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세미나 > 지역 > 대전
부산
[발제]60년대와 70년대 부산의 실험미술, 그리고 김정명의 초기 작업
정연심

1960년대 서울과 부산의 실험미술


1960년 부정선거의 여파로 이승만은 하야하는데 당시 국전에 반대하는 젊은 작가들은 정동극장과 영국 대사관 쪽 덕수궁 담벼락을 따라 벽전(1960.10.1.시작)60년전(1960.10.5-14)을 개최해 미술계에 반발을 표했다(1)이들은 정부 주도의 아카데미즘을 반대하고 덕수궁 담에 그림을 걸어 기성세대에 반대하는 저항적 목소리를 집단으로내는데 성공하였다(2). 이러한 시대적 변화는 1950년대의 앵포르멜 세대와 달리, 차가운 기하학적 추상을 열었던 오리진의 결성으로 이어졌고, 오브제를 부분적으로, 일시적으로, 설치적으로 사용하는 결정적인 변화를 끌어내게 되었다.

 

벽전》, 1960

 

《60년전》(1960.10.5-14)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실험미술은 서울과 부산, 대구 등 주요 거점 도시를 중심으로 소그룹 형태로 결성되어 전시되었다(3). 1962년 서울에서는 오리진과 무동인, 악뛰엘, 오리진 그룹이 결성되었으며, 이후, 196411월 서울에서는 논꼴동인이 결성되고, 1965년에 발간된 논꼴아트에 수록된 사진에는 김인환, 강국진, 남영희, 양철모, 정찬승, 최태신, 한영섭이 등장한다(4).

논꼴아트』(1965) 

 

 ‘논꼴아트에 글을 투고한 유준상과 오광수 등의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신세대작가들로 지칭되었다. 이들은 대학을 졸업했던 해에 공동 아틀리에를 홍제동에 마련하고 논꼴이라는 이름으로 일시적 공동체를 형성했다(5). 평론가 유준상에 의하면, ‘논꼴화장터 근처의 옛 지명에서 온 것으로, ‘논꼴이란 말은 당시에 논과 고랑이 있었다는 뜻으로 사용된 용어이다. 이들의 전위적 행위는 전시에 출품된 작품도 중요하지만 동인지인 논꼴아트를 출판했던 점이다. 이것은 20대 작가들이 생각하는 가장 실험적인 미학 논조들이 인쇄본의 형식으로 출판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논꼴동인은 어떤 집단적인 아젠다를 추구하기 보다는 다소 느슨하게 결집된 예술 콜렉티브 그룹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미술가들이 주축이 되어 형성한 일시적 공동체는 서로 치열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전위성을 공유했다(6). 참여동인들은 논꼴아트에 각자 글을 싣고 공모전에 대한 집단토론도 하게 되는데, 주로 전통에 저항하는 전위성에 기반한 부정, 저항을 의미하는 동시에, 앵포르멜을 벗어나기 위한 양식, 형식 면에서의 부정의 미학을 주장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부정의 미학을 논꼴전시에 출품한 작품에서는 엿볼 수 없으나 적어도 1965년 글에서는 아방가르드의 부정의 미학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결국 논꼴동인은 19651, 19662(서울의 신문회관), 19673(부산) 전시를 끝으로 자연스럽게 해체되고 말았지만, 기성 회화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활력을 찾기 위한 신세대들의 목소리를 찾아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사실 이 시기에 논꼴 동인들이 출품한 작품들은 여전히 앵포르멜 계열의 추상이다. 따라서 작품 자체의 특징보다도, 집단 창작촌의 결성, 아트지 발행, 부정의 미학에 대한 아방가르드에 대한 논고 및 토론이 담론 면에서 훨씬 더 흥미롭다.

1960년대 후반 서울과 부산 화단의 실험미술은 일시적 예술 (설치 등)에 눈뜨게 했던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이러한 미술은 화이트 큐브의 조건에 벗어난 새로운 시험대를 시작했으며, 전위의 미술이 참가[참여, participation]의 미술(7)​ 나아가는 첫걸음이 되었다.

