 데뷔했다. <남한산성>(1973), <길 떠나는 가족>(1991), <팔만대장경>(1999) 등 서사극과 역사극이 주요 영역이다. 다음은 제작자다. 그의 프로필은 극작가로 시작하지만 한국 연극계에서 그의 자리 중에서 가장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제작자로서의 김의경이다. 그는 1960년 실험극장의 창단부터 줄곧 제작자 또는 그와 유사한 역할을 맡았다. 특히 1976년에 창단한 현대극장 제작자인 김의경은 우리 공연사에 프로듀서 또는 제작자의 한 전형을 보여주었다. 공연기획과 관객개발, 연극경영이라는 말이 그에게서 비롯되었다.

김의경의 또 다른 면은 조직자다. 극단과 사업을 조직하는 것은 제작자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국내외에 새로운 조직과 행사를 만드는 데 선수였다. 그의 주도로 이루어진 ‘제3세계연극제’ ‘베세토연극제’ ‘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 등은 그 중 일부다. 그는 예술경영자, 예술행정가, 연극교육자이기도 하다. 그는 장충동 국립극장의 첫 공연과장을 역임했다. 1970년대 초반에는 (후에 중앙대학교와 합친) 서라벌예대의 교수이기도 했고, 아시테지 초대 이사장과 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서울시 극단의 초대단장을 맡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기록자다. 실험극장 이후 그가 거쳐 간 자리에는 이전과는 다른 수준의 기록이 남았다. 지금도 ‘기록’은 그의 주관심사 중의 하나다. [weekly@예술경영]이 우리 예술경영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만난 인물로 적당한 이유를 고루 갖춘 셈이다.

조직하는 것의 재미

“언젠가 ‘연극을 왜 하게 되었느냐’ 라고 질문 받은 적 있는데, 무심코 ‘조직하는 데 재미를 느꼈다’고 말한 적 있었습니다. 대구 피난 시절이었죠. 그때 고 1이었는데, 학교에서 연극을 했어요. 나는 주인공 할 생각으로 갔는데 내게 맡겨진 것은 프롬프터였습니다.(웃음) 그때는 프로들이 하는 연극도 연습을 몇 달 하는 법이 없었어요. 보통 1주일, 열흘 길어야 2주였습니다. 그러니까 대충 맞춘 다음에 배우가 외우지 않은 채 공연이 시작되면, 장치 뒤에 대사를 읽어주는 사람들이 있었죠. 그게 프롬프터입니다. 피난지의 연합고등학교니까 여러 고등학교 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였죠. 하여튼 특별히 연극을 좋아할 이유도 없었는데 궁하게나마 찾아낸 게, 어떤 조직에 대한 매력, 그런 것 같습니다.”

그는 서울사대부고를 거쳐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조직하는 데 재미를 느낀’ 그는 이후 연극 분야 안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재미를 느끼게 된다.




최초 텔레비전 방송국과 실험극장

“내가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 연극 모임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때 그 모임들의 주요 멤버들이 HLKZ1)이라는 대한민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이었습니다. 방송국이 화신백화점 건너편 보신각 바로 옆 건물에 있었죠. 그때 사장은 장기영 씨(한국일보 사주)였고 방송부장은 나중에 MBC 사장을 하신 최창봉 씨였습니다. 제작극회의 창립동인이기도 했던 최창봉 씨가 방송부장을 하면서 텔레비전 드라마도 했지요. 그때는 녹화방식이 없었으니 드라마도 다 생방송이었습니다. 작고한 이기하라든가 황운진이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조무래기로 참여할 때였는데, 나는 그나마도 나이가 한두 살 모자라서 못 끼고 옆에서 왔다 갔다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실험극장이 만들어졌죠. HLKZ에 이기하라고, 연대 국문과 출신인데 나중에는 KBS, MBC에서 드라마 제작국장을 지낸 이인데, 이 사람이 ‘연희극예술회’ ‘고대극회’ 등 대학극 출신 젊은이들을 모아서 연출을 했어요. 이기하는 대전고등학교 출신인데 조그맣고 못생겼어요. 진짜 못생겼어요. 내가 백배는 잘생겼지.(웃음) 하지만 그이의 열정과 재주는 ‘못생긴 것의 100배’는 될 겁니다. 나는 사람들이 모여서 잡담이나 하고 그러기 보다는 무언가 필요한 일을 해보자, 공부를 해보자, 연극 얘기를 좀 조직적으로 해보자는 생각이었어요. 엄밀하게 말하면 극단은 목표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시작을 하자마자, 6개월 만인가, 공연을 했으니까 결국 그게 극단의 출발이었던 셈이지요. 1960년 11월에 <수업>을 공연했죠. 허규가 소위 서사극에 빠져 있을 때였는데, 작품은 이오네스코를 한 거예요. 소위 반연극(Anti-Theatre)을 서사극으로 해석했는데 이런 사실을 비판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우리 연극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실험극장. 1960년 10월 창단한 실험극장은 1960년대 들어 연극계를 주도하는 동인제 극단들의 선두주자였다. ‘연극을 학문으로서 공부하고 연극을 직업으로 한다’는 기본자세에다 5조 10항의 화려한 공약을 발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실험극장을 시작하면서 선언문(manifesto)을 냈었는데, 내가 그걸 어디서 배웠냐면, 우연히 [막](幕)이라는 동경학생예술좌의 잡지 창간호를 보고서였습니다. 대학 후배 집에 놀러갔다가 그 집 다락방에서 그 책을 봤어요. 후배 아버지가 아마 동경 유학생이었던 모양이지요. 한 50여 페이지 되는 얄팍한 잡지였습니다. 동경학생예술좌는 1934년에 주요한의 동생인 주영섭(朱永涉, 이후 월북)이 주도하고 마완영, 이해랑, 이진순, 박동근 같은 사람들이 참여해 4~5년쯤 활동을 했죠. 그 사람들 거의가 1916년생이니까 스무 살 안쪽 때였죠. [막]에 실린 그 사람들의 선언문을 보고, ‘아, 극단이라는 건 이렇게 시작하는구나’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죠. 그래서 우리도 모두가 연극의 실험의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고 연극을 직업으로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식의 선언문을 썼지요. 다들 또래들이고 갓 대학을 졸업해서 직업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실험극장 운영에는 지금의 표현에 따르면 재원조성과 회원제 등의 고민이 엿보인다. 관객실태조사와 관객운동을 사업계획에 포함시킬 정도다. 후원회원을 모집하고 관객개발을 도모했다. ‘상술이 좋아도 상품이 좋지 않아서는 아니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품이 아무리 좋아도 상술이 뒤따르지 않아서는 아니 된다’(실험극장 10년사)는 주장은 1960년대 초반에 이미 공연마케팅을 본격적으로 주장하는 것으로 읽힌다.




