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일 유명 현대무용가 류 모 씨의 성추행 사건이 기사화되면서 무용계에 미투(me, too)가 터졌다. 건강한 무용계를 위해 자발적인 활동을 펼쳐온 ‘무용인희망연대 오롯’은 황망함과 참담함 속에서 성명서를 냈고 오롯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803명의 개인과 84개 단체의 연명이 이어졌다. 이들은 ‘오롯_#위드유(이하 #위드유)’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피해자에 대한 연대 활동을 시작했고, 류 모 씨 사건 재판에서 6번의 재판 방청 연대와 2번의 연서명 탄원서 모집 활동을 했다.

지난 1월 8일, 첫 기사 이후 6개월의 시간이 흘렀고, 류 모 씨 사건에 대한 1심 판결이 나왔다. 위력의 구체적인 실체를 조목조목 인정한 의미 있는 판결이었다. 당연히 #위드유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판결이겠지만, 결과로서의 판결에만 주목하기에는 그간의 과정에 대한 경험과 해석, 한계에 대한 인식과 남은 과제 등 중요하게 짚어야 할 대목들이 많다. 그저 ‘악인’ 한 명이 사법적 심판을 받은 ‘일화’가 되어서는 안 되기에, ‘지금’, ‘여기’ 예술계를 말하기 위해 #위드유를 만났다.

오롯의 첫 성명서는 놀라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연대서명인이 개인, 단체 합쳐서 900명에 달했다. 숫자가 문제의 본질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기존의 성명이나 탄원과는 달랐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정도의 반응이었다. 무엇이 그런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 같나?

김유진 큰 이슈가 벌어질 때는 그걸 둘러싼 환경이 중요한 것 같다. 일단 류모 씨(가해자)가 이미 무용계에서 유명한 사람이라서 이슈의 도화선이 된 부분이 큰 것 같다. 무용계 밖에서는 몰라도 무용계 안에서는 다 아는 사람이었고, 그 사람에 관한 기사가 터지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라는 반응이 기본적으로 깔리는 것 같았다. 다음으로, 조직된 힘이 있는 것 같다. 오롯의 지인들을 시작으로 확산이 아주 잘 되었는데, 류 모 씨 사건뿐 아니라 블랙리스트 때도 이런 힘이 잘 작동했다. 보통 이런 조건이 충족되어도 성명 참여 규모가 일정 수준 이상이 안 된다. 그런데 이번 성명에서는 어느 순간 규모가 규모를 부르는 방식으로 커졌다. 초반에는 조직된 힘이었지만 나중에 가면서는 규모가 규모를 부르는 방식으로 확산했다.
그리고 우리 이전에 이윤택, 김기덕 사건을 비롯해 문화예술계의 다양한 미투 사건으로 인해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는 초기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고, 이미 사람들이 어느 정도 준비된 상태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이런 이슈에 동참하는 것에 별 거부감이 없었다. 심지어 대학로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요청했는데도 별 부담 없이 서명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 이전에 있었던 사건들이 사람들의 의식을 어느 정도 바꾸어놓은 면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우리 안에서도 이 사건이 가진 상징성이 워낙 크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면 어느 정도 표준이 될 거라는 생각을 했고, 그만큼 화력을 집중해서 활동했다.

성명서의 메시지 전달 방식이 달랐던 점이 중요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보다 큰 구조적인 환경, 시기적 조건이 작동했다는 것인가?

김유진 성명서가 쓰인 과정이 달랐던 것 자체가 공감을 불러일으킨 이유가 된 것은 맞다. 이건 중요한 문제다. 많은 성명서가 선언문처럼 되어 있거나 혹은 피해자의 피해 사실을 부각해서 이슈화를 통해 참여를 유도한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하고 싶지 않다는 얘기가 나왔고, 공감대를 구축할 수 있는 방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부분에 전원 합의했다. 방향성의 핵심은 “우리 얘기를 쓰자”는 것이었다. 우리를 돌아보고 우리 얘기를 솔직하게 쓰면 공감의 토대가 구축되지 않을까 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모르는 것은 안 썼다. 우리는 아는 것만 썼다. 선언적으로 어떤 게 옳다고 하는 것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갈 수 없다. 그리고 피해자에 대해서도 안 썼다. 실제로 피해자에 대해 모르기도 했고, 2차 가해 문제의 심각성에 관한 인식이 있었다. 그래서 2차 가해가 생길 일은 특별히 주의했다. 이런 원칙이 활동의 모든 과정에 적용됐다.
함께 성명서를 쓰는 과정은 지지부진하다. 글을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게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글을 잘 쓰는 것이 아니다. 글을 잘 쓰는 것과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은 별개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거기에서 공감할 만한 요소를 추출하고, 이 과정을 계속한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하니까 제 3자가 봐도 “내 이야기”라고 느낄 수 있었다고 본다. 품이 너무 들어가는 것이 힘들었지만 사건이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매번 그런 식의 과정을 반복했다.