1963년 부산에서는 김종근, 김동규, 김홍규, 박만천, 김종철이 주축이 되어 ()’을 결성하였다(8). 혁은 기성세대의 미술 언어를 탈피하여 새롭고 현대적인 것을 추구하기 위해 상식적인 회화의 방법이나 전통의 형식에 얽매인 이론의 일체를 일단 거부하고, 새로운 모색에 의한 실험적인 작업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동인과 함께, 부산에서 중요한 실험미술의 모태가 되는 습지(濕地, 1965-1967)1965년 김인환, 김청정, 양철모, 이수(이정수). 이용길에 의해 결성된 실험미술 그룹으로 이들은 창립 선언문에서 자유로운 서식과 호흡과 조형적인 자유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인간 존재의 원형을 찾는 자기 확대”, “모험과 실험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9)

 

 

동인이 3회 이후부터 점차 추상화풍으로 변해갔다면, ‘습지는 처음부터 추상적 실험으로 출발했다. 점차, 혁 동인과 습지 동인이 모여서 함께 활동하며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이후작가회라는 동인이다. ‘이후작가회는 창립전을 1968(414-20)에 부산에서 개최하였는데, 이 전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개최되고 해체되었다. 창립 선언문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 우리는 추상 이후(抽象以後)에 기점해서 갖은 실험 정신을 기울인다

2. 우리는 세계정신에 입각함과 아울러 전통의 바닥에 뿌리를 둔 전위(前衛)와 자세에 투철하 려 한다.

3. 우리는 이 운동에 참여하는 개체의 자유로운 의사(意思), 자유로운 표현을 기리고 사랑할 것 이다

4. 우리는 끊임없이 낡고 경화(硬化)을 제거하고 거기에 새로운 활력(活力)을 부여하는 작업 을 서슴지 않을 것이다(10). ...

 

1960년대 후반, 부산에서도 서울의 한국청년작가연립전에서 엿볼 수 있는 실험정신을 이후작가전에서도 똑같이 감지할 수 있다. 부산의 이후작가전은 서울의 연합전에 비해 비평적 관심을 많이 받지는 못했지만, 산업화와 근대화, 네온의 등장, 연통의 사용 등 당시의 전시를 보면 강선보의 <영역 침범>, 김동규의 <고속도로 5>[라이트아트], <도시계획>, 김인환의 <작품 1, 2>, 김종근의 <연속 1, 2>, 김청정의 <탕아(蕩兒) 돌아오다>, <표본된 구체(球體)>, <나는 어디에도 있지 않다>, 김홍규의 <생태(生態) >, <생태 >, 김홍석의 <연탄가스 축제>, <담배 태우는 연기>, 양철모의 <재미없는 미학>, 이용길의 <매물(賣物) 198, 20, 202, 203원 견본(見本)>, <짝지은 부부 내내 행복할 지이다>, 조철수의 <부재(不在)>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양철모 인터뷰 영상, 부산시립미술관《1960-70년대 부산미술: 끝이 없는 시작

 

1960-70년대 부산미술: 끝이 없는 시작(부산시립미술관)에 전시된 김청정의 <나는 어디에도 있지 않았다> (1968/2020년 재제작)에서 알 수 있듯이 주전자, 거울 등은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즉물적인 일상 오브제들이다. 각 재료나 오브제들은 조각의 좌대와 함께 영속적 위치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전시 공간 안에서 일시적이고 즉물적으로 존재하며 관람자들은 오브제의 사이 공간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 시간성과 물질성이 그의 오브제를 통해 감지할 수가 있다. <표본된 구체(球體)>(1968)에서도 기성제품인 자와 탁구의 사용으로 오브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구축하는 법을 제시하고 있다. <무제, 695>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산업사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컬러링이나 형상을 따라 동시대의 삶의 변화와 산업화를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김청정, <나는 어디에도 있지 않았다> (1968/2020년 재제작)

 

김인환의 작품은 공중에 매달린 플라스틱 바가지가 흔들리면서 일종의 모빌 아트처럼 보였으며, 조철수는 색물감이 들어간 링거병을 통해서 오브제 작업을 설치 형식으로 전시했으며, 김동규의 작업은 양동이에 색소로 물을 내고 천을 매달아 색 물이 천에 스며드는 과정을 전시했다. 일종의 프로세스 아트로서 시간이 흐르면서 작품이 달라지는 양상을 보여주었고, 이용길은 기하학 문양을 계속해서 찍어내는 실험작업을 선보였다. 이들의 작품은 서울에서 개최되었던 한국청년작가연립전처럼, 연탄, 건전지, 플라스틱 오브제, 스프레이 필름, 링겔 등 산업적인 소재와 재료를 사용함으로써, 회화와 조각이라는 범주를 넘어 새로운 매체 실험을 통해 기성세대와의 차별을 선언하고 이를 실험했던 중요한 전시라고 볼 수 있다(11). 이 전시에 참여했던 김동규의 작업은 1972년 이시우가 쓴 리뷰에 들어간 이미지와 유사한 작업처럼 보이며, 비평가는 화면 하나 하나가 다르면서도 한 줄기의 혈맥처럼 이미지를 이어간다. 그것은 마치 나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생명력의 일관성(12)이라고 지칭했는데, 긴 천을 떨어뜨린 장면은 ST 전시에 참여했던 김홍주의 <무제>(이후 파기) 작업과 유사하다. 당시 이 전시본 김강석은 이후작가전의 경우 구상 조각과 회화에서 탈피하여 부산미술에 새로운 추상과 새로운 오브제의 확장이라는 중요한 기여를 하였지만, 여전히 네오 다다라는 외적인 형식을 강조함으로써 표피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13).