국립극장 레파토리 공연, “무대 팀이 길길이 화내더라”

1971년 대학에 자리를 옮길 때까지 10년 이상 젊은 김의경의 직장은 방송국이었다. 나중에 그가 뮤지컬 등 대형 공연을 흥행시킬 때 미디어와 협업하는 과정에서 이 인연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1961년 MBC 창설멤버로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1971년 퇴직할 당시에는 TBC 소속이었다.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 학과장으로 짧은 교원생활을 거쳐 국립극장으로 옮긴 것이 1973년이다. 장충동에 새 극장을 짓고 개관한 국립극장의 첫 공연과장이었다. 그 직전에 그는 미국에 가서 연극 공부를 하고 MFA를 딴다. 미국에서 연극 전공으로 딴 첫 MFA 취득자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기회를 가진 그의 미국 유학 경험은 그가 후에 국제활동을 하는 밑거름이 된다.

“장충동 국립극장의 초대 극장장은 김창구 씨라고, 서울대 음대 1기 졸업생입니다. 다른 공무원하고는 달리 극장에 대한 관심이 컸던 분이죠. 다른 곳 옮기기 전에 들르는 임시정거장으로 생각하지 않고 극장을 자기 천직으로 생각하고 좋아하던 사람입니다. 거기서 1973년부터 1976년 초까지 2년 반 정도 초대 공연과장을 지냈습니다. 그때 내가 여러 관습들을 새로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는데 두 가지가 기억에 남습니다. 첫 번째는 그때까지 국립극장을 내셔널 씨어터(National Theater)라고 썼는데 내가 ‘오브 코리아’(of Korea)를 붙였습니다. 공로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내셔널 씨어터 오브 코리아(National Theater of Korea)라고 씁니다. 두 번째는, 내가 들어간 이듬해에 합창단, 오케스트라를 제외한 다른 단체들은 다 일 년 전에 레퍼토리를 정했습니다. 무슨 작품을 할까 그때그때 정하는 게 아니라, 그 다음해 일 년 동안의 작품을 미리 선정했죠. 개관 초기 프로그램 책자를 찾아보면, 다음 해 공연 레퍼토리를 알리는 광고가 있을 겁니다.”

최신식의 설비와 넓은 로비 등을 갖춘 국립극장의 개관을 준비하면서 이전의 관행을 바꾸고 새로운 것들을 정착시킨다. 이 과정에 그는 유럽식 레퍼토리 시스템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한국연극사에서 극장사의 시작은 이 장충동의 국립극장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극장은 공연예술의 터인데 그 터 없이 지속적인 공연예술을 기대할 순 없으니까요. 극장이 없는 극단은 당장 다음해에 어디서 공연할지도 모르는 형편이죠. 그래서 나는 거기에서부터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단체마다 고정 레퍼토리를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일 년에 네 작품을 한다면 그 중 두 작품은 레퍼토리로 하고 두 작품은 신작을 한다. 소위 유럽식의 레퍼토리 공연을 하려면 한 시즌에 몇 개 공연을 정해서 2~3일 공연하고 무대 바꿔서 다른 공연하고 그래야 하는 거죠. 상업연극처럼 한 달 또는 두 달 내내 한 공연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시 제가 그런 제안을 했더니 무대과장이 자기네를 죽일 셈이냐며 길길이 화를 냈죠. 그때만 해도 장치를 세우고 철수하는 무대 작업이 미숙할 때니까요. 무엇보다 인력이 모자랐지요. 개관 초기라 나도 양보하고 극장장도 어쩔 수 없어서 레퍼토리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내놓자마자 깨졌어요. 공연 목록이라는 것을 최소한 일 년 전에 정해서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했던 것도 내가 2년 반 만에 그만뒀으니 지속이 안 되었죠.”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전문극단, 연극의 직업화의 새 시도, 상업극단과 동인제의 한계성 탈피', '현대극장이 상업극시대를 열었다' 뭐 이렇게 써서 그렇지, 우리나라 상황에서 상업극을 한다는 것은 사실 가능하지 않습니다. 다만 전문화 되는 게 첫째이고 전문화되기 위해 평균 B학점 이상의 스태프와 캐스트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공연을 많이 해야 했죠.

