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순서: ② 체류


트래블(Travel)과 스테이(Stay)는 언뜻 보면 서로 정반대편에 있는 단어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 두 단어는 유사어에 가깝다. 여행에 필수적으로 따라붙는 말이 체류, 즉 스테이다. 해외여행을 떠나면 입국서류가 묻는다. 얼마동안 체류할 거죠? 보름간 여행할 거라고 대답하기도 하지만, 보름간 체류할 거라고도 대답한다. 어떻게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여행하는 자와 체류하는 자로 나뉜다. 그리고 이 구분은 직업이나 생활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다. 가령 논밭을 가는 농부라 할지라도 자신을 ‘지구라는 우주선을 타고 은하수를 여행하는 여행자’라고 여길 수 있으니까.

하이퍼 노마드의 샛길


엄밀하게 말하자면, 인류는 지구별에서 장기체류하는, 여행자들이다. 물론 첫 입국서류였던 ‘출생신고서’가 그랬듯 아무도 체류기간을 묻지는 않는다. 질문을 던져야 하는 이가 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신(神) 말이다. 신은 ‘도착’(Arrival) 도장만 찍고, 그 후 여행자들이 무슨 짓을 하든 관여하지 않는 출입국사무관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훗날 ‘출발’(Departure) 도장만 찍어주면 자신의 업무는 끝이라고 여기는.

우리는 지구별에서 체류한다. 그리고 또 체류한다. 대한민국에서, 스페인에서, 인도에서, 페루에서…. 체류자는 기간에 따라 다시 단기체류자, 장기체류자로 나뉜다. 대부분의 여행이란 한 도시나 한 나라에서 ‘단기체류 후 이동’이라는 과정을 밟는다. 그래서 단기체류에 관한 가이드북은 온오프라인 서점 여행코너에 넘쳐난다. 그러나 장기체류하는 기술에 대한 안내서는 드물다.

한동안 나는 한국의 샛길을 떠돌았다. 유명관광지나 명승지가 아니더라도 이 땅엔 숨어있는 절경으로 가득했다. 문득 내가 다녀온 이국에도 여행가이드북이 알려주지 않는 절경들이 곳곳에 숨어있으리란 지점에 생각이 닿았다. 한 나라나 한 도시를 잠시 구경하고 옮겨 다니는 ‘단기체류 후 이동’이 아니라, 한 나라나 한 대륙을 꼼꼼히 둘러보는 ‘장기체류 후 이동’을 해보면 어떨까? 실행에 옮긴 첫 번째 지역은 인도차이나. 그 후, 짧게는 한 달, 길게는 한 계절 해외에서 장기체류하는 데 드는 비용을 친구들이 물어오곤 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자크 아탈리가 ‘하이퍼 노마드’라고 부른 직업군이었다. 자크 아탈리는 비자발적 노마드와 자발적 노마드 그리고 정착민으로 구분했는데 자발적 노마드는 다시 관광객처럼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한때 포함될 수 있는 유희적 노마드, 창의적인 직업을 가진 직업군, 통역사, 여행자 등등을 하이퍼 노마드라고 불렀다.

계절을 찾아가는 능동적 방법



지난해 나는 태국의 해변휴양지 아오낭 비치에서 겨울을 보냈다. 건기로 접어든 후라 낮 기온은 30도 정도, 저녁엔 25~6도까지 떨어져 한국의 초가을처럼 선선했다. 독서를 하거나 일하기에 딱 좋은 날씨. 한낮에는 인터넷 검색을 하거나 책을 읽고, 오후에는 해변에서 수영을 하고, 저녁엔 집으로 돌아와 글을 썼다. 아오낭 비치에서 겨울을 보내는 동안 나의 한 달간 체류비는 에어컨, 침대, 소파, 책상 등등이 갖춰진 집의 월세 200달러를 포함, 총 500달러. 비용은 체류기간동안 집필한 원고의 출판계약금으로 충당했다.