하지만 전위예술의 깊이나 미술사적인 평가르 떠나 1967-1968년을 기점으로 부산화단에서도 전위미술의 실험성을 강조한 동인들의 전시가 본격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각에서는 1968공간동인이 결성되면서 인체 위주의 아카데믹 조각에서 벗어나 모더니즘 조각의 확장된 장, 프로세스 아트의 시간성이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심봉섭, 김청정, 정상만, 이기주, 심차순, 권달술을 주축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작가전과 더불어 1968년 제1동아국제미술전람회(東亞美術國第展覽會)가 부산 동아대학교 주최로 개최되었는데 여기에서 이승조는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비록 1회 전시로 끝나긴 했지만, 서울과 부산 등을 비롯해 실험, 전위작가들이 참여한 전시로 의의가 있었다.

 

이승조, <() Nucleus>, 1968, 캔버스에 유채, 173x​130(cm) 

서울 화단을 생각해보자면, 196712월 무동인, 오리진, 신전동인이 함께 한국청년작가연립전이 개최되었고, 와트전도 열렸다. 앞서 언급한 논꼴동인에서 출발했던 강국진, 정찬승, 김인환에 더해 양덕수, 그리고 여성 미술가들인 정강자, 심선희가 함께 했던 신전동인은 동인과 더불어 오브제를 평면에서 탈피해 가장 반예술적 경향을 지녔다. 이 중 동인은 1962년에 결성되어 창립전을 가졌고, 1967년에는 제2<현대미술의 실험>을 기획하고, 196712월에 한국청년작가연립전에 참여했다(14). 전후 한국 미술 전체를 보아도 반예술’, 안티-아트의 개념과 연장선상에서 두 그룹의 행보는 가장 다다이스트적인 전위그룹이었다.

 

젊은 세대를 대표한 ’, ‘오리진신전新展동인들의 작품들은 서로 방향은 다르되, 기성세대의 무기력하고 기진한, 그리고 어쩌면 거의 습성화되어 버린 추상에 대한 반항으로 나타났다. ‘신전동인은 추상의 모호한 초월의 세계에서 백팔십도로 방향을 돌려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현실, 우리 주변의 현실에게로 그들의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그들의 어 휘를 가장 일상적인 오브제 속에서 발견했고, 또는 작품을 통한 일상생활에의 적극적인 참여를 시도했다.(15)

 

오리진과 동인에 비해 가장 나이가 어렸던 신전동인은 생활 속의 예술을 지향하면서 작품이 놓인 환경과의 연관 속에 작업을 규정하려는 특징을 지닌다고 설명한다(16). 하지만, 포스트 엥포르멜 계통을 이어받으며 기하학적인 추상을 강조한 오리진의 경우 가장 오랫동안 동인으로서의 그룹전을 많이 가졌다면, ‘동인과 신전동인은 훨씬 더 단명한 것이 특징이었다. ‘신전동인은 연합전을 위해 의도적으로 그룹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은 집단적인 성격보다는 기성세대에 대항한 새로운 예술로서의 안티아트와 생활 속의 예술, 환경 등을 표방하였다(17). 이들은 1960년대 말 그룹 활동을 통해 전시하다가 곧 그룹 자체를 해체하고 AG(한국아방가르드협회), ST(Space and Time)의 일원으로 활동하거나 개별적인 행보를 이어나갔다.