현대극장 창단, “한창 때는 100일, 150일을 공연했다”

1970년 실험극장 10년을 맞아 『실험극장 10년지』가 발간되었다. 그는 이 책자에 실은 ‘실험극장의 출발과 재출발’이라는 글에서 “지난 10년은 실험극장의 아마추어적인 방황기로 보아도 좋았다, 새 10년은 프로페셔널리즘의 정착기로 삼고 싶다”고 적고 있다. 그의 이런 희망은 현대극장을 창단하면서 구체적으로 진척을 보이게 된다.

“미국서 들어온 해가 실험극장 10주년이어서 ‘실험극장의 출발과 재출발’이란 글을 썼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구체적으로 직업연극을 표방한 건 현대극장을 하면서였다고 봐요. 그때는 직업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솔직히 지금 그게 얼마나 이뤄졌냐고 물으면 알 수 없죠.

내가 현대극장을 만들 때만 해도 모든 연극 단체들이 일 년에 두 번 정도밖에 공연을 안 했습니다. 그래서 현대극장에서 했던 일이 공연을 많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창 할 때는 1년에 100일, 150일까지 공연을 했었죠. 그렇게 극단이 운영되려면 배우들을 붙잡아야 하고, 배우들을 붙잡으려면 또 공연을 해야 했죠. 김상열을 포함해서 7~8명에게 월급을 십만 원씩 줬습니다. 그때 월급 받았던 배우들이 윤문식, 작고한 김종구, 미국에 간 양성화, 양재성, 최주봉 등입니다. 이런 친구들이 가끔 회고를 하는데, 그 십만 원이 참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지금도 현대극장 연구생 출신들이 사방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그 친구들이 서울이건 지방이건 공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지요. 그 만큼 연기력을 키울 수 있었던 거죠.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커뮤니티 의식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매년 봄이면 극단 체육대회를 하는데 단원 부인들까지 애를 업고 와서 참가하곤 했었죠. 애들 경주도 하고 점심도 먹고 술도 먹고 하는 요샛말로는 패밀리데이 같은 걸 매년 했습니다. 가을에는 수련대회를 해서 1박2일 코스로 산에 가서 자고 왔었죠. 그게 커뮤니티를 감각적으로 의식하게 하는 방법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나는 극단이라는 것이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하나의 운명공동체라고 봅니다. 이런 뜻으로 내가 쓰는 ‘모둥킴’이라는 단어도, 동경학생예술좌의 [막]이라는 잡지에서 처음으로 발견해서 쓰는 단어인데, 일종의 ‘집단성’이란 의미입니다. 주영섭이라는 사람이 쓴 글을 보면, ‘극단은 하나의 부족이다. 만약 그 부족이 왼쪽 귀를 자르는 풍습이 있다면 모든 단원들을 귀를 잘라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그 말이 너무 좋았어요. 왼쪽 귀를 자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공동의식을 갖고 일 년에 몇 번씩 지방공연 다니고. 공연일수도 많으니까 자연히 단원이 연애할 시간조차 없었을 정도였죠. 그런 식으로 단체가 존재해야 구심력이 나오고 가족의식 같은 것도 생기는 거죠. 그래서 지금도, 상업연극은 관계가 없지만, 연극을 진실로 전문직업으로 삼고 싶다면 반드시 그런 공동운명체 같은 의식을 갖고 하나의 예술 스타일을 지속적으로 관철 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이 일본의 스즈키 다다시 극단 같은 거고, 손진책의 미추도 비교적 그런 편이죠. 현대극장 초기에 했던 것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냥 간단하게 이합집산 하는 극단이어서는 자기 자신의 스타일은 성립할 수 없으니까요.”

극단,기획제작,공연,아카데미 ... 직업연극, 전문연극의 길

현대극장의 창단은 언론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는다. 김의경이 막 40대에 접어든 시점이었다. 현대극장의 방향으로 제시한 ‘전문연극’ ‘직업연극’ ‘과학화’의 화두들이 매우 새로웠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그것이 연극이 살 길이다.