성명 참여자가 엄청나긴 했지만, 그중에는 그냥 대세라서 참여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당위적 연대’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재판 방청 연대라는 실제적인 싸움의 단계로 넘어가서도 연대의 규모와 힘을 느낄 수 있었나?

천샘 방청 연대에 오는 사람들은 많게는 20명 정도, 적을 때는 5~6명 정도였다. 고정적으로 오는 사람들도 있고 바뀌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상황이 중대하다 싶어서 “많이 와주십시오” 하면 좀 더 와주시고 그랬다. 4차 공판에서, 우리는 재판이 거의 마무리되는 시점이라 생각했고 별일 있겠나 싶었는데, 그때 등장한 증인심문 내용에 피해자가 너무 분노해서 우리를 직접 찾아오게 되었다. 그다음에 진행된 5차 공판에는 모두가 달라붙어서 방청 연대 숫자가 커졌고, 6차가 마지막 선고였다.
이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성폭력 사건 전문 상담사와 얘기를 해봤는데, 방청연대 활동이 이렇게 적극적인 경우가 많지 않다고 들었다. 보통 첫 공판과 선고 때 오는 정도라고.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중요한 순간순간에 연대인들이 와주었다. 세력 싸움이라 여겨지는 것이 옳지 않다고 보지만, 어쨌든 말 그대로 밀리지 않아야 하는 순간에 달랑 방청 연대 공지만 보고도 그 자리에 와주셨다. 그게 첫 성명서를 시작으로 중요한 고비를 지날 때마다 유지되었다. 이런 모멘텀에서 연대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비공개 재판의 경우에는 (재판정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복도에서) 2시간 동안 기다리기만 하다 가셨다. 어떻게 그런 연대가 가능했을까? 8백 명 전체가 그랬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공감하는 분들이 꾸준히 있었다는 것만은 확신한다.

김유진 첫 성명처럼 규모가 이렇게 커지면 사람들은 규모에 관심을 가진다. 그런데 이만한 규모가 형성된 데에는 운이 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얘기한 이미 준비된 토양, 도화선에 불을 던진 격이었다. 작위적으로 그런 규모를 만드는 것은 하려고 해도 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상식의 규모가 있는데, #위드유 구성원들이 그런 동시대적인 것에 접속을 한 사람들이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냥 먼저 말한 사람들이라고 평가하는 게 맞겠다.

김윤진 그래서 우리가 보도자료를 돌릴 때도 숫자를 안 쓸 수는 없었지만, 규모를 두드러지게 어필하는 것을 피했고 그걸 우리 관심사로 두지 않았다.

방청 연대에 오지 않는 사람들과 특히 잘 소통할 필요가 있다는 태도가 큰 차이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김유진 규모에 실망하느냐 아니냐는 성과가 중요한 운동에 해당하는 일인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처음부터 그것을 경계했다. 동원과 공감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도 동원되기 싫은데 우리가 누구를 동원하나?

성과주의 방식과 다르다는 점, 동원이 아닌 공감이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운동도 성과주의적 방식이 되기 쉽다. 그러다 보니 2차 공판처럼 비공개로 진행되는 바람에 연대인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지점, 접속의 포인트를 상실하기도 한다. 그런데 8월 28일, 2차 공판 후기 ‘벽과 벽 사이로 흐르는 연대’는 오히려 그런 상황 안에서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준 것 같다.

김윤진 그게 처음 성명서 쓸 때의 몇 가지 기준과도 연결된다. 그중에 이런 게 있었다. “우리를 빼놓고 쓰지 말자.” 보통 성명서를 쓰면 사건 중심으로, 그걸 객관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시점의 글을 쓰지 않나? 그런데 우리는 이 사건에서 우리가 판관이 되고, 이 사건을 밖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태도를 가지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무용계 안에서 성장했고 일정 부분 우리도 침묵했고, 피해자의 위치와 가해자의 위치에 섰었다는 공통의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얘기를 써야지 우리 스스로가 먼저 설득이 된다고 보았다. 우리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공감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활동의 순간순간에 (비록 허망한 듯 보이는 상황에서도)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계속 생각하고 논의했다.