낯선 도시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빌리는 일이다. 하루, 이틀 돌아다녀보면 호텔이나 고급 리조트에서 하루 묵는 비용으로 한 달간 지낼 집을 구할 수 있다. 한 달 치 정도의 보증금과 선월세만 지불하면 입주. 라오스에선 6개월 치 선불을 냈다. 전기세, 수도세 포함 월 180달러. 방 4개, 부엌, 각 층별로 거실과 화장실이 있는 2층짜리 저택이었다. 방 하나는 침실로, 하나는 서재로, 하나는 손님방으로, 하나는 아예 사용하지도 못했다. 시장에서 음식재류를 사와서 요리해 먹으니 생활비는 2~300달러로 충분했다.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중남미의 개발도상국가들의 사정은 대체적으로 비슷하다. 물론 해외에서 체류하기 위해선 비자가 필요하므로 되도록 무비자로 입국이 가능한 국가를 고르는 것이 좋다. 태국의 경우 입국과 동시에 3개월 무비자를 받을 수 있다. 라오스와 베트남의 경우엔 무비자 기간이 15일이어서 보름마다 국경을 오가야 한다.

사람들마다 계절에 대한 취향이 있다. 어떤 이는 여름을 좋아하지만 어떤 이는 여름을 싫어하고, 어떤 이는 겨울을 좋아하지만 어떤 이는 겨울을 싫어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습도가 낮고 선선한 가을을 좋아한다. 아마도 요즈음 한국은 창작을 하기에 가장 좋은 날씨일 것이다. 그런데 수동적으로 계절을 기다리기만 할 게 아니라 계절을 찾아가는 방법은 어떨까? 봄을 좋아한다면 봄을, 여름을 좋아한다면 여름을, 가을을 좋아한다면 가을을, 겨울을 좋아한다면 겨울을 능동적으로 찾아가 자신이 좋아하는 계절 속에서 작업을 하는 것이다. 위도와 경도를 따라 이동을 하면 일 년 내내 봄, 가을 같은 날씨 속에서 지낼 수도 있다. 둥근 지구는 일 년 내내 사계절을 제공하고 있으니까.

여행을 하다가 장기체류로 눌러앉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어떤 여행자는 장기체류하고 싶은 마을을 찾아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지난 8월, 나는 올 겨울을 보낼 장소를 찾아 다시 태국일대를 돌아다녔다. 푸켓-크라비-방콕-깐짜나부리-상클라부리-아유타야-수코타이-치앙마이-빠이-치앙라이. 태국의 남부해변에서 북쪽 산악지대까지 둘러본 후 귀환. 올 겨울을 보낼 장소로 빠이를 낙점했다. 슬금슬금 시베리아 한랭전선이 한국의 상공으로 내려오고 있다. 하이퍼 노마드처럼 이동이 자유로운 직업군이라면 국내에서 머무르며 손발이 꽁꽁 얼어붙는 엄동설한을 견딜 필요가 있을까? 해외에서 너무 오래 지내면 현실감각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접어두시라. 히말라야에서도 인터넷만 연결하면 국제무료통화로 가족, 친구, 동료들과 매일같이 얘기를 나눌 수 있고, 국내외 뉴스, 영화, 드라마뿐만 아니라 ‘100분 토론’까지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노동효 필자소개
노동효는 천 개의 베개를 가진 사내. 방랑하던 중 민예총 웹진 [컬쳐뉴스] 편집장의 눈에 띄어 여행하고 글 쓰는 업에 발을 들였다. 저서로는 대한민국의 샛길을 떠돌며 기록한 여행에세이 『길 위의 칸타빌레』와 『로드 페로몬에 홀리다』, 여행과 책을 접목시켜 한겨레에서 연재한 칼럼을 묶은 『길 위에서 책을 만나다』, 20세기말의 유라시아 대륙횡단기를 다룬 『푸른 영혼일 때 떠나라』가 있다. 2010년부터 동남아시아에서 장기체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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