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진출 사업에 대한 지원의 양상이 달라졌다. 항공료만 달랑 주거나 현지 신문 · 방송의 반응을 챙기는 데만 주력했던 과거와는 판이하다. 해외진출지원작을 일단 공모만 해주고 그 선정은 산티아고 아 밀 쪽에서 전적으로 맡게 함으로써 국내 공연계에서는 묻혔던 소장 예술단체들이 부각되기도 했다. 주류 국악계에서는 활동상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해외에서는 전폭적인 공연 투자를 해온 들소리가 그런 사례다.


이제 한국 공연예술인들은 냉정한 프로페셔널로 조금씩 변신해가고 있었다. 과거처럼 국제무대에 섰다는 사실 자체에 마냥 흥분하지도, 갑작스러운 공연 환경 변화에 쩔쩔매지도 않았다. 숙지된 매뉴얼로 거듭되는 공연을 가다듬고, 공연 뒤엔 실익을 따졌다. 그들이 염두에 두고 저울질 한 건 지속가능성과 시장성이었다.

지난 1월 10일 밤 남미의 길쭉한 나라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외곽. 도시를 싸안은 안데스 산맥 기슭의 라카스트리나 공원 야외극장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보름달 휘영청 뜬 안데스의 밤하늘 아래서 한국 창작 국악 단체 &lsquo;들소리&rsquo;가 차린 연주 무대 <비나리>의 흥겨운 전통 소리판이 청중의 환호 속에 펼쳐졌다. 단원 6명이 신나게 쳐대는 꽹과리와 북, 장구 등의 풍물 연주에 2천 명 넘는 산티아고 주민들이 기립해 손을 흔들며 흥을 넣어주는 격정적 순간들.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로 재빠르게 돌아가는 전통 타악의 신명에 &ldquo;워~워&rdquo; &ldquo;브라보&rdquo; 등의 함성으로 화답하는 청중들. 상쇠가 날뛰며 꽹과리를 두들기고 장고잽이와 북잽이가 거들며 합주가 절정에 이르자 그들도 전율했다.

보름달 휘영청 뜬 안데스의 밤하늘 아래서 한국 창작 국악 단체 '들소리'가 차린 연주 무대 <비나리>의 흥겨운 전통 소리판이 청중의 환호 속에 펼쳐졌다.그 열광의 무대를 마주보는 관객석 상단에서는 문갑현 대표와 최정원 기술 감독 등의 연출진이 먹히지 않는 음향 시설과 필사의 씨름을 하고 있었다. 계속 소리가 웅얼거리고, 조명도 뜻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급기야 공연 막바지 음향 연출을 포기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여느 실내공연 같으면 벌써 웅성거리고, 야유가 터졌을 상황. 하지만 무대의 열기는 죽지 않았다. 눈치를 챈 단원들이 상모놀음과 더욱 기세 좋게 풍물을 난타하면서 열기를 이어나갔다. 몇 차례의 앙코르 연주와 환호성 속에 공연이 끝나고 단원들이 인사하자, 연출진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극장 부근이 산티아고의 손꼽히는 우범지대라는 사실도, 잡음 때문에 음향연출을 포기하는 비상 상황도 열기를 가로막지는 못했다.



낯선 환경, 공연언어만으로 교감하다

남미권 공연축제로는 유례없이 한국 공연단체 세 곳이 대거 참여한 산티아고 아 밀 페스티벌(1월3~25일)은 의미심장한 시사점을 남긴 행사로 비쳤다. 우리 연희 예술이 프로 근성과 체계적인 공연 연출 시스템, 현대적 감성이 뒷받침된다면, 외국 무대 어디에서도 경쟁력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주었다. 배우나 연출진들에게도 낯선 공연 환경에서의 임기응변과 적응력, 외국 관객들과 오직 공연 언어만으로 교감할 수 있는 자신감을 배양하는 모판이 되었다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참가작인 들소리의 <비나리>를 비롯해 극단 서울공장의 색다른 소리극 <두 메데아>, 밀물현대무용단의 현대춤 <아이즈>에 칠레 관객들은 예상 이상으로 열렬히 반응했다. 정작 국내 공연단체 관계자들은 차분히 공연 완성도에 집중하면서, 자신들의 역량과 가능성을 이리저리 비추고 뜯어보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재단법인 예술경영지원센터가 국내 공연단체의 중남미진출을 위한 첫 지원사업으로 이 페스티벌을 택한 건 그래서 의미 있는 발걸음이 있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9일 저녁 산티아고 도심의 가톨릭 대학 구내에서 열린 극단 서울공장의 <두 메데아> 공연은 들소리의 무대와는 또다른 감성의 교감을 느낄 수 있었다. 원작은 순정을 바쳤지만, 자신을 배신한 남편에 복수하기 위해 남편의 정부와 아들을 죽인 여인 메데아의 광란을 다룬 그리스 비극, 여기에 지난날 우리네 일상에서 흔히 들었던 전통 동요, 판소리, 아기의 목소리 등을 강조한 구음과 몸짓으로 색다르게 변주됐다.