무용인희망연대 오롯 #위드유 구성원인 안무가 천샘(좌)과 김윤진(우)
무용인희망연대 오롯 #위드유 구성원인 안무가 천샘(좌)과 김윤진(우)

장르 생태계 안에서 살아왔던 ‘나’를 배제하지 않고 사태에 직면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런 경험은 살아가는 태도에 일정한 변화를 만들지 않을까 싶다.

천샘 이건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나의 경우만 놓고 보면, 예전에는 이런 민감한 이슈가 있을 때 ‘좋아요’ 한번 누르는 게 눈치가 보였다. 특히 지원사업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나의 잠재적 심사위원이 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까 하는 눈치가 보였었다. 그런데 지금의 상태를 보면 너무 단순한 표현이지만 ‘좋아요’를 전보다 눈치보지 않고 누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분명한 변화다.

자기 존재의 회복 과정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실제 연대 활동의 과정에는 심리적 고통과 소진의 문제가 따른다. 이런 문제에는 어떻게 대응했나?

김윤진 생업이 있는 사람들이라 매번 오프라인에서 모일 수 없으니 매일 새벽 1~2시까지 텔레그램으로 회의를 했다. 이슈가 있는 그날그날 밤에 온라인으로 논의를 하는 거다. 그게 참 힘들었다.

김유진 심리적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이라…그냥 물리적으로 힘들었다. 일 자체가 많았다. 온라인 회의 외에도 오프라인(방청 연대)에 한번 나가는 일이 행사 준비하는 거랑 똑같다. 모객하고 관리하고 이런 것들이 다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심리적인 것보다 물리적인 것이 힘들었다.

천샘 우리 모두 소진되는 것에 대해 걱정했다. 판결 나오기 직전이 가장 힘겨웠던 순간이다. 구성원들에게 개인적인 일들도 많이 생긴 시기였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자주 갔다. 우리는 경험치가 없는 사람들이라 처음에 정한 원칙에 따라서 연대활동의 모든 상황을 하나하나 대입하면서 판단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했는데, 그 안에서 당연히 피로와 갈등이 생긴다. 그럴 때 미리 이런 일을 겪어본 베테랑 선생님이 우리가 정한 기본 원칙과 다르지 않은 조언을 해줄 때 큰 위안을 얻었다. 또 하나는 명확하게 자기 생각을 말하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게 편했다. 흔히 다독임이 위안이 된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진실이 더 위안이 되었다. 거기로 가야 한다고 말해주는 그런 사람들의 존재. 물론 그런 분명한 입장들 사이에서의 토론은 힘이 든다. 당연하다. 다만 여기에서 그 방향을 보고 꿈꾸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었고, 내가 지치면 옆에서 다른 사람이 같은 꿈을 꿔주고 있었다. 그게 중요했다고 본다.

감정적인 위로나 격려도 중요하겠지만,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고 방향에 관한 선명한 인식을 하면서 활동을 했던 게 중요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김유진 그런데 하나 우려되는 것이 있다. #위드유의 활동 방식과 방향이 이러이러했다고 이곳저곳에 인터뷰가 실리면 이게 하나의 잘 된 사례가 될 것이고, ‘이렇게 활동하면 된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을 텐데, 그건 무척 위험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이와 유사한 사건이 벌어지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텐데, 이것에 대응할 수 있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현재 공식적인 단체도 아니고 일종의 동인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일을 다루는 데 시스템적 대안까지 말하지 않고 활동한 이들에 대한 위로 얘기에 머무는 것은 위험하다고 본다. 우리의 사례로 사연을 만드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는가 싶다. 이 인터뷰를 수락한 이유가 그것 때문이다. 언론사 기사로는 다뤄지지 않지만, 예술계에서 진짜 중요한 부분은 이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윤진 그 사건 이후에 우리에게 이런저런 요청이 있었는데, 우리가 그것을 어찌할 수 없다. 이렇게 가다 보면 사람들이 오롯과 #위드유가 조사기관도 아닌데 “조사해봐라”, “나서달라”는 식의 요구를 한다. 과도한 요구다. 우리가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위드유가 어떻다가 아니라 비슷한 사건들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무용계 차원에서 얘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활동 자체가 하나의 미담처럼 회자되는 것은 제일 우려하는 일이다.

