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무용계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연대해 위력에 의한 성폭력과 관련한 의미 있는 판결을 이끌어낸 오롯_#위드유 그룹을 인터뷰했다. 만남을 통해 확인한 것은 사법적 판단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기 위해 우리 안에 건강한 자치 역량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번에 만난 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KTS: Korea Theatre Standards) 집필진은 바로 그 지점에 대해 고민해온 사람들이다. (오롯_#위드유도 2020년, 사법적 판단 이후에 대한 연구 작업을 진행 중이다.)

모든 규약이 그러해야 하듯, 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이하 KTS)은 지켜야 하는 목록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현재 온라인에서 PDF로 출간된 규약집 서두에도 그에 대한 자세한 얘기들이 있지만, 실제 집필에 참여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문장에 다 담기지 않는 고민의 단면을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라 생각했다. 비록 여러 작업 현장에 흩어져 있어 한꺼번에 모두 만날 수는 없었지만, 대학로에서 오프라인으로 1명, 온라인으로 4명, 이렇게 KTS 집필진 중 5명과 규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경에서 처음으로 시도해본 온-오프 병행 인터뷰다.)

규약집이 나오기까지

우선, KTS가 어떻게 시작 되었는지 얘기를 부탁한다.

사자 2018년 미투 운동이 계기가 되었다. 암암리에 듣기는 했지만, 설마 그럴 리가 했던 일들, 혹은 전혀 몰랐던 그런 일들을 마주하고, 연극계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 와중에도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흐름이 생겼다.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성반연)도 그런 흐름에서 생겨났다. 성반연에서 활동하던 박영희(철수)님이 다른 나라에 연극인들이 지키는 규약을 만드는 사례가 있다고 했고, 자료를 가지고 와서 그걸로 토론을 했다. 그리고 작년 2월 CTS(Chicago Theatre Standards)를 만든 로라 피셔라는 배우와 CTS 워크숍을 진행했다.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연극인들이 우리에게도 이런 규약이 필요하고, 우리의 것을 만들자고 해서 가칭으로 KTS 워킹그룹이라는 이름을 만들고 모임을 시작했다.

다들 예술이 주업이고 바쁠 텐데 부가적인 수고를 감당해야 하는 일에 지속해서 참여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나?

사자 작년 5월 첫 모임을 시작해 격주로 만나 CTS를 비롯해 작업장에서의 성폭력, 위계폭력에 대한 자료를 함께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실 시작하면서부터 가장 크게 염두에 둔 부분이고, 또 걱정하기도 했던 부분이 지속성이다. 우리는 각자가 자율적으로 만났고, (강제성이 없는) 이런 형식으로 KTS를 연구하고 발간까지 하는 게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어쨌든 함께하기 부담스럽지 않고, 자기 작업을 하면서 유지 가능한 수준에서 이 모임을 진행해보자고 해서 현재의 집필 과정까지 왔다.

무리하지 말자고 해도 추진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부담이 지워지지 않나? 누군가가 소진되지 않는 구조를 위한 나름의 운영 방법이 있었나?

전강희 하다 보면 동력을 얻기 위해 바짝 몰입해야 하는 시기가 있긴 하다. 그래도 KTS는 그런 조정이 꽤 잘 되었던 모임이라고 본다. 비록 집필에는 집중적인 시간을 할애했지만, 집필 전에는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워킹그룹 모임이 있었다. 그 모임에 모두가 나오지 않아도 부담스럽지 않은 상황, 즉 오늘 내가 못 왔지만 다음 모임에 나가도 된다는 분위기를 꾸준하게 만들었다. 물론 항상 자리를 지켜주신 멤버들이 있는데 (그 멤버들이 다 집필진이 된 건 아니다) 그런 분들이 있어서 모임이 지속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들마다 참여 정도의 차이, 정보의 차이 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누군가가 소진되지 않게 일을 하자는 원칙을 계속 신경 쓰면서 지금까지 왔다.