“첫 공연 <막베뜨>(1976년 11월)를 했지요.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전문극단, 연극의 직업화의 새 시도, 상업극단과 동인제의 한계성 탈피’ ‘현대극장이 상업극시대를 열었다’ 뭐 이렇게 써서 그렇지, 우리나라 상황에서 상업극을 한다는 것은 사실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전문화 되는 게 첫째이고 전문화 되기 위해 평균 B학점 이상의 스태프와 캐스트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공연을 많이 해야 했죠. 그 당시 극장이 몇 개밖에 없어서 극장의 개념을 확대하기 위해 유관순기념관 빌려서 공연하고 지방에서는 문예회관이 없어서 체육관 빌려서 공연하고 그랬습니다.

1980년에 들어서는 농촌, 어촌, 탄광촌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습니다. 그때 이동무대를 만들었어요. 극장이 없으면 공연할 수 없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연극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죠. 초등학교, 중학교 운동장에 무대를 설치하고 공연을 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미국의 연출가 겸 평론가인 해롤드 클러먼(Harold Clurman)의 충고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연극은 어린이 연극부터 시작하라’고 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공연을 보게 해서 미래의 재능과 미래의 관객을 개발한다는 것이죠. 관객의 전 연령층화. 그래서 어린이 연극, 청소년 연극, 어른 연극, 심지어는 장애인 연극, 하다못해 교도소에 연출자를 파견해서 수감자들과 공연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는 여대생들이 주요 관객이었는데 여대생들은 연애할 때만 남자친구들하고 극장에 오고 결혼하면 극장에 안 왔어요. 관객개발을 위해 여대생에 편중되어 있는 관객층을 어린이, 청소년, 어른, 장애인 등으로 넓힌 것이죠. 장애인에게 관람 기회를 주고, 수감자들과 공연을 같이 만들면서 계층적으로 연령적으로 공연을 확대하는 것이 우리들의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연을 많이 할 수 있었죠.

또 스폰서를 많이 얻어온 내 처(崔文卿)의 공로가 컸습니다. 그에 의하면, 자기는 상당히 딱딱한 다이아몬드라는 겁니다. 관공서 관리의 대부분은 일반인들과 달리 금속인데, 자기는 다이아몬드라 금속보다 강하다는 거지요. 내 처는 현대그룹, 태평양화학 같은 데서도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스폰서를 받아와서 청소년공연도 하고 전국순회공연도 할 수 있었죠. 어린이공연은 해태가 스폰서를 해줬습니다. 그런 식으로 연령층 지역을 확대하고 보급하게 된 거죠.

그렇게 공연을 하려면 그만큼 인적 자원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1977년에 현대연극아카데미 (Hyundai Academy for Dramatic Arts, HADA)를 만들게 되었죠. 지금까지 정식으로 현대아카데미를 졸업한 사람들이 500명 정도 되는데 그 중 20%는 현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김갑수(1기)나 박해미 같은 사람도 현대 출신입니다. 그들이 재능과 열정도 있었지만, 그들에게 공연할 기회가 많았다는 것도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극단의 연구생들은 일 년에 20~30일 정도 출연하는 것이 다였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재능을 늘릴 수 없죠. 그런데 우리는 한번 농어탄광촌 공연을 하면 제주도 포함해서 52곳, 54회 공연을 했죠. 그것이 배우들에게는 상당한 기회가 됩니다.




해태명작극장과 청소년 프로그램

현대극장은 어린이연극과 청소년연극으로도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친다. 극단 사계의 명작극장을 연상시키는 해태명작극장이나 청소년 프로그램은 현대극장의 강점 중 하나다. 그것이 관객개발이나 공연의 횟수를 최대화하는 효과도 있었지만 현대극장이 추구하는 ‘연령과 지역의 한계를 넘는 관객층’의 적극적 접근방식이다.

“영국 학자가 쓴 『드라마의 이론』(Allardyce Nicoll: Theory of Drama)을 보면, 어느 특정 계층만이 아닌, 사회 각 계층의 관객(heterogenous audience)이 골고루 서포트를 해줘야 극장 예술이 산다는 거죠.

우리에게는 어린이 연극을 위한 해태명작극장이 있었고, 일반 공연을 청소년들에게 맞게 어레인지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연한 중고생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이 공연들은 상당 부분 태평양화학에서 스폰서를 했습니다. 오리온하고는 인형극장을 만들었는데 길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해태명작극장은 1977년 제1회로 <보물섬>을 했고,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습니다.

일본의 극단 시키(四季)가 1950년대 창단해서 1960년대 전후해서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어린이 연극을 처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 뮤지컬 <빠담 빠담>은 그쪽과는 아무런 교감이 없이 시작했는데 일본에서도 같은 소재로 제목도 <사랑의 찬가 - 에디트 피아프의 인생과 사랑> 이런 식으로 붙어 있는 공연을 제작했더군요. 출연자도 우리는 가수 윤복희, 그쪽은 고시지 후부키(越路吹雪)라는 유명한 대중가수였습니다. 그러니까 의도나 방식이 아주 비슷했죠.”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초연은 어떻게 올려졌나

뭐니 뭐니 해도 현대극장의 브랜드는 뮤지컬이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를 논쟁으로 이끈 진원지이기도 하고 현대극장 레퍼토리의 중심을 이루는 장르다. 현대극장이 뮤지컬을 전면에 내세울 때만 해도 뮤지컬은 이단 취급을 받는 때였다.