이 시기, 신전동인과 동인들의 작업에서 가장 눈에 띄는 요소가 뒤샹의 반예술적 태도이다. 사실, 뒤샹의 반예술적 태도와 예술에 대한 새로운 정의는 간헐적으로 언급은 되었지만 한국의 전후미술과 자세하게 연구된 바가 없는 측면이다. 마르셀 뒤샹은 1960년대 중후반 전통에 대항하는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동시대의 새로운 영웅과도 같은 존재였다. 1967년에 이일이 쓴 말대로, “오늘의 젊은 전위작가들은 뒤샹에게서 그들이 미학의 원천을 찾고 그들의 창조 행위의 본보기를 찾고 있는 것(18)이었다. 이는 잠시 AG와 인연을 맺었던 시기를 제외한다면 이단아적인 행보를 보여준 이승택과 같은 한국의 아방가르드 제1세대들이 일본과 구미의 잡지를 통해 접했던 정보였다. 예를 들면 이승택은 당시 홍익대학교에서 가르치던 아카데믹한 화풍의 조각을 접하다가 이러한 잡지를 통해 뒤샹의 예술적 태도나 뒤샹이 제기하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묻게 되었다고 한다. 뒤샹이 제작한 특정 작품이 아니라 뒤샹이 제기한 예술적 개념, 즉 전통에 대한 반항이나, 항거, 반예술적 태도는 한국의 전위미술과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19). 특히, 1966년도에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와 파리국립현대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되었던 뒤샹의 회고전은, 초기 과 같은 레디메이드작품에서부터 커다란 유리작품까지 20세기 초중반을 관통하는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작품들이 모두 전시되었다.(20)

2017년 서승원과의 인터뷰에 의하면, 1960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은 건축가 김수근이 미술대학 소속의 건축학과에서 가르쳤으며, 최순우는 한국미술에 대해 강의하고, 파리로 유학을 막 다녀온 이일은 세계 미술의 동향을 강의하는 등 역동적인 분위기였으며 해외 미술의 동향과 정보를 갈망했다고 한다(21). 그는 인터뷰에서 196711월부터 19685월까지 계속된 시리즈 형식의 <현대미술 세미나>를 언급하며 당시 한국청년작가연립전 참여작가들인 강국진, 정찬승, 최붕현은 지방을 순회하며 릴레이 강연회를 이어나갔다고 한다. 사실, 이 시기 전시와 작가에 대한 연구는 상당하지만 공식적인 학회나 연구회가 있기 전에 이러한 강연, 특강은 정보에 목말라있던 젊은 작가들에게 가시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 우리나라의 경우는 뉴욕보다는 파리를 예술의 최전방 격전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뒤샹의 반예술적 전위성과 실험성은 전통을 부정하고 기성세대에 항거하는 젊은 4.19세대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김정명과의 인터뷰에서도 설명되었다. 196910월 뒤샹이 작고하면서 미술수첩이나 여러 잡지들이 이를 다루고 있었고, 오광수 또한 한국아방가르드협회지 발간의 A.G.잡지 제1(1969)예술작품이 아닌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뒤샹의 말을 직접 인용해 다루고 있다. 강국진을 비롯해 60년대 후반 신세대 소그룹 활동으로 말할 수 있는 신전동인의 경우, 안티아트를 주창한 뒤샹의 영향은, 구체적 작품을 통해 일대일로 발현되기보다는 한국의 전통을 전복시키는 부정(negation)과 탈평면 회화에 대한 저항의 상징체라는 의미가 훨씬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뒤샹의 어떤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아방가르드의 상징으로 뒤샹의 정신에 더욱 깊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연합전이 열렸던 19671211일에 젊은 작가들이 주도했던 가두시위의 푯말이었던 생활 속의 작품’, ‘행동하는 화가라는 표현은 사실, 안티예술 정신을 발현한 것이었다.

 

1970년대 실험미술


부산화단과 관련하여 1970년대 부산의 실험미술은 미술사학자 최열이 논평한 대로, 김강석이 공간지에 게재한 부산화단의 문제와 그 중요작가, 같은 해에 출판된 이용길의 지방화단 광복 30년의 발자취-부산편-동인전을 중심으로 분석해 본다에서 알 수 있다(22). 특히 비평가 이시우가, 1978계간미술에 게재한 동란 중에 다져진 서양화지반에 의하면 1960년대와 1970년대 부산 화단의 실험적인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하고 있다:

 

 67년에 김구림의 실험적인 개인전은 팝아트로써 깊은 여담을 남기고... 구상으로 출발한 혁 동 인은 점차 추상으로 변모하는 동안 습지와 합류하여 추상 이후의 표현 양식을 모색...