임인자 모임을 시작할 때 우리는 ‘체크인’이라 부르는 몸과 마음의 상태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지고 워크숍을 진행했다. 서로의 존재와 안부를 묻고 시작하는 것이 참 좋았고, 그게 안도감을 가질 수 있게 해줬다. 그리고 중간에 운영진 구조를 갖춰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어서 총회를 한 적이 있는데, 부결되었다. 몇 명에 의해 운영되는 KTS 워킹그룹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전담 파트를 구성한 것은 집필 단계에서의 일이었고, 전반적 모임의 구조는 모두가 함께 가는 방식을 기본으로 했다. 그 외에도 어떤 사안을 결정하기에 앞서, 그 결정을 하기 위한 룰 자체를 먼저 논의해 정했다. 내용의 회의보다 룰의 회의가 먼저였다.

전강희 거기에 더해서, 워킹그룹에 늦게 합류한 멤버가 기존의 논의를 따라잡을 수 있게 자료(정보) 정리 방식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정보에 대한 부분에서 소외가 일어나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

사자 앞에 인자님이 말씀했던 것처럼 우리가 첫 모임에서 한 일이 앞으로의 논의 과정에서 지켜야 할 규칙(ground rule)을 만드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실무를 소수가 책임지지 않는다. 합류한 시기와 무관하게 1인 1표를 행사할 수 있다, 전체 논의에서 결정된 것만 실행한다, 이런 룰이 KTS를 만드는 의미와 닿아있었다. 그러다 보니 의사결정이 엄청나게 늦긴 한데, 느리더라도 목소리를 모으는 일에 집중했다.

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KTS) 집필진
(왼쪽 사자(김지연) 창작자 및 오른쪽 화면 윗줄 가운데부터 시계방향으로
임인자 독립기획자 겸 연출, 강보름 연출, 김수희 연출, 전강희 드라마터그)

KTS 첫 모임인 2019년 5월 이후 규약 집필 단계까지 1년의 시간이 걸렸다. 미투 활동은 신속하고 강력한 대응을 요구하는 상황이었을 텐데, 규약이 발간된 시기를 보면 급하게 가지 않기 위한 속도 조절을 한 것 같다. 본격적인 집필 단계로 넘어가게 되는 계기나 시점이 따로 있었나?

사자 따로 계기가 있는 건 아니고, 시작부터 호흡을 길게 가져가야 한다는 동의가 있었다. 솔직히 미투 상황을 보면, 우리의 작업 현장에서 당장 필요한 것이었다. 한두 달 만에라도 만들어서 내놓아야 하는 급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래도 좀 깊게 생각하고, 적어도 1년 정도 후에 규약으로 가자는 제안들이 있었고, 모두가 동의했다. 작년 12월까지는 어떤 규약을 만들 것인가에 대해 논의했고, 그 이후에는 어떤 문구로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그렇게 논의를 모아가면서 5월 이후 본 집필 단계가 시작되었다.

이제 막 온라인 출간이 됐지만, KTS가 활동의 중요성에 비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앞서 답변의 내용으로 보면, 기존에는 홍보와 확산에 집중하는 시기가 아니었던 것인가?

사자 일단은 KTS를 만드는 일 자체에 중점을 두었다. 홍보하고 알리는 일은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인 것 같다. (KTS는 2020년 10월부터 전국 포럼을 진행 중이다.)

김수희 우리는 조직체가 행정부, 기획부, 교육부 같은 식으로 기능이 분화되어 있지 않고, 책(규약집)을 만들어서 나누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수요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홍보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만들어놓고 보니 모르는 분들이 많아서 홍보를 좀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연극의 해 사업 중 지역 워크숍에 참여해서 지역 홍보 및 지역 포럼 아카이빙, 규약집 보완 작업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현재는 무료 다운로드 가능한 PDF만 만들어뒀는데, 지역 포럼까지 끝나고 나면 그 내용을 포함한 책으로 출판하는 것도 계획 중이다.

강보름 텀블벅을 통해서 파트너를 모집할 때, 참여하는 사람들이 너무 적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었다. 그런데 실제로 해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주었다. 그리고 KTS 워크숍을 문의해주시는 단체, 독립PD들이 있고, 대학 예술 동아리에서 KTS를 활용하고 피드백을 보내주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것을 보면서 많은 곳에서 관심이 있고, 또 필요로 함을 확인하는 단계가 지금이라고 본다.