“<빠담 빠담>도 음악극적인 접근이었는데, 우리가 음악극으로 간 이유는 어떻게 관객들과 폭넓게 접촉할 것이냐 할 때 음악적 요소와 무용적 요소가 관객들을 끌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 두 번째는 그걸 통해서 극단의 살림을 향상시켜야겠다였습니다. 그래서 대담하게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올렸습니다. 정말 노심초사하면서 공연을 올렸는데, 첫 번째로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8일간 공연했을 때는 빚이 조금 남았고, 나중에 재공연할 때는 청소년극장과 연계해서 청소년들을 동원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손해는 안 봤습니다. 아마 지금까지 합하면 한 200만 명에 육박하는 정도일 겁니다.

그 시대에는 뮤지컬을 연극으로 보지 않는 시각이 있었죠. 이해랑 씨나 차범석 씨도 그랬습니다. 요새는 그런 구분을 안 하잖아요. 연극으로 보죠.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내 경우 상당히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작품을 가지고 왔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처럼 완전 재미만 보는 엔터테인먼트 뮤지컬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었던 거죠. 사람들은 내가 뮤지컬을 많이 했네 어쩌네 하면서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보는데, 극단을 유지한다는 것이 중요하고, 앞서 얘기한 대로 극단이 하나의 부족(部族)으로서 존재한다고 했을 때 그 부족이 가져야 하는 양식이라든가 목표, 감각 등 끊임없이 여러 요소의 인간들이 모여서 하나의 트랙을 찾아가야 연극이 성립되죠. 그냥 웨스트엔드나 브로드웨이처럼 이거 해서 돈을 벌겠다는 것, 거기에 1차적 목표가 있으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난 지금도 당분간 연극이 극단 중심으로 해야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겁니다. 지원사업도 정책적이고 철학적인 백그라운드를 정리하고 그러한 배경 위에서 펼쳐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관객도 끌어들이고 극단 살림도 하려면, 아무래도 <웨스트사이드스토리>나 브로드웨이류의 안정적인 공연을 할 거 같은데,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나 <빠담 빠담 빠담> 같은 프로그램은 좀 불안해 보인다. 이미 검증된 브로드웨이 작품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을까?

“브로드웨이에서 온 검증받은, 안정적인 공연보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나 <빠담 빠담 빠담>을 선택한 것은 당시 우리들의 현실 때문이었을 겁니다. 소위 라이선스에 대한 개념도 몰랐고. 어디에 가서 구하겠습니까.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는 옛날에 뉴욕에서 팔았던 『Selections of Superstar』라는 보컬 스코어가 있었습니다. 그걸 구했어도 오케스트레이션은 돈 안주면 못 구하니까, 그래서 어떻게 모험을 한 줄 아세요? 지금 정성조 서울예대 교수한테 보컬 악보하고 카세트를 주고 전부 채보를 하게 했습니다. 당시 정성조 악단은 11~13인조의 관악기 위주의 악단으로 로얄호텔에서 공연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공연을 할 때는 관악기만 가지고 반주했었죠. 관악기의 짱짱한 소리가 나니까 배우 가사가 안 들렸을 정도였어요. 그리고 사운드 시스템이 없어서 무대에 마이크 몇 개 매달고 배우가 그 앞에 가서 노래를 하니 전달이 더 안 되었죠. 음악은 꽝꽝 울리는데 배우의 노랫소리가 안 들리는 거예요.

라이브를 하면 돈이 많이 드니까 서울 공연 끝나고 마침 대구에 초청을 받아서 갈 때 녹음을 했습니다. 녹음을 하니까 가사 전달 방법이 나오는 거죠. 솔로는 공연 때 부르고, 합창은 녹음했습니다. 10일 공연하고 나서 녹음하니까 녹음이 하루 만에 끝났요. 공연 전에 녹음했으면 아마도 3일은 걸렸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대기술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1979년도 <피터팬>을 공연할 때인데, 피터팬이 날아야 하잖아요? 철공소에 있는 친구와 얘기를 해서 배우를 매다는 것까지는 생각했는데 좌우로만 움직이는 겁니다. 그나마 그 사람이 설계한 것도 실행을 못한 이유는, 카운터 웨이트를 만들어 밸런스를 맞춰야 사람이 쉽게 올라갈 수 있는데, 그러려면 세종문화회관 바닥에 볼트를 박아야 하니 할 수가 없었죠. 그때는 밤에 주로 무대 작업을 했는데 우리 나름의 비행장치를 설치하고 몸이 제일 가벼운 이영주를 매달았는데도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일본 국립극장에서 보고 온 구식방법으로 첫째, 바턴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상하운동 기능에다, 그 바턴에 롤러를 달아서 좌우와 상하운동을 시도하는 것이죠. 당연히 무대 앞 관객 머리 위를 나는 전후운동은 불가능했어요. 여하튼 도르래를 써서 한쪽에서는 바턴을 올리고 내리고 한쪽에서는 줄을 잡아당기고 해서 무대에서 윤복희가 날았죠. 리허설도 없이. 부랴부랴 철공소에서 만들어 온 걸로. 몇 년 뒤에는 라스베가스의 Peter Foy사(社)에 정식으로 초청을 했습니다. 그들은 앞쪽으로 나르는 게 백미였습니다. 처음 할 때는 잘 안되었는데 한번 보니깐 금방 알겠더군요. 그래서 그런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당히 연구 많이 했습니다. 우리 식구인 표재순이나 유경환 모두 기술적인 무대를 즐겨 만들었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성과로 무대가 재미있어지니까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라이선스 관련 클레임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1994년에 처음으로 돈을 내고 공연을 했죠. 돈은 좀 들었지만 그때부터 뮤지컬이 본격화 된 셈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 비하면 <에비타>는 그렇게 폭발적이지 않더군요. <에비타>도 초기에는 라이선스를 안 했는데, 영국의 라이선스 회사인 매킨토시 사무실에서 편지가 왔어요. 하지 말라고. 그래서 내 딴에는 비장하게 편지를 썼습니다. ‘너희는 로열티가 일상화 되어 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그렇지 않고, 협회 가입한 것도 최근 일이다. 너희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 달라’고. 그 다음부터는 그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었습니다.”

