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www.p-jones.demon.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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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신발장수가 아펠레스(Apelles)의 그림을 보고는 신발을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면서 그림 전체를 비판하려고 하자, 아펠레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이, 구두 이상은 올려다보지 말라고!”

오늘날 세상의 모든 문젯거리는 자기가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때문에 생긴다. 하지만 이 글에서 그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신발장수처럼 몇 가지 요소로 전체를 해석하는 논리(환원)의 오류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데 더 어려운 것은 그런 오류를 피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일이다. 달리 보면 아펠레스의 말도 좀 과하다. 신발장수라고 신발만 볼 수 있겠는가? 그럼 모자장수는 머리만 보고 안경장수는 눈만 보란 소린가! 아펠레스의 말을 한편의 신화, 혹은 예술가의 유쾌하면서도 뛰어난 유머감각으로 봐야지, 오늘날의 시민사회처럼 지향하는 어떤 지위나 직업이든 자신의 가치기준을 갖고 비평하는 것에 열려있는 사회에서는 독선적인 태도로 비난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 시대 노예제를 생각해보면 아펠레스는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대안공간이 언론매체의 미술 관련기사의 첫머리를 장식할 때였다. 신문사 기자들이 여러 부서를 순환제로 돌다보니 문화부를 처음 맡게 된 기자의 첫 취재대상에 대안공간이 오르내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의례적인 질문을 반복하곤 했는데, 대표적인 첫 질문 중 하나는 “대안공간은 시민이나 대중들을 위해 어떤 기획을 하고 있습니까?”였다. 처음엔 친절하고 장황하게 대답했지만,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받다보니 대답이 곱게나오지 않았다. “저희 갤러리(대안공간)는 일반대중을 위한 기획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반대중을 위한 기획은 국공립미술관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소린가? 시민을 위해 기획을 하지 않다니!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미술관이나 갤러리의 역할과 너무 동떨어진 답변에 기자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생각해보면 대안공간들은 일반대중을 위한 보편적인 프로그램을 목표로 운영하지 않는 것이 맞다. 주위의 대안공간들은 전문적인 작가들, 평론가들, 기자들, 예술전공자들, 전문적인 활동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미술애호가들을 대상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거기서 조금씩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역할과 기능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대안공간이 그렇다고 말할 수도, 또 그래야 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많은 공간들이 공공기금을 기반으로 운영되기도 하고 또 시민, 주민, 청소년, 아동, 이주민 등과 함께하는 공공미술을 목표로 하는 공간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활동을 하는 공간들의 목표도 무차별적인 일반대중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아니, 할 수가 없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예산이 안 되고 조직과 운영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대안공간들은 매우 구체적이고 제한된 대상을 목표로 기획되고 운영된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대안공간들은 여타 미술관들과 기획이나 프로그램의 구체적인 운영방식과 성격이 다르기도 하다. 국내전시보다 국제전시를 높이 평가하는 예술계 또는 예술경영계나 행정계의 분위기를 생각해보자. 대안공간과 국공립미술관, 사립미술관, 상업갤러리, 비엔날레 등이 모두 국제교류전을 기획한다. 그러나 형태는 유사할지 몰라도 그 실제 내용은 판이하게 다르다. 예산의 규모나 운영방식의 차이도 천차만별일 뿐 아니라 주제와 참여작가, 작품의 맥락도 제각각이다. 따라서 국제전시나 국내전시와 같은 전시유형을 통해 단순비교하고 평가하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고, 또한 쉽게 정량적·관행적 통계나 평가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 현장전문가들은 전시를 감상하고 비평할 때 그런 형식적인 평가와 그로 인한 오류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시의 기획배경이나 구조를 따지게 되는 것이다. 주위에서 빈번하게 기획되는 국제교류행사나 전시 중 해외에서 이미 기획되고 완성된 작품이나 프로그램을 수입해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결국 그런 기획은 대부분 예산문제로 귀결되기 마련이고, 비평적으로는 창작의 문제보다는 미적 교육이거나 복지, 홍보마케팅의 문제에 논점이 모이게 된다.

그밖에 예술현장에서는 아펠레스와 신발장수의 일화처럼 개인의 경험과 인식, 욕망에 따라서 이상야릇한 상황이 벌어진다. 작품을 평가하기보다는 사람(작가)을 평가하거나 평범한 것을 비범한 것으로, 정상적인 것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철지난 것을 마치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은 일인 듯 떠벌린다. 심지어 자기의 존재감을 강조하는 도구(자기자랑)로 해석과 비평이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미적인식과 평가에서 개인은 자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과 우리는 다만 보편적인 합의와 가치를 향해 전진할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확대해보면 다원주의와 다문화사회의 예술현장에서는 다른 세계관과 예술관이 충돌하는 것이고, 오늘날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런 환경이고 현실이다. 그러기에 그에 맞는 새로운 인식과 미학, 윤리가 요구된다. 예술경영 종사자들에게 그 과정은 자신의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자리(위상)가 노출되고 또 그것을 반성하는 과정이고, 그 과정은 일회성이 아닌 매순간 되풀이된다는 점에서 자신과의 갈등이고 싸움이다. 예술경영은 험난한 분야다. 아펠레스의 권고처럼 신발 위를 보지 않는 것이 현명할 수도 있다.


김노암 필자소개
김노암은 서울에서 나고 자라 회화繪畵와 미학美學을 전공하였다. 미술현장에서 전시기획자로 활동하며 그림과 글로 시절을 보내고 있다. 현재 대안공간 아트스페이스 휴를 운영하며 미술웹진 [이스트 브릿지], KT&G 복합문화공간 상상마당의 운영과 기획에 참여하고 있다. (사)비영리전시공간협의회 대표이다.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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