현장에서의 실질적 적용을 위해

KTS는 명칭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CTS를 기본 뼈대로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외에도 다양한 국내외 규약을 참고한 것으로 아는데, 특히 해외 규약을 우리 현실에 맞게 수정할 때 국가 간, 문화 간 차이가 두드러졌던 부분이 있나?

사자 로라 피셔와 함께 진행했던 CTS 워크숍 자체가 그런 차이가 두드러진 장면이었다. 아마 워크숍 내내 가장 많이 나온 얘기가 “이게 우리나라에서 가능해?”였을 거다. “좋은 거 알겠고, 이렇게 되면 좋겠는데 불가능하잖아요.” 이런 얘기가 많았다. 그런데 KTS를 읽으면서도 많은 분들이 그런 얘기를 하신다. 어떤 부분은 당장에도 적용할 수 있지만, 어떤 부분은 재정이나 현장의 분위기 등이 만들어져야 실현할 수 있는데, 그런 현실에 대한 피드백도 많이 듣는다. 우리 역시 규약을 논의할 때 바로 그런 지점들에 대해 많이 얘기를 나눴다. 어떤 분들은 현실 가능성에 제한받을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현장이 더 나아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했고, 어떤 분은 실제 작업 안에서 적용 가능한 규약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문장마다 그런 얘기들을 나눴다. 보는 지점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 역시 KTS 작업을 하지 않았다면, 적용이 가능하느냐는 질문과 너무 많은 제반 여건이 필요하다는 문제 제기부터 했을 것 같다. 일단 나의 경우에는 방향을 제안하는 의미라고 생각하고, 내가 보는 자리가 조금 바뀌었다는 것을 느낀다.

작업의 현실적 조건, 작품의 완성 시기, 결과물의 수준, 제한된 자원 등과 KTS가 충돌하겠다는 생각을 읽는 동안 자주 했다. 예술계 안에도 분명히 성과주의가 있다고 본다. 업적, 결과물, 완성도 등이 예술의 열정인 동시에 성과주의일 수 있다. 결국 KTS는 우리 안의 성과주의와의 충돌과 마주하고 있다고 보는데, 현장의 문화는 어떤가? 예술적 성취에 대한 갈망, 열의가 모든 것의 우위에 있던 분위기가 여전히 지배적인가? 혹은 시대가 변했나?

김수희 현장에서는 ‘규약이 필요한가?’라는 생각을 바꾸는 것부터가 오래 걸렸다. 사실 규약의 개별 규칙들은 각 극단이 놓인 상황에 맞게 수정하면 된다. 현장의 상황과 무관하게 무조건 지켜야 하는 강령이나 강제 사항이 아니다. 그렇게 봤을 때, (조정할 수 있고, 함께 정하면 되는 약속에 대해) “가능하냐”라는 반문의 분위기를 바꾸는 게 가장 어려운 것 같다. 우리 극단에서도 KTS를 함께 읽었다. 배우들이 묻더라. “연출님, 이렇게 할 건가요?”, “이렇게 할 수 있나요?” 그래서 호칭부터 바꾸고, 하나씩 조정해가고 있는 중이다. 공부라고 생각한다.

임인자 시대가 변했는가라고 질문했는데, ‘요즘 시대’에 대한 감각이 지역에서는 다르다. 내가 있는 광주 지역에서는 극단 내에서 갑질, 성희롱들이 일어나는데, 연출이라서, 혹은 무대감독이라서, 직무상 그런 일이 있었다는 식이 여전하다. 그런 환경이기 때문에 더더욱 규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규약 안에 대리인이 ‘안전조력자’로 되어 있고, 문제 해결 과정을 ‘문제풀이안전길’과 같은 방식으로 제안한 것은 KTS가 단순히 방향 제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해결의 과정과 문제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등에 대한 현실적 고민을 반영한 것이다.

현장에 적용한 사례 피드백을 기다린다는 얘기가 규약집에도 있다. 피드백을 받은 사례가 있는가? 있다면 어떤 내용인가?