“음악극이 좀 더 외연이 있는 말이다”

어느새 그는 ‘음악극’이라는 말을 쓴다. 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에는 뮤지컬이라는 말 대신 음악극이 사용된다. 이 축제는 차별적인 포지셔닝 덕을 톡톡히 본 케이스로 평이 나있다.

“음악극과 뮤지컬은 넓게는 같은 뜻이지요. ITI(국제극예술협회, International Theater Institute)의 회의에서는 주로 ‘Music Theatre’라는 표현을 쓰지요. 그게 좀 더 외연이 있는 표현이라 하겠지요.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대부분 창작뮤지컬은 엄밀히 개념에서 조금 다릅니다. 뮤지컬은 기본적으로 ‘뮤지컬 코미디’의 약자입니다. 미국에서는 코미디가 아닌 것을 ‘뮤지컬 플레이’라고 합니다. 장르상 코미디가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엄밀히 따지려면 뮤지컬 코미디나 뮤지컬 플레이라 표현해야죠. 미국은 뮤지컬 코미디가 대부분이니까 뮤지컬로 쓰는 겁니다.

ITI에는 음악극 분과(Music Theatre Committee)가 있습니다. ITI의 뮤직 씨어터 개념에서 따와서 음악극이라 했고, 그래서 의정부에서도 뮤지컬축제가 아니라 음악극축제로 하자고 했죠. 의정부에서 어느 날 찾아 와서 묻기에 ‘음악극 축제’를 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초대 의정부음악극축제 예술감독이었죠. 2년 하고 스스로 그만두었습니다.”




제3세계연극제, 최초의 국제공연예술제

1960년대에 연극공부를 미국에서 한 덕일까. 그는 일찍 세계에 눈뜬 연극인이다. 엄혹한 군사정권 아래에서 비수교국이 대거 참여하는 ‘제3세계연극제’를 유치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크고 작은 국제교류 사업을 주도했다.

“굳이 공헌이라 말할 건 아니지만, 1981년에 처음으로 ‘제3세계연극제’를 유치했는데, 그게 우리나라 국제공연예술제의 효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1958년에 ITI에 가입신청을 해서, 1959년 헬싱키 총회에서 공식가입이 됐습니다, 이 제3세계연극제를 하면서 한국ITI가 국제적으로 발돋움을 할 수 있었죠. 연극제 직후에 마드리드에서 ITI 총회가 있었는데 그 총회에서 우리나라가 이사국으로 처음 피선이 됐고, 지금까지도 계속 이사국으로 있습니다.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정도를 제외하고는 한두 번 걸렀지 연속으로 이사국이 되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영국, 이집트, 중국하고 3차 투표까지 가서 1표차로 우리가 되었죠.”

그의 주도로 창설된 베세토연극제(BeSeTo연극제, 이하 베세토)는 그의 대표작이다.

“우리가 한국에 있을 때는 중국, 일본, 한국 다 구분이 되지만, 예를 들어 미국에서 본다면 유럽과 아시아의 문제로 구분됩니다. 하와이에 이승만 박사가 다니던 릴리하(Liliha)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의 문이 엄밀히 말하면 중국식 문이었는데 서양 사람들이 보면 아시아적인 것이라고 봅니다. 내가 하와이 갔을 때 그 릴리하 교회 문을 보고 상당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최근 근세사에서 우리와 일본과 중국의 아름답지 못한 역사에서 제일 희생당한 게 한국입니다. 그런데 연극으로 보면 일본과 중국은 우리나라보다 몇 백 년 앞선 극장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것입니다. 이미 우리들의 역사인 이상 우리가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1994년에 베세토를 만든 이유는, 한국의 연극이 중국과 일본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에서 살아날 길이 뭐냐, 전통극이 아니라 현대연극이다, 라는 판단입니다. 한국의 현대연극은 때때로 중국과 일본의 현대연극과 맞서도 꿀리지 않는다, 이거죠. 그것이 내가 베세토를 하게 된 속마음입니다. 전통극으로 하면 우리가 뒤져요. 요새 젊은이들이 만든 현대연극으로 겨루면 중국과 일본 연극에 빠지지 않지요. 예를 들어 리얼리즘 연극은, 북경인민예술극원 같은 경우는 철저히 훈련받았습니다. 전에 러시아에서 리얼리즘 연극을 배우고 온 사람들이 있어서 철저히 리얼리즘을 배우고 그게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연극이 때때로 백미가 있기 때문에 겨뤄도 꿀릴 것이 없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중국, 일본의 연극과 우리 연극이 어떤 것이 같고 어떤 것이 다른지를 깨닫는 것이 실은 한국을 발견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비교함으로써 장단점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죠.