이것을 하나의 ‘성공’이라고 바라보지 않아야 하고 자축 잔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에 공감한다. 그런데 원치 않겠지만 오롯과 #위드유의 이후 활동에 대한 질문이 많이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김유진 오히려 질문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 #위드유의 다음 계획을 물을 것이 아니라, 예술계의 다음 계획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 부분은 어떤가? #위드유의 문제 해결 경험은 곧 문제 해결 역량의 획득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술가가 그런 역량을 갖추고 있어야 할까? 예술가가 때로 경찰, 때로 검사, 때로 변호사 역할을 해야 할까? 당연히 아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몇몇 사람의 열의와 역량이 아닌 어떤 방식의 대안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가?

김유진 “예술가가 그런 역량을 갖추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이 사건을 성공의 프레임으로 보는 것과 같은 시각이다. 그냥 예술계 안에서 어떤 문제가 터졌다. 우리가 사는 터에서 일이 터졌다. 그랬을 때 거기에 관여를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잘 할 거냐는 두 번째 문제고, 여기에 관여할 의지가 있냐, 예술계 자체가 건강하게 돌아가게 하는 데 기여할 마음이 있느냐의 문제다. 이건 스스로 예술계의 구성원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이게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예술계 안에는 기관도 있고 학교도 있고,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도 예술계의 당사자에 해당한다. 그럼 이들이 각각 자기의 역할을 #위드유처럼 찾아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 다음 단계가 뭐냐고 우리에게 물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술계는 프리랜서가 많은데, 회사에 다니면 담당 부서에 가서 신고라도 할 텐데, 예술계에서는 어디 가서 얘기하나? 문체부 가서 얘기하나? 상담센터가 있기는 하지만 상담은 개인의 문제를 치유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 문제고 일단은 무슨 일을 당한 사람이 어디 가서 고발하거나 혹은 내 문제가 진짜 문제인지 판단을 해볼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을 걸 곳이 없다. 무조건 상담센터에 가서 나 다쳤으니 치료해 달라고 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이런 걸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

무용인희망연대 오롯 #위드유 구성원인 문화기획자 김유진(우)
무용인희망연대 오롯 #위드유 구성원인 문화기획자 김유진(우)

문체부, 예술경영지원센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무용가, 음악가, 연극인, 심사하는 사람들, 평론가들 모두가 예술계의 구성원인데, 예술계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해 업계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관여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말에 공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예를 들어 기관의 경우에는 현장의 일이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지 않나?

김윤진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빼놓고 얘기한다. 피해자와 가해자 당사자만의 개인적인 일로 치부하면서 심지어 업계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나는 일곱 살 때부터 춤을 춰왔기 때문에 뭐라 해도 나한테는 무용계가 존재한다. 문제가 생기면 잠잠해질 때까지 회피하거나 침묵하거나 강 건너 불구경하듯 냉소적인 태도로 발언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무슨 도움이 될까?
발 딛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일은 아니라 하고, 유관 단체나 조직 기관도 침묵하고, 개인의 일탈로 축소하면서 공동체의 책임은 덮어버리는 것이 너무 화가 나서 처음 성명서 때부터 초지일관 제삼자는 없다고 한 것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해야 할 역할이 있듯이 어쨌든 내가 최소한의 책임감을 느끼고 무언가 할 수 있는 영역 안에 나를 위치시키는 것이다.

김유진 오히려 협회나 기관처럼 규모 있는 단체들은 예술 생태계 안에서 더 큰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니 더 큰 책임이 있다. 그런데 항상 보면 이런 일을 개인의 일로 국한하려 한다. 사실 개인의 일로 축소하려는 입장은 말이 안 된다. 이번 판결 자체가 위력에 의한 성폭력에 대한 인정 아닌가? 그럼 위력은 어디서 나왔나?

천샘 위력의 실체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협회의 간부면 다 위력이 있나? 그렇지 않다. 위력의 실체를 구성하는 것은 지원금이라고 본다. 재정이 힘의 근거가 되는데, 그 재원을 공급하는 공공기관들에서 명확한 입장과 방침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제시하지 않고 있다. 성폭력 가해자의 경우 정부 지원에서 배제한다는 조항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으로는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걸러낼 수는 없을 것이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 판결에 직접 영향을 받는 곳이 어디일까? 바로 문화예술계다. 이런 문제에 대해 기관이 해야 할 일에 관한 명확한 입장과 구체적인 실천 행동이 이제부터라도 뒤따라야 한다.