전강희 극단 북새통에서 워크숍을 요청해서 다녀왔다. 워크숍이 특별한 게 아니라, 같이 규약집을 읽어보는 거였다. 북새통의 경우에는 워크숍 전에 자체적으로 한 번 읽은 상태였는데, 워크숍에서는 한 문장 한 문장에 대해 질문을 주고받으면서 진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현실적인 어려움이 무엇인가보다는 자기의 경험, 동료들과의 인식 및 지식의 편차 극복, 지향점 등에 관한 얘기를 많이 나눴다. 이건 나 개인의 얘기와도 맞닿는다. 나의 경우 KTS 워킹그룹에 참여하고, 집필진을 하면서 이것들이 어느 정도 일상의 질문으로 내려와 있다. 그런데 규약집을 처음 읽는 사람들에게는 그 시점이 고민의 출발점일 수 있겠다 싶고, 워크숍은 사람들의 스타트를 확인하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임인자 최근 대전에서 워크숍을 했는데, 안전조력자 역할을 대표나 연출자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는 얘기가 나왔었다. 창작 영역에서 연출이나 대표의 위계가 워낙 익숙해서, 우리의 창작 환경을 바꾸는 일도 연출이나 대표가 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규약집을 읽다 보니 안전조력자를 공동체의 선거를 통해 뽑을 수 있다는 것이 새로웠다는 피드백이 있었다. 안전조력자라는 개념 자체가 공동체의 관계를 바꾸는 계기가 되겠구나 싶었다.

전강희 님 대답 중 “나에게는 일상의 질문으로 내려와 있다”라는 것의 의미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줄 수 있나?

전강희 오랫동안 고민을 했다는 것, 매일매일 생각했다는 의미에서의 일상이고, 규약을 만들면서 내 행동과 생각에 대해 성찰해보게 되었다는 측면에서도 일상인 것 같다. 극단 북새통 워크숍에서는 규약을 대상에 따라 A4 1장으로 만들 수도 있고, 개인에게 해당하는 규약을 만들 수도 있으며,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만들 수도 있다는 얘기를 했었다. 이런 규약들이 하나하나 모이면 해당 단체의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이 긴 호흡으로 나에게 들어오는 것이 일상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주 고민을 하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변했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나?

전강희 나는 드라마터그이기 때문에 단체에 대해서 강력한 책임을 지는 입장은 아니다. 그래서 ‘이게 내 입장과 책임은 아닌데, 나 아닌 타인에게 이런 얘기를 해도 되나?’ 하는 공포가 있었다. 이제는 그런 부분에서 좀 당당해진 것, 말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는 인식이 생겼다. 그리고 KTS 워킹그룹을 하기 전에는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지금껏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잘 들어줄 수 있는 사람들과만 교류했다면, 이제는 그게 아닌 사람들과 대화를 해야 하고, 실질적으로 화가 좀 덜 나게 된 측면이 있다. 사람을 대하는 범위가 넓어진 것 같다. 여유라기보다는, 사람을 길게 놓고 보는 것이랄까?

김수희 미투 운동 당시, 당사자성에 기반한 운동과 연대는 굉장히 뜨겁고 격정적이고 치열했다. 그런데 나의 경우 KTS 규약집을 쓰는 과정에서 차분해졌다. 안전할 수 있다는 감각, 모두가 평등하다는 개념이 조금씩 들어오면서 분노가 가라앉는 느낌이 있었다. 무언가 싸워야 한다, 싹 다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나에게는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성폭력 문제를 마주했을 때, 며칠을 부르르 떨고 그랬다. 그런데 예를들어 규약에 ‘원인 제공자’라는 표현이 있는데, 지금은 이걸 좀 더 나은 다른 표현으로 바꾸는 게 화두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문제에 대해 편 가르기를 해서는 안 되고, 어떤 2차 가해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얘기를 내가 하고 있더라. 그리고 실형을 산 가해자의 복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싶은 목표가 생겼다. 이전에는 “무조건 안돼!”, “내가 있는 판으로 돌아온다고?”라는 생각에 온몸이 떨리고, 무서웠는데, 지금은 건강하게 담론으로 만들어보자는 개인적 목표가 생겼다.

임인자 나는 자신에 대한 분노로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오랜 시간 예술감독으로 일했고, 조직에서 사실상 결정권자 입장에서 일을 해왔다. 그러다 보니 지금 일어나는 일이 내가 행했던 일들인 경우가 많다. 집필의 과정에서 과거 나의 말을 복기해볼 때, “설마?”, “그럴 사람이 아니야.” 같은 2차 가해 표현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다. 그래서 괴로운 마음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렇다면 KTS는 현재의 공연예술계에서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논의를 위한 마중물일까?