중국에 같이 하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해 봄에 그분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새 파트너를 찾았는데 잘 찾았죠. 그 당시 중국희극가협회 부주석이고 북경중앙희극학원 원장이 서효종(徐曉鐘)이라는 사람인데 28년생이고 모스크바에서 6년이나 유학한 연출자라 상당히 파워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중국희극학원이란 곳이 연출과 배우들을 키워내는 학교니까 제자들이 전국적으로 퍼져있고. 중국 내에서의 그분의 신망은 대단합니다.

일본은 ITI가 약해요. 일본 ITI와 베세토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우리처럼 짜임새가 있는 단체가 아닙니다. 그들보다 현업에 있는 사람들이 더 조직력으로 하죠. 그래서 일본 ITI랑 협동하는 것을 포기하고 스즈키 씨를 만나서 취지를 말했는데, 스즈키 씨는 즉석에서 찬성을 해주더군요. 중국에 가서 새 파트너 얻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중국 경제가 지금만 못했습니다. 우리나라 예총 같은 문련(文聯)의 간부가 거의 마오쩌둥 해방운동에 관여했던 사람들이니까 사회적 발언권도 셌죠. 결국 서효종 선생을 만났습니다. 문련 건물 맨 꼭대기에 식당이 있는데 그곳에서 만나 저녁을 하면서, 내가 연설을 했습니다. ‘우리 근세사를 봐라.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있었던 우리나라의 비극은 곧 동양의 비극 아닌가. 이런 관계 속에서 과거에 우리가 당한 침략은 우리나라가 약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은 틀림없지만, 그러나 연극인으로서 우리들은 그러한 역사를 단순한 역사로 바라보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연극을 통해서 상대를 진실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찾아야할 것이다’. 서효종 씨는 내 이야기를 듣자마자 심각한 표정으로 일어나더니, ‘지금까지 미적거린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한다. 미안하다. 우리도 하겠다. 첫 단체는 중국 최고의 단체인 중국 북경인민예술극원을 보내겠다’ 하더군요.

그리고 1994년 첫 행사를 예술의전당에서 했습니다. 중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연극 <천하제일루>도 공연했고, 스즈키 다다시도 런던공연을 마치고 곧바로 한국으로 들어와서 공연을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미추하고 목화, 두 극단이 했습니다. 그리고 국수호의 무용 프로그램을 더했죠. 우리나라는 연극 쪽과 무용 쪽이 상당히 친한데, 중국과 일본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한 번도 베세토에 무용공연을 가져온 적이 없습니다. 중국에서는 우리에게 꼭 무용단을 데려와야 하냐고 그럴 정도였죠. 그런 면에서 우리는 상당히 개방적이죠.

거창하게 시작을 한 건 다 타이밍 덕이었습니다. 그 때 일 년 후배가 서울시 부시장 김의재(金義在) 씨였는데, 동창회에서 만났죠.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말을 꺼냈습니다. ‘내년이 서울정도(定都) 600주년 되는 해인데, 삼국이 모여서 행사를 하고 싶다. 길이 없을까’ 그는 이 행사의 뜻을 바로 이해하더군요. 그의 노력으로 예산을 만들 수 있었지요. 거기에 우리 동기, 연극을 좋아하는 한완상 씨에게 대회장을 부탁했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현대그룹을 스폰서로 끌어들였어요. 그래서 잘 진행되었죠.

서울정도 600주년인데 세도시를 어떻게 연결할까? 북경 서울 도쿄인데, 베세토, 세베토, 토세베 등 다 따져봤는데 베세토가 제일 나았습니다. 거기에 알파벳 순으로도 베이징 서울 도쿄인 거야. 그래서 베세토가 이뤄졌는데 역시 상당히 운이 좋았죠.

1986년 2월부터 1989년 2월까지 연극협회 이사장을 했습니다, 3년 임기로. 그리고 1997년, 내가 한국 ITI 회장을 맡고 있을 때, ITI 세계총회를 유치해서 전세계가 주목하는 행사를 가졌죠. ‘ITI세계총회 및 세계연극제’. 그때가 내 활동의 피크였죠. 그리고 2000년 베세토연극제에서 <춘향전>을 일본, 중국, 한국이 공동으로 만들어서 상당히 의미 있는 작업을 했는데, 지금도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록의 열정, 경영의 과학성

그는 ‘초대’자가 붙은 직책을 많이 지낸 인물이다. 국립극장 공연과장, 서울시립극단, 의정부음악극축제, 베세토연극제, 실험극장 등이 모두 그렇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기록을 중시한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기록이 쌓인다.