김유진 기관에 자신의 역할을 하라고 하면 가해자-피해자 구도 안에서 가해자를 치워버리는 방식으로 끝맺는다. 그런데 가해자를 영영 추방해버리는 것도 문제다. 예술계 안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때, 가해자는 공동체의 죄까지 같이 뒤집어쓴다. 가해자의 죄뿐 아니라 기관이 먹어야 할 욕도 이 사람이 먹는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져야 할 성찰의 책임이 있고, 그러한 개인의 성찰을 돕는 사회적 성찰도 필요하다. 그런데 다들 개인의 문제로 돌린다. 성찰도 개인이 하고, 문제 해결도 개인이 하고, 가해도 피해도 개인이 받는 식이다. 그러니 가해자 쪽에서는 극단적으로 방어를 하게 된다. 죄가 작든 크든 일단 걸리면 추방이기 때문에. 그러면 영원히 해결이 안 된다.

기관이든 개인이든 내가 속한 생태계가 문제가 없는 곳이 되도록 만드는 것에만 몰두한다는 점이 악순환의 원인 중 하나인 것 같다. 크든 작든 문제는 항상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런 문제에 어떤 대응을 할 것인가를 논의해야 하는데, 계속해서 문제없는 업계가 되도록 하는 것에 논의의 초점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김유진 그런 방식의 생각이 우리 안에 아주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예술가의 육성 과정에 대해서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무용계에서는 몸에 대한 수치심이 곧 교육의 도구가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게 배우고 그렇게 가르치는 일종의 가학과 피학의 대물림이다. 이런 방식이 아니라 예술가의 성장을 지원하는 교육적 내용이나 환경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특히 이런 사건의 피해자가 장르 생태계에서 지위조차 얻지 못한 학생인 경우가 많다는 측면에서 중요하게 생각해볼 일이라고 보는데.

천샘 윤단우 작가의 표현인 ‘신체 주권’과 관련해서 예술가들이 하는 행동 중 하나가 자치규약 작업이다. 창작 작업에서 오고 가는 말과 피드백이 어떻게 해야 폭력이 아닌 서로에 대한 존중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규범을 만드는 움직임들이 있다. 일종의 ‘창작 규약’이라고도 하는데, 미국의 CTS(Chicago Theatre Standards)를 연극계 주도로 한국의 실정에 맞게 수정하는 KTS(Korea Theatre Standards) 작업이 그 한 예이다. 우리 안무 팀도 함께 정한 규약이 있는데 규약을 적용하기 전과 후가 다르다. 우리는 그걸 만들어서 함께 읽고, 또 전체의 의견을 받아서 수정하고, 다시 회람하는 방식으로 했다. 그러면서 공통의 언어가 생겼다. 그런 게 비폭력적 예술 환경과 관련해서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나고 있는 일들이라 본다.

김윤진 몸의 주권에 대해 생각하면 나는 피해자의 입장에도 섰었고 가해자의 입장에도 섰었다. 내가 오롯_#위드유 활동을 하면서 얼굴을 내미니까 어떤 사람들은 ‘김윤진 자기는?’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나는 나를 돌아보게 된다. 학생의 기술을 향상시키고 성과를 내기 위해서 내가 취한 교육적 방식을 돌아보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떳떳해서 이 활동을 하는 게 아니다. 나 자신을 마주하면서 하는 활동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괴롭다. 성찰하면서 한 걸음씩 내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성명에 연대하기도 하고, 탄원서를 쓰기도 하고, 방청 연대에도 참여하고, 또 인터뷰 준비 과정에서 오롯과 #위드유의 활동 기록을 꼼꼼하게 확인하면서 질문을 준비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질문에 대한 응답이라기보다는 ‘당신은 이 문제에 대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또 다른 질문으로 느껴졌다. #위드유 구성원들이 인터뷰를 수락한 것에는 언론사 기사로 풀어낼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어서였다. 나 역시 심판만으로 끝나지 않아야 하는 내가 속한 예술계의 문제에 대해 업계 구성원으로 할 일을 찾아보려는 마음에서 인터뷰를 기획했다. 지면의 한계와 필력의 부족으로 인터뷰이들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다 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얼마 지나지 않아 2심 재판이 열릴 것이다. 거기에서는 기관을 포함한 좀 더 많은 업계 구성원의 참여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설동준
  • 필자소개

    설동준은 학부 때 원자핵공학을 전공한 후 아무 관련 없는 예술 분야에서 프리랜서 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서른 살에 국악 단체에서 기획 및 단체경영 업무로 예술업에 발을 들였고, 예술, 과학기술, 신학 등의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교육공학을 전공하면서 사람의 변화와 성장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최근에는 생활문화, 인력양성, 문화예술교육 영역에 대한 연구 및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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