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공연계에서 부쩍 강세를 보이고 있는 축제 중에 페스티벌 봄이 있다. 드물게 다원축제를 표방한 이 축제는 과감하고 참신한 기획으로 공연계 안팎으로부터 관심을 끌고 있다. 정부의 정기적인 지원이 보장된 것도 아니면서 축제를 5년째 지속하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데 프로그램이 여전히 공격적이고 새로워서 시간이 갈수록 주목도가 높아지고 있다.

<현혹의 사회적 맥락이여…> 공연장면 출처 www.siegessaeule.de

<현혹의 사회적 맥락이여…> 공연장면
출처 www.siegessaeule.de

이 축제의 금년 개막작으로 꼽은 작품이 무산되었다는 소식이다. 스캔들의 주인공은 독일 복스뷔네(volksbuehne) 극단. 연극 <현혹의 사회적 맥락이여,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로 축제를 열 예정이었다. 독일의 내노라 하는 연출가와 배우가 작업하여 ‘오늘날 국제금융위기의 기만적 실체를 직시할 필요성을 일깨울’ 것으로 보았다. 공연을 보지는 못했지만 사회나 현실에 할 말이 꽤 많은 예술가집단으로 보인다. 모르긴 몰라도 페스티벌 봄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만큼 신선한 충격을 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런데 그들은 한국에서 공연하기를 거부했다. 일본에 닥친 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후쿠시마 원전사고 때문이다. 공연팀원 중 일부가 한국도 안전하지 않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에서의 사고 이후 내한 공연이 연달아 취소되기는 했지만 이번과는 성격이 다르다. 대부분 일본과 연계한 투어 자체가 취소되어 한국 공연도 도매금으로 취소된 것이다. 그런데 복스뷔네 극단은 오직 페스티벌 봄에 참가하기 위해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공연이나 축제가 외부 요소 때문에 차질을 빚은 적이 적지 않다. 가깝게는 2008년 경제위기 때부터 보아도 지금까지 한 해도 빼지 않고 외생변수 때문에 하늘이 갰다 폈다 해왔다. 전 지구적 경제위기 여파 속에 2009년에는 신종플루가, 2010년에는 천안함 사태와 구제역 사태가 있었다. 나부터도 하이서울페스티벌 예술감독을 맡고 치른 첫 축제인 ‘하이서울페스티벌 2010’이 예정보다 반년 가까이 미뤄졌다. 외생변수에 축제는 특히 취약하다. 예고 없는 변고에 취소나 축소, 연기를 겪으며 누더기가 되기 일쑤다. 이유 하나하나를 따져보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벌써 가깝게는 4-5년 연속해서 많은 축제가 파행을 겪는 것도 정상은 아니다. 이 정도 되면 예정대로 진행하는 것만으로도 장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다. 축제 프로그램은 되도록 마지막 순간에 결정하고 신속하게 실행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웃지 못할 지혜도 생긴다. 경험을 통한 학습에 비추어 보면 미리 준비하는 것이 독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축제든 공연장이든 성공의 공통된 공식인 ‘지속성’과 ‘차별적 포지셔닝’이 실제로 실행하기 매우 어려운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그러지 않아도 공공지원을 받는 축제는 예산이 확정되어야 비로소 실행에 옮길 수 있기 때문에 미리 준비하는 것도 한계가 있던 참이다.

참고사진 출처 뉴시스

참고사진 출처 뉴시스

다른 종류의 축제도 그렇지만 예술축제마저 이런 파동에서 쉽게 흔들려온 것은 이 사회에서 예술이 맡은 구실이 과연 무엇인가 다시 생각하게 한다. 당연히 예술은 단순한 즐거운 여흥에 머물지 않는다. 사회의 쓰지 않는 근육을 건드리고 때로는 사회의 혁신과 창의를 자극한다. 정신적으로 깊은 위안을 주고 유대를 강화해준다. 그런 것이 예술이라고 한다면 어려울 때일수록 더 대중과 적극적으로 만나야할 것이다. 한국이 원전사고가 난 나라는 아니지만 방사능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현지 보도를 믿고 공연 직전에 축제 개막공연을 무산시킨 예술가들의 태도가 아쉬운 것도 그 때문이다. 예술가의 안전이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예술가들이 그렇게 맥없이 공연을 포기하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하고 기다린 관객이 있기 때문이다. 재앙을 극복하는 데 예술가들도 여러 방식으로 힘을 보태고 있다는 소식이 국내외에서 들린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진지하게 묻고 고민하는 움직임도 포착된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사실은 복스뷔네 극단 외에도 마지막까지 한국에 오기를 망설인 팀이 더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참 난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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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 필자소개
이승엽은 1987년부터 예술의전당에서 극장운영과 공연제작 일을 하다가 2001년 한국예술종합학교로 자리를 옮겨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의 예술감독을 역임했으며 현재 하이서울페스티벌 예술감독을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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