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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지독히도 추운 겨울이 지나간다. 두꺼운 코트로 온몸을 돌돌 감아도 콘크리트 벽도 뚫고 들어올 듯한 냉기가, 매일 매일 매일 몰아치는 추운 겨울이었다. 비단 겨울 찬바람뿐이었던가. 이 추운 겨울의 시작과 끝에서 두 명의 젊은 예술가가 세상을 떠났다. 달빛요정만루홈런의 이진원과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이진원의 죽음을 보면서 “살아있는 때 사랑하자”했던 다짐은 또 한명의 젊은 죽음 앞에서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먹먹한 가슴이 살랑대는 봄기운 앞에서도 여전히 딱딱하다.
만약, 한편의 노래이거나 영화였다면 더 현실감 있게 다가왔을 것 같다. 현실이라니 도리어 현실이라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두 죽음이 ‘안타깝다’라고 말할 수조차 없는, 예외적인 특별한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음악을 하건 영화를 하건 어쩌면 젊은 예술가들의 삶은 이다지도 팍팍한지. 비단 젊은 예술가만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나를 죽일 수도 있는” 그 현실 앞에서, 이 먹먹함은 애도를 넘어 공포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마지막 마스터피스라도 남겨두듯이 두 젊은 예술가들은 죽음으로 여러 이야기를 남겨두었다. 과연 예술가란 무엇인지, 이 시대의 예술, 예술가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뜨거운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다. 그리고 그 논쟁들을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다. 하나하나의 주장과 견해와 쟁점을 넘어 논쟁의 용광로 자체가 두 예술가들의 마지막 작품이 아닐까. 제발 이 뜨거운 이야기들이 ‘충격적인 사건’의 여진으로 잦아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죽은 이는 말이 없지만, 산자들에게는 이들의 죽음을 해석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죽음이 결코 안타까운 예외적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비단 존재론적 이야기들만이 아니다. 음반산업의 분배구조라든가, 영화산업의 노동현실에 대해, 그리고 예술가들의 복지에 대해, 제도적 논란도 뜨겁다. 여하튼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것은 창작자를 육성하는 허약한 토대이다. 한류스타들의 산업적 가치가 휘황하고 천만관객이 터져 나오는 영화산업의 성장이 놀라울 때, 정작 창작자를 육성하는 토대는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우리 모두 알고 있는 현실을 우리 모두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았던 것이다. 너나 없이 예술의 가치에 대해서는 교양인의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것을 지키기 위한 고통에 대해서는 둔감한 것이다. 그 둔감함에 예술가, 예술계도 그닥 자유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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