대사의 메시지보다 소리 자체의 원초적 전달력에 초점을 맞춘 극단 대표 임형택씨의 연출 의도는 현실의 서사적 대사와 몸짓에 익숙한 칠레 관객들에게 참신한 자극을 준 모양이다. 특유의 소리와 한국적 정한을 스페인 원어로 전달하는 자막 번역과 전환이 원활한 편은 아니었는데도, 극이 끝나자 기립 박수가 터져 연출자와 배우들은 오히려 의아해하기도 했다. 국내 대학로 관객들의 신중한 반응과는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임 연출자는 &ldquo;극 분위기가 진중하고 묵직해 국내 관객들은 박수도 절제하는 분위기였는데, 칠레 관객들은 극의 이미지와 소리에 훨씬 더 민감하더라&rdquo;고 털어놓았다. &ldquo;대사를 전통의 소리 정서로 재해석한 측면이 오히려 현지 관객과의 원초적 소통을 활성화시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rdquo;는 말이었다.

9일 저녁 산티아고 도심의 가톨릭 대학 구내에서 열린 극단 서울공장의 <두 메데아> 공연은 들소리의 무대와는 또다른 감성의 교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사진: <두 메데아> 관객과의 대화]


서구 비서구 다양한 공연 언어 소개,
&ldquo;새로운 무대언어를 원한다&rdquo;

산티아고 아 밀 페스티벌은 원래 소장 예술가들의 실험적 축제로 기획됐다. 94년 산티아고 기차역에서 다섯 편의 전위 실험극을 공연하면서 시작되어 2001년부터 칠레 정부의 지원을 받는 국제적인 페스티벌로 덩치를 키웠다. 파블로 네루다 같은 대시인과 빅토르 하라라는 연출가 출신 민중 가수를 배출한 칠레는 문학과 공연 분야에서 돋보이는 성취를 일궈온 나라다. 8개 나라에서 50여 개 무대가 올려진 올해는 단순한 서사성을 벗어나 다양한 경로로 서구와 비서구 지역의 다양한 공연 언어를 소개하려는 시도들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특히 한국의 세 작품과 중국의 전통 오페라 무대가 &lsquo;밀레니엄 아시아&rsquo;란 이름으로 무대에 올라 이례적으로 아시아권 공연예술에 대한 집중 조명이 이뤄진 것도 특색이다. &ldquo;이제 우리는 새로운 무대 언어를 원한다.&rdquo;고 예술감독 카르멘 로메로가 밝힌 것처럼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한국의 공연무대와 현실 비판적 맥락에 초현실적 구성이 얽힌 남미의 실험 연극들이 어울렸다. 여기에 벨기에의 퍼포먼스 거장 얀 파브르처럼 일상 행위의 도식에 파열구를 내는 도발적 상상력으로 무장한 유럽 예술가들의 전위 공연들이 흥미로운 대비를 이루었다.

축제 자체의 진행은 그닥 매끄러운 편은 아니었다. 남미인 특유의 느릿한 시간관념과 소통의 문제 등이 겹쳐 국내 공연단의 무대 준비과정은 상당부분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들소리의 경우 3차례 공연 장소가 모두 다른데다, 무대를 세팅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 음향과 조명 조율 과정에서 스태프들이 홍역을 앓았다. 연출 컨셉을 놓고 주최 쪽 스태프들과 사전 소통이 잘 되지 않았던 밀물무용단도 무대 준비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곡절과는 별개로 산티아고 아 밀 축제는 수교기념 행사 등의 정치적 홍보 수단에 그쳤던 공연단체 해외 진출사업의 변화상을 실감하게 했다. 예술경영지원센터 쪽 스태프들은 행사 작품 선정과 진행에 관료적으로 간섭하지 않고 공연단체들과 해외 기획자를 잇는 &lsquo;비즈니스&rsquo; 측면의 지원에 주력했다. 12일 산티아고 시내 레스토랑에서 예술경영지원센터 주최로 열린 중남미 공연예술 기획자들과 한국 공연예술단체의 네트워킹 행사엔 중남미 프리젠터 프로머터 연합회(La Red) 회장과 에딘버러 페스티벌의 국제 디렉터 등 40명 넘는 유럽, 남미 기획자들이 몰렸다.