사자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것도 문제라고 말해도 될까? 문제가 맞는 걸까?'라는 고민을 혼자 하지 않고, “얘기를 좀 해봅시다.”라고 말해도 된다는 제안이라고 생각한다. 헌장이나 강령처럼 절대성을 부여하지 않는 제안이자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해줄 수 있는 매개체로 말이다.

전강희 북새통에서 남인우 연출님이 학교의 연극개론 이후, 현장의 연극개론을 읽는 느낌이었다고 하더라. 각 포지션에 대해 새롭게 규정하고 있는 것 등이 좋았다고 했는데, 이게 어느 정도 동시대에 필요한 업데이트 된 가이드라인이 되고 있는 것 같고, 이게 내재화되면 다음 버전의 가이드라인이 나왔으면 한다는 생각을 한다.

전국 순회 포럼에 대해

최근에 대전 포럼을 진행했다고 들었다. 후기를 공유해 달라.

임인자 첫 포럼이었고,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영화 등 다른 분야 종사자들도 참여한 자리였다. 일단 KTS를 함께 읽는 시간을 가지고, 그 후에 질의응답을 나누고, 인상적인 점들을 공유했다. 우리는 당초에 규약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었는데, 참여자들과 얘기를 하다 보니 현장에서 맡고 있는 역할에 따라 규약에 대한 관심 영역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순회 포럼을 기획한 목적은 무엇인가? KTS를 본격적으로 알리는 것? 여러 지역의 현장 종사자들과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한 초석? 혹은 KTS 수정 및 업데이트를 위한 정보 수집인가?

사자 연극의 해 순회 사업에 참여하는 것 자체도 논의가 많았다. 전국 단위 사업을 한 번도 안 해본 상황에서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인지 등등. 어쨌든 하기로 결정했을 때에는 KTS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과 현장 작업자들의 피드백을 듣는 것 두 가지가 주목적이었다.

임인자 많은 문화가 서울 중심이라고 느껴지는 부분도 고려 사항이었다. 동시대라고 하지만, 실제는 동시대적 환경이 아니기 때문에 지역으로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아직까지도 연극의 상이 폭력적 개념에 기초하고 있는 것 같고, 지역의 경우 좀 더 척박한 환경에서 연극 작업을 하고 있다 보니 안전이라는 담론이 들어갈 여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KTS와 같은 담론이 보편적인 상식이 되지 않으면 지역 내 문제의식을 가진 개인의 싸움이 되기 때문에, 더 알리고 함께하자고 제안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규약과 상식이 우리의 창작 환경을 바꾸기보다는 주어진 현장의 상황이 우리의 창작과 안전을 위협하고 압도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지역에서 보기에 상대적으로 서울은 여건이 좀 나은 편이고, 지역은 아직 자치규약을 논의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보는가?

임인자 그런 부분 이외에도, 연극 연출의 위치를 마치 제왕과 같이 인식하는 점, 권리에 대해 말하는 것을 연극이나 예술 차원이 아닌 정치로 인식하는 점 등이 가로막고 있는 것 같다.

규약집의 내용에 담긴 고민

규약집에 보면 ‘2차 괴롭힘’이라는 용어가 있다. 흔히 ‘2차 가해’라고 하지 않나? 의식적으로 바꾼 것 같은데, 이유가 있나?

김수희 창작 환경 안에서 성희롱이라고 딱 규정짓기는 어렵지만 불편하고 힘든 상황이 있다. 이것 역시 위계가 작동하고 힘에 눌리는 상황인데, 이걸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성적 괴롭힘’이라고 썼다. ‘2차 괴롭힘’은 비슷한 고민의 선상에 있다. ‘2차 피해’ 역시 가해자, 피해자의 편 가르기 구도에 놓일 소지가 있는데, 창작 환경 안에서 애매하고 복잡한 상황들이 있어서 단정하기 어렵다는 고민이 있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지목하는 사람, 지목되는 사람 모두가 피해를 경험할 수 있고 편을 갈라서는 안 된다는 고민에서 ‘2차 괴롭힘’이라는 표현을 제안했다.