70년대 이후에는 보수적인 화풍을 견지하면서 여생을 즐기는 노세대와 근대적 화법과 전위적 인 미술의 중도에 서서 구상 작업에 성실해 보이는 불혹 세대와 이론이나 정립이 빈곤함에도 불구하고 실험적 전위계열에 매어 달리는 젊은 세대로 나누어져 뚜렷한 세대의 계층을 나타내 고 있다. .. 70년 이후 오늘까지 동인으로 장수로 꼽히는 혁 동인은 18회를 이어 창립 이후 해 마다 대작을 걸고 꾸준히 노력해온다. 김인환, 차동수, 유무수, 김정명이 중심이 된 Work는 첨 단적인 실험미술을 보여 주변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허황, 김정명이 주축이 된 포인트 경우도 캔버스에 평면적 작업의 현대미술로 주목을 끈다... 조형분야에서는 공간이 10회를 이어 신봉 , 심차순, 심문자, 김정명, 엄태진, 김청정, 권달술, 박종선(도미), 하인성, 이기주 등으로 부 산에선 유일한 조각미술의 정상을 이루고 있다.

 

1975년 부산 화단에서 주목할 수 있는 동인으로는, Work현대미술연구회가 있다. 이는 부산미술을 위시한 현대미술 자체에 대한 고민으로 결성된 동인으로, 김인환, 윤영중, 이태호, 류무수, 김정명, 손기덕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다. 당시 부산탑 미술관에서 개최된 창립전(1975.5.1.-5.6)에는 김현숙, 김인환, 김태호, 류무수, 손기덕, 김정명, 조기수, 이성재, 심경, 차동수, 전태용, 류수교, 허종하가 참여하였다. 이후, 1977년 현대칼라전시실에서 개최된 WORK 현대미술연구회 6인전에는 김정명, 류무수, 손기덕, 심경, 윤영중, 이태호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1977년에는 현대미술연구회에서 갈라져 나와 협회라는 이름으로 1977년에 창립전을 가지고 김정명, 류무수, 손기덕, 심경, 윤영중, 이태호 등 참가하여 1977Work현대미술협회를 다시 결성하였다.

거의 비슷한 시기인 1977에는 포인트(Point) 현대미술회가 결성되어 작가의 개성을 존중하면서 실험과 창조를 추구하는 젊은 미술가들의 모임이 만들어졌는데, 류무수, 김유신, 허황, 윤영중, 김명수, 이태호, 홍맹곤, 안창홍, 손기덕, 정철교, 김응기, 조종호, 김정명, 이평렬, 박금숙, 박종선 등으로 구성되었고, 2,Point-78(원화랑)에서는 김명수, 김유신, 김웅기, 김정명, 박금숙, 박완선, 손기덕, 안창홍, 류무수, 윤영중, 이평렬, 정철교, 조동벽, 허황, 홍맹곤이 참여하였다. 같은 해인 1977년 결성된 기류회에서는 20대 젊은 작가였던 안창홍, 예유근, 정철교, 한용식 등이 참여하였다.

이 시기 서울화단에서는 에꼴 드 서울, AG, ST 전 등이 결성되어 활발하게 전시 중이었다. 특히, 72 AG (국립현대미술관, 경복궁, 1972.12-11-12.25)에서는 김구림, 김동규, 김한, 박석원, 박종배, 서승원, 신학철, 심문섭, 이강소, 이건용, 최명영, 하종현이 참여하였고, 명동화랑에서도 실험미술전시가 다수 열리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2회 에스프리전 (명동화랑, 1972.11-7-11)이 있다.

 