12일 산티아고 시내 레스토랑에서 예술경영지원센터 주최로 열린 중남미 공연예술 기획자들과 한국 공연예술단체의 네트워킹 행사엔 중남미 프리젠터 프로머터 연합회(La Red) 회장과 에딘버러 페스티벌의 국제 디렉터 등 40명 넘는 유럽, 남미 기획자들이 몰렸다.



국가 홍보에서 비즈니스로 지원 전환,
해외 시장에서 소장 단체 부각되기도

다음날부터 곧장 이어진 이들 기획자들의 프로젝트 면담 요청으로 예술경영지원센터 실무자들은 현장 공연을 볼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빴다. 항공료만 달랑 주거나 현지 신문․방송의 반응을 챙기는 데만 주력했던 과거 당국의 문화 지원사업 행태와는 판이하다. 해외 진출 지원작을 일단 공모만 해주고 그 선정은 산티아고 아 밀 쪽에서 전적으로 맡게 함으로써 국내 공연계에서는 묻혔던 소장 예술단체들이 부각되기도 했다. 주류 국악계에서는 활동상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해외에서는 전폭적인 공연 투자를 해온 들소리가 그런 사례다.

서울공장의 임형택 대표나 들소리의 문갑현 대표 등 참여한 국내 공연단체 관계자들은 비교적 차분한 기색이었다. 이미 수년 전부터 매년 십 여 차례 해외투어를 통해 철저히 이해관계에 따라 탐색하고 접근하는 국제 예술시장의 냉혹한 분위기를 익혀온 까닭이다. 문 대표는 &ldquo;이제는 관객 반응 못지않게 자체적인 공연 평가기준에 따라 흥행성 여부를 점검한다&rdquo;고 했다.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우연 국제교류팀장은 &ldquo;국제 예술축제는 세계 각지의 공연기획자들이 찾아와 자국의 예술행사 정보를 교환하고, 초청, 수출 의사를 타진, 조율하는 문화 플랫폼의 의미도 적지 않다&rdquo;면서 &ldquo;한국 공연단체 관계자들과 해외 기획자, 공연기관과의 네트워킹 통로를 만드는데 주로 공을 들였다&rdquo;고 말했다. 실제로 이번 페스티벌의 한국 공연단 참가도 지난 2007년 의정부음악극축제에 칠레 극단의 작품이 초청되어 호평을 받은 것을 계기로, 세미나나 다른 외국 공연축제 자리에서 산티아고 아 밀 페스티벌 관계자와의 인터뷰와 협의 등이 꾸준히 진행되면서 신뢰를 축적시켜 만들어낸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ldquo;국내 공연예술계의 창작 트렌드가 북미, 유럽 취향 중심으로 편중된 현실을 고려할 때, 남미쪽 공연예술계와의 교류 확대는 건전한 다문화적 상상력의 터전을 확보한다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rdquo;는 게 우팀장의 전언이었다.



&ldquo;다양한 문화권과의 교류, 다문화적 상상력의 터전&rdquo;

이틀 동안 시행착오를 거친 들소리 공연단은 지난 11일 저녁 산티아고의 번화가 아포퀸토 거리에서 비로소 맘 편하게 &lsquo;비나리&rsquo;를 펼쳤다. 이번에는 무대 조명과 음향, 그리고 공연의 삼박자가 착착 맞았다. 공연 멤버들이 웃통까지 벗어젖히며 펼치는 풍물 놀음에 5천 명 이상 가득 광장을 메운 청중들은 파도치듯 함성과 손짓을 따라 했다. 공연 삼일 동안 따라다닌 일부 마니아들은 아예 태극기 그려진 피켓을 흔들면서 &lsquo;꼬레아&rsquo;를 구호처럼 외쳐댄다. 월드컵 거리응원 같은 격동적인 현장 상황에 소리꾼들도 제대로 신이 났다. 관객들은 공연 뒤에도 30분 이상 앙코르 연호를 거듭했다. 조명과 음향 문제로 애태우던 문갑현 대표도 &ldquo;창피한 공연을 안 해서 다행&rdquo;이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휘모리 풍물 장단 속에 깊어가는 산티아고의 밤. 프로 감각을 익혀가는 우리 공연예술의 숙성을 조금씩 맛보았던 밤이었다.


노형석 필자 소개
노형석 편집위원은 홍익대 대학원(미술사)를 수료했고, 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 시사주간지 한겨레21 문화팀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한겨레신문 문화부 대중문화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예술경영 NO.13_2009.1.22], 정보공유라이선스 2.0

  • 페이스북 바로가기
  • 트위터 바로가기
  • URL 복사하기
정보공유라이센스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