“기록과 관련해서도 내가 ‘초대’가 많죠. 1997년 초대 서울시립극단을 맡았을 때 내가 만든 프로그램 겸 잡지가 [시민연극]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공연 프로그램을 만들 때 배우들 사진만 크게 넣는데, 나는 공연에 대한 이해를 위해 작품의 백그라운드, 리뷰, 차기공연에 대한 정보 등을 넣어서 책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내가 공연문화산업연구소를 운영하는데, 우리 연극인들이 기록에 대한 열정이 없다는 것과 극단 경영에 대한 과학성이 없다는 거, 그리고 연극계에 할 일이 많은데 모두가 공연에만 매달려 있어서 2000년에 이 연구소를 시작했죠. 그러니까 일반 연극인이 예를 들면, 특히 지방 연극인, 오랫동안 연극에 일생을 바쳤는데 내게 남은 게 뭐 있어, 하잖아요? 역사적인 기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예를 들면 <베니스의 상인> 공연할 때 국내 박사급 논문을 총 망라했고, 한국에서 셰익스피어의 공연 목록을 쫙 뽑거나 했죠. 지금 우리가 주로 하는 일이 그런 겁니다. 그 시대의 연극을 상상하는 것으로는 연극을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우리 연극계에 꼭 필요하지만, 사람들이 바빠서 하지 않는 일들을 골라서 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습니다.”



김의경김의경

제작자 30년의 대차대조표

현대극장 출발로만 계산해도 예술경영자로서의 그의 삶은 30년이 넘었다. 그가 내리는 자체결산은 어떨까?

“뮤지컬을 많이 제작했으니 김의경이 떼돈을 벌었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제작한 공연이 크게 재미 본 것도 별로 없지만 엄청나게 깨진 것도 없습니다. 한번 제작한 공연은 횟수를 늘리니까 처음에는 손해를 보지만 최종 결과는 그렇지 않죠. 전국 안 찾아간 데가 없습니다. 근로청소년 대상으로 공단(工團)도 찾아갔고 당시 내무부와 정주영 씨 도움으로 농ㆍ어ㆍ탄광촌 방문공연 프로그램을 만들어 다녔지요. 그러니 총관객수는 엄청났죠. 언론사들을 끌어들인 것도 주효했죠. 방송국 스팟 홍보를 도입한 게 나부터인데, 큰 공연은 40, 50회 스팟을 내보냈습니다. 내가 방송 쪽에서 일한 것이 도움이 됐겠지요. 덕분에 이 극단 사무실 하나 남았습니다. 이 건물 지을 때 아는 사람이 좋은 조건으로 소개해줘서 샀는데 지금까지 지니게 되었습니다. 대신 내 집은 없습니다. 사무실도 은행 빚이 좀 있지만...”

물질적 대차대조표는 그렇지만 그는 제작자로서 길고 굵은 흔적을 남겼다. 극단과 연극제작에 경영과 마케팅의 개념을 도입하였고 공연을 통해 강해지는 수백 명의 연극인을 키웠다. 전국의 모든 연령대를 관객으로 삼은 그의 기획은 지금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보다 먼저 세계와 보조를 맞추었고 오늘날 공연예술시장을 독주하는 뮤지컬이니 음악극에는 그가 놓은 주춧돌이 건재하다. 기록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현대적 의미에서 프로페셔널한 제작자 1호로서 손색이 없다. 더욱이 그는 아직도 현장을 지킨다. 1960년대 그와 그의 동료들이 내세운 ‘전문연극’에의 꿈은 아직도 그의 가슴에 살아 있다.



김의경의 간단한 연보: 1960년 서울대 철학과 졸업 1960-72년 실험극장 대표 1964년 극작가로 데뷔 1970년 미국 브랜다이스 대학원 졸업(MFA) 1971년 서라벌 예술대학 연극영화학과장  1973년 국립극장 초대 공연과장 1976년 현대극장 창립 1982-86년 한국 아시테지 초대 이사장  1986-89년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1995-2000년 한국ITI회장 1977-2000년 서울시립극단 초대 예술감독 2001년 공연문화산업연구소 창립, 이사장.


1) 1956년 5월 12일에는 한국최초의 TV방송인 HLKZ-TV가 개국되어 첫 전파를 발사했다. 처음에는 미국의 전자제품 회사인 RCA에 의해 운영되는 KORCAD라는 소규모 방송국이었는데 적자운영으로 1957년 5월 한국일보사주에게 운영권이 넘어가고 방송국 명칭도 대한방송주식회사(DBC-TV)로 바뀌었다.

이승엽 필자소개
이승엽은 1987년부터 예술의전당에서 극장운영과 공연제작 일을 하다가 2001년 한국예술종합학교로 자리를 옮겨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하이서울페스티벌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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