김정명의 초기 실험미술


김정명은 현대미술연구회를 중심으로 인맥과 학맥을 떠나 실험예술에 집중하는 동인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룹은 추상미술을 추구했으나 위계질서가 있어서 POINT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고자 노력했다. 포인트를 통해 안창홍 작가와 같은 실험성이 짙은 작가들과 교류하며, 기성세대의 미적 언어를 탈피하려 했던 그는 현대미술연구회를 통해 매체 자체에 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특히 서울에는 서울현대미술제를 모태로 교류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 부산을 거점으로 경남 베이스의 작가들과도 전시의 형식으로 많은 교류를 모색하였다. 그는 1965년에 홍대에 입학하여 조소과를 1973년에 졸업하였다. 당시 대학 입학 전에 이미 동경 유학을 다녀온 선생님들을 통해 미술을 배우면서 다다를 이미 읽고 대학에 입학하였다고 한다. 홍익대에서는 당시 추상 조각의 대가였던 김정숙 조각가가 가르치고 있었지만, 김정명은 김인겸과 입학 동기로 초기부터 팝적인 요소에 매력을 느꼈다. 그의 작품이 팝적인 언어로 바뀌기 이전, 그러니까 1970년대 초기의 작업들은 동시대 부산과 서울에서 진행되던 실험미술의 흐름 내에서 다뤄질 필요가 있다. 전위미술과 개념미술의 인식 하에서, 김정명은 1970년대에는 <빨-액들과 컵>(1976)(23), <-허와 허>(1977), <1>(1975), <응고된 마음>을 제작했고, 1970년대 후반부터는 <프레임과 캔버스>를 제작하였다. 그의 작업은 보이지 않는 것을 들추어내고, 프레임의 안보다는 프레임 뒷면, 프레임 밖으로의 확장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유리창을 통한 프레임 만들기>(1978)은 프레임의 정해진 한계를 넘어 물리적 공간으로 시선이 확장되어 간다. 그는 응고라는 표현을 통해 1970년대의 억압적인 사회적인 분위기를 전달한다.

 

          김정명, <-허와 허>, 캔버스에 유채, 천에 석고, 1977

 

1975년에 설치되었던 <풀밭 위의 식사 이후>에서 김정명은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를 참조하여 일상적인 평범한 오브제를 미술의 공간으로 끌어들였던 작업이다. 주변에는 잡초를 비롯해 먹다 남은 과일, 도시락, 기타 등이 주변에 펼쳐져 있다

 

김정명, <풀밭 위의 식사 이후>, 1975, 부산시립미술관 재전시 장면

 

이 작품은 이강소가 1975년 파리 비엔날레에서 보여주었던 <무제> 작업처럼, 자연의 오브제를 실내의 공간으로 끌어들여, 반미학적이고 반예술적인 성향을 예술의 영역 안에서 질문을 던지는 일시적 설치 작업이기도 하다. 인체 연구나 풍경화 등이 아니라 우리의 실생활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오브제나 상황 등을 작품 속에 사용하면서 김정명의 작업은 현실과 일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1974년에 제작된 <표상화된 작위 74-05>의 경우는 새끼줄과 철사를 이용해 조각적 오브제를 만든 작품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새끼줄과 철사의 형태와 물성을 넘어 새로운 개념의 전복을 위해서 오브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전혀 새로운, 이질적 형태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김정명의 이 작업은 강국진이 명동화랑에서 개최한 개인전에서의 작업과 유사한 방식의 실험 미술 토대 안에서 제작되었으며, 오브제와 주변 상황과의 관계, 오브제의 확장에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다른 실험미술작가들과 달리, 김정명은 사회와 일상 속에서 예술이 매체로서 매개되는 지점에 더욱 관심을 가진 듯이 보이며 이는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말풍선>, <손가락> 등의 연작에서 치열하게 다뤄진다. 부산화단에 대한 중요한 글을 남긴 김강석의 비판대로 이러한 실험미술은 외양적이고 표피적이며, 형식적인 양상에 그쳤을지 모르지만, 전후 한국미술의 척박한 토대 속에서 부산뿐 아니라 서울의 실험미술가들은 전위의 이름 하에서 집단적인 동인의 활동, 그리고 개인적 궤적을 통해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예술을 적극적으로 실험했다. 이를 반영하는 물리적 작업은 많이 남아있지 않는 상태에서 이번 전시를 통해 다시 제작되었다. 1960년대 후반, 1970년대 중반, 부산과 서울의 젊은 작가들은 작은 콜렉티브를 바탕으로 한 그룹전, 동인전을 통해서 엥포르멜을 추구했던 이전 세대와는 다른 모던 추상을 지향하거나 혹은 환경과 생활을 통합하며, 산업화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일시적 상황을 구축하였다.

 

 

 

(1) <벽전>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재학생들의 벽 동인회가 기획한 전시였으며, <60년전>은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 졸업생들이 ‘60년 미술가협회’(60년 미협)를 결성해 기획한 전시였다. 이에 대해서는, 김미경, 한국미술그룹 운동사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구조성에 주목하며-, 조형 아카이브, vol. 3서울대학교 조형연구소, 2011, pp. 324-355 참조.