규약에 ‘안전조력자’의 역할에 대한 내용이 있다. 그런데 제작자, 연출가 등은 안전조력자가 될 수 없다고 되어 있던데, 소위 제작 권력의 중심에서 먼 거리에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런 사람이 문제 제기를 하는 부담을 실제로 감당할 수 있을까? 규약에서도 이런 문제를 고려한 것인지 단체 내외부적으로 안전조력자를 지원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되어있다. 실제로 활용 가능한 지원책이 있나?

사자 그런 의문에 앞서 물어야 하는 것이 있다. 우리는 ‘안전조력자’라는 역할의 필요와 안전한 환경에 대해 얼마나 공감하고 공유하고 있는가를 공동체 내부적으로 먼저 물어야 한다. 그런 공유가 되어 있다면 안전조력자는 ‘창구’의 역할만 하면 된다. 안전조력자를 맡은 사람이 홀로 막중한 책임을 떠맡는 방식이 아니다. 공감 없는 상황에서의 개인적 용기가 아닌, 공감의 토대 위에서 창구의 역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조력자가 감당하기에 버거운 큰 사건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을 혼자 떠맡지 않기 위해 규약에서 ‘문제풀이안전길’이라는 프로세스를 제안한 것이다.

임인자 공감의 토대가 있어도 안전조력자에 대한 지원은 필요하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가장 먼저 심리적 충격을 받는 것이 안전조력자라고 본다. 현장을 지원하는 활동가들이 자주 트라우마를 겪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부분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고, 때문에 언제든 할 수 없을 때는 내려놓을 수 있는 방식으로 운영할 것을 권고하는 것이다.

KTS 버전2에 대해

현재 KTS가 주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섭외, 계약, 연습, 리허설, 공연, 후속조치 등의 제작 프로세스를 따라간다. 즉, 커버 범위가 제작 프로세스라는 것인데, 버전2가 만들어진다면 어떤 부분을 담아보고 싶은가?

김수희 규약집 103쪽에 그에 관한 내용도 담아두었다. 우선 제작 프로세스를 넘어서 환경 자체를 바꾸기 위해서는 ‘예술인 권리보장법’, ‘예술인 고용보험’에 대한 부분을 논의하고 담아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2년 전인가? 김천에서 조연출님이 무대 사고로 돌아가신 일이 있었다. 이런 사건과 관련해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대한 부분을 논의하고 담아야 한다. 그리고 솔직히 아직 장애에 대한 부분을 담지 못했다. 이 부분에 대해 앞으로 좀 더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지역 포럼에도 장애 예술가를 만나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전강희 KTS에는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얘기하는 워킹그룹이 있었는데, 현재는 코로나 상황이라 여러 사람이 모이기 쉽지 않다. 담론을 만들고 다음을 말하기 위해 다시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것, 토론회 개최 같은 것들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임인자 대전 워크숍에서 많이 느낀 건데, 항목의 변화도 중요하긴 하지만, 우선은 함께 읽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만나서 같이 읽을 수만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사자 앞으로의 전망이라면, 나에게 또 필요성을 느끼게 해주는 무언가이기를 바란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될지에 대한 상을 따로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다만 회의 과정, 집필 과정이 나에게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단어, 개념, 상황, 사람에 대한 것을 마주하는 시간이었고, 이전의 내가 수용할 수 없던 것들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내가 미투 운동의 쓰나미를 거치고, KTS 워킹그룹에서 대화를 하면서 내가 모르고 있던 것, 사람과 대화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생각해보게 되었다. KTS를 하기 전과 후의 나는 다른 인격체라고 해도 될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 스스로 이것의 필요를 계속해서 확인할 수 있는 어떤 것이기를 바란다.

  • 설동준
  • 필자소개

    설동준은 학부 때 원자핵공학을 전공한 후 아무 관련 없는 예술 분야에서 프리랜서 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서른 살에 국악 단체에서 기획 및 단체경영 업무로 예술업에 발을 들였고, 예술, 과학기술, 신학 등의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교육공학을 전공하면서 사람의 변화와 성장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최근에는 생활문화, 인력양성, 문화예술교육 영역에 대한 연구 및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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