(2) 당시 선언문은 현실은 차디찬 벽이 되어 우리들의 눈 앞에 놓여있다. 어린 십대에 전쟁을 겪은 우리들에겐 아무리 돌이켜 보아야 젊다는 이외에 이렇다 할 잘못이 없다..... 전시대인의 과오를 규탄하고 그들에게 역사의 책임을 물어 우리들의 입장을 변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지금은 행동을 결행할 때다.... 우리들에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그리고 창조 시현할 수 있는 자유를 달라”: 벽동인 선언문과, 악뚜엘 선언문 등을 살펴보면 50년대 세대에 대한 저항적 목소리 등을 느낄 수 있다. 윤진섭, 60-70년대 실험미술의 성과와 반성(2009), 글로컬리즘과 아시아의 현대미술, (사문난적, 2014) 참조.

(3 )부산의 1950년대 화단은 김미정, 1950년대 부산 지역 미술의 리얼리즘 경향, 한국근현대미술사학, 22(2011.12), pp. 213-235 참조. 1974년 서울에서는 앙데팡당전이 개최되었으며, 대구에서는 계명대학교에서 대구현대미술제가 열렸다. 또한 1975년에는 서울현대미술제가 열렸고, 1976에는 부산현대미술제가 개최되었다. 당시 에꼴드서울 등을 중심으로 한 한국-대만 교류전에 대해서는 연구자의 글 참조: “Korean Art in the 1970s and 1980s: Interactions and Conflicts,” The Museum of Contemporary Art, Taipei, Taiwan in association with the Spring Foundation, 2019 출판.

(4) 부산화단과 부산 출신 작가들의 작가론은 강선학, 부산미술의 조형적 단층, 부산대학교출판부, 2011 참조.

(5) 유준상, 결산과 창조의 기점에서, 논꼴아트, 1965; 이후 1995년에 유준상이 쓴 강국진을 추모함참고; “논꼴은 서대문 밖 무학재 너머의 홍제동에 있었던 농촌마을 이었으며, 드문드문 초가집과 스라브 지붕이 보이는 매우 한적한 마을이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이웃에 화장터가 있었으며, 저 멀리 누렁 길로 구슬픈 가락과 만장이 나부끼는 상여행렬이 지나가던 곳이었다”; http://www.kangkukjin.com (웹접근: 2018630).

(6) 논꼴아트의 첫 페이지 등장하는 선언문은 아래 세 가지를 표방한다. 일체의 타협과 형식을 벗어나는 시점에서 우리는 항시 자유로운 조형의 가치를 올린다. 1.새 시대에 참여하는 자유에의 의식을 우리의 조형조건으로 한다. 2.우리는 극단적 시간의 창조적 변화를 조형윤리로 삼는다. 3.기성의 무분별한 감성에서 벗어나 지성의 발판에서 형성의 모랄을 추구한다.

(7) 신정훈, 1960년대 말 한국미술의 도시문명에의 참여, 미술사학28 (2014, 8), pp. 189-217. 2항거가 아닌 참여: 포스트-앵포르멜 세대의 도시적 감수성참조.

(8) 김종근 김동규, 김홍규, 김종철, 박만천 등 부산사범대학 미술과 졸업생들이 모여 196311월 첫 발표전을 가졌으며, 이후, 김홍석, 정원일, 최종태, 조철수 강선보, 심영보, 김인환 이정수 등이 참여했다.

(9) 부산미협 64(부산미술협회, 2010).

(10) 이후 작가전 제1회 리플릿(1968): 부산역사문화대전 사이트 참조.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12914

(11) 김강석, 부산화단의 문제와 그 중요작가, 공간, 19752월호.

(12) 이시우, 다채로운 기교적 재능: 김동규 개인전, 국제신보, (1972420) 

(13) 부산 화단의 미술사 연구에 대해서는, 최열, 지역미술 연구방법: 해방기 한국전쟁, 부산의 경우참고. 임호, 부산화단 해방이십년사, 1965.(이용길 엮음, 가마골꼴아솜누리-부산미술계 반세기, 사단법인 낙동강보존회, 1993. 재수록.) 김강석은 부산 일보, (1968420]; 김강석, 현대미술의 방향.

(14) 오광수, 초기 강국진의 작가적 면모와 활동, 강국진화집 수록 및 강국진의 웹사이트 참조; http://www.kangkukjin.com (웹접근: 2018630). 오광수에 따르면, ‘동인의 멤버 중 한 사람인 진익상은 홍대출신이 아닌 멤버 중 한 사람이었으며, 전위음악가로 참여했고, 본명이 임명진인 임단은, 외교관으로 전위그룹에 참여했다고 한다. 임단의 1967년 작업에 대해서는, 2011년 아르코에서 개최된 데페이즈망 벌어지는 도시(김미경, 최재원 기획) 참조. 이 전시에서는 임단의 1967년작 철사작업이 전시되었다. 2011, 한국의 산업화와 도시화를 반영한 임단의 철사 작품은 전시를 위해 리프로덕션 되었다.

(15) 이일, CHRONIQUES·하반기를 통해본 ’68년도 미술계 I, 이일 미술평론집: 현대미술의 궤적, 동화출판공사, 1974, pp.253~255; 정연심, 이유진, 김정은 (), 비평가 이일 앤솔로지, , p.330.

(16) 동인은 1962년 홍익대 회화과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제로 그룹으로, 김영남, 김영자, 석난희, 이태현, 최붕현, 황일지 등으로 결성된 단체이다. 이들은 창립전 이후, 19676현대미술실험전(620-26)을 개최하며, 오브제 중심의 입체 작업들을 선보였다. 이들은 방독면, 해골 마스크, 고무 장갑, 수술용 의료 기구, 고무 주머니 등을 이용하여 이후 조금 더 젊은 작가들이었던 신전동인들보다 훨씬 더 사회비판적이고 다소 묵시록적인 느낌을 주었다. ‘동인에 대해서는, 김미경, 한국의 실험미술, 시공사, 2003, p.39 참조.

(17) 이일, 생활하는 젊은 미술-한국청년작가연립전을 보고, 동아일보19671223일자; 정연심, 이유진, 김정은 (), 비평가 이일 앤솔로지, , p.399

(18) 이일, 무상의 창조가마르셀 뒤샹, 이일 미술평론집: 현대미술의 궤적, 동화출판공사, 1974, pp.174~177; 정연심, 이유진, 김정은 (), 비평가 이일 앤솔로지, , p.21.

(19) 이승택과 필자의 인터뷰: 2014, 11월 연남동 작가 작업실.

(20) Arts Council of Great Britain. (1966). The almost complete works of Marcel Duchamp: [catalogue of an exhibition] at the Tate Gallery 18 June-31 July 1966. London: Arts Council of Great Britain. 이일은 19671115일에 한국청년작가연립전 주최세미나에서 추상 이후의 세계미술의 동향을 주제로 강의를 개최했는데, 당시 세계적으로 주목받던 뒤샹을 비롯해 개념미술, 대지미술 등을 다양하게 소개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1960년대 중후반에 이일이 쓴 초기 평문을 보면, 당시 이일이 일본뿐 아니라 파리, 뉴욕, 런던 화단의 네오아방가르드의 전위성에 대해 주목하는 글들이 등장한다; 정연심 편저, 비평가 이일 앤솔로지(, ).

(21) 20177월 서승원과 필자의 인터뷰.

(22) 김강석, 부산화단의 문제와 그 중요작가, 공간, 1975.2; 이용길, 지방화단 광복30년의 발자취-부산편-동인전을 중심으로 분석해 본다, 한국미술, 창간호, 1975.12.

(23) 작가에 의하면, ‘은 형태가 들어서는 것을 의미하며, 목욕탕에서 수건에 물이 흡수되는 것을 보고 시작했다고 한다. 현대미술의 동향은 부산 광복동 야시장에서 본 아트 인 아메리카등과 같은 잡지를 통해 파악했다고 한다. 2017년 올해의 작가: 김정명특별호, 미술평단2017년 겨울호, 127, pp. 4-46: 윤진섭, 고충환, 강선학, 최태만, 조선령 글 참조.

 



정연심 / 미술사학자, 홍익대 교수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교수로 뉴욕대학교 IFA(Institute of Fine Arts/미술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뉴욕주립대학교 FIT의 미술사학과 조교수를 역임했으며 구겐하임 미술관의 백남준 전시 리서처로 일했다. 2018-2019년에는 풀브라이트 펠로우로 뉴욕대학교 방문연구교수를 역임했다. 2018년 광주비엔날레 큐레이터를 역임했으며 『현대공간과 설치미술』(2014), 『한국의 설치미술』(2019), 『한국동시대미술을 말하다』(2015), 『비평가 이일 앤솔로지』(편저자, 2013/ Lee Yil: Dynamics of Expansion and Reduction: Selected Writings on Korean Contemporary Art, Les Presses du reel, 2018) 등의 저서와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이불에 대한 논문(2018)를 비롯해 국영문으로 된 다수의 논문을 집필하였으며, 책임에디터이자 저자로 『Korean Art from 1953: Collision, Innovation and Interaction)』(London: Phaidon, 2020)를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