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따스한 봄날, 대학로로 설레는 마음으로 첫 출근하던 그날을 잊지 못합니다. 이곳에서 매일 펼쳐졌던 오래되고 새로운 연극과 뮤지컬, 그리고 동숭시네마텍의 추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90년대 동숭시네마텍에서만 상영하는 예술영화와 독립영화를 보기 위해서, 대구를 떠나 4시간 넘게 기차를 타고 왔습니다. 계절마다 동숭시네마텍을 찾아 새로운 영화를 만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었습니다. 겨울이 오면 눈을 맞으며 영화관 창문 너머로 꼭두가 서 있었고, 커튼이 천천히 드리워지면서 하나둘씩 꼭두가 사라지고 영화는 시작되었지요.

2008년 이후, 이젠 모습이 많이 바뀌어서 흐릿한 추억만으로 남아 있는 극장을 지나서 동숭아트센터의 계단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가 공연을 보는 것이 새롭게 제 일상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가끔 위층 박물관을 찾아서 꼭두 상설전을 찾고, <신과함께> 같은 특별한 전시를 만나는 것은 별미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당시 책방 ‘이음아트’를 알고 찾아가서 만난 기쁨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동숭아트센터에 진행하는 공연과 전시, 영화 포스터가 걸려 있었고, 초대권 몇 장이 특별한 손님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엔 그냥 손님이었지만, 자주 찾으니 단골이 되었고, 나중엔 이곳을 너무나 아끼기에 사라지지 않도록 애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2005년 설립 이후 시인이 사랑한 책방, 소설가가 아끼는 공간, 연극인의 데뷔 무대였던 ‘이음아트’는 채 4년을 못 견디고 경영난으로 인해 2009년 폐점하고 말았습니다. 예술 분야 책으로 빼곡히 꽂힌 책장만이 아니라, 이제 작가들은 눈썰미 있는 독자가 제 작품을 알아봐 주는 세계를 잃어버렸습니다. 연극을 살풋 좋아하도록 이끌었던 연극 <책, 갈피>의 초연 무대, <‘오늘의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의 시연 장소가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결국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떠나고, 아쉬운 마음을 달랠 길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책방이음’을 건립했습니다.

책방이음 내외부 전경 책방이음 내외부 전경
책방이음 내외부 전경

2009년 12월 24일 문을 연 뒤 여러모로 책방이음은 혁신을 추진했습니다. 대학로에 연극을 보러 오는 수많은 사람에게 관련 책을 만날 수 있는 공간, 연극을 포함해서 예술에 관한 깊이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서가, 예술이 무르익을 수 있도록 인문과학과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분야의 알찬 책으로 꾸려진 책장으로 책방을 새로 꾸리기 시작했습니다. 독자에게 소개할 만한 책이 무엇인지, 찾는 작업은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책 제목을 보고, 목차를 살피고, 저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머리말과 결론을 읽어보면서 마치 탐정이 단서를 찾고자 돋보기로 증거물을 꼼꼼히 살피는 것과 같은 작업을 매일같이 이어갔습니다. 그러면서 수만 권의 책을 읽어왔다지만, 얼마나 편식을 했는지 새삼 깨달았고 깊고도 넓은 책의 세계에 얼마나 무지했는지 수시로 탄식했습니다.

혁신의 추진력은 연극 관련 책을 수서하다가 멈추었습니다. 한국에서 연극 분야 책을 출간하는 출판사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을 이미 알았고 독자와의 접점이 넓지 않은 것도 체득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연극에 특화된 공간을 만들어 독자와 만날 장을 펼치겠노라 이야기하면 출판사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할 줄 알았습니다. 적극적으로 나서고 두 손으로 환영할 줄 알았는데, 남은 것은 빈손이었습니다.
대학로에서 연극 공연이 열린다지만, 책을 얼마나 사 볼지 어떻게 확언을 할 수 있겠느냐, 예전 ‘이음아트’에서 책을 주면 잘 팔아주겠노라 번드르르 말을 해놓고선 돈을 받지 못하고 책조차 돌려받지 못했는데 당신이라고 다르겠느냐, 차라리 출판사에서 직접 팔거나 대형 서점과 인터넷 서점에만 책을 주는 것이, 두통거리를 없애는 방안이라는 말에 그만 연극 전문 서점의 꿈은 사그라들고 말았습니다.

도리어 연극 책 한 권을 사기 위해서 출판사에 들르고, 대형 서점의 서가를 기웃거리고, 때론 출판사에서 책을 유통해주지 않아서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해서 비치하고 판매하는 일상이 이어졌습니다. 대학로에서 공연을 만날 수 있어도, 그 공연의 작품은 책으로 만날 수 없고, 찾을 수조차 없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책방이음 운영단체 ‘나와우리’ 운영진 회의 책방이음이 운영한 ‘작가와의 만남’ 현장

새로운 혁신은 오히려 소유 구조 변화에서 뚜렷했습니다. 책방 이름을 ‘이음아트’에서 ‘책방이음’으로 바꾸면서 운영 주체도 개인에서 ‘나와우리’라는 단체로 바뀌었습니다. 그 단체는 출자금을 내어서 공간 보증금을 충당한 사람, 매달 회비를 내고서 회원의 권리와 의무를 지는 사람, 책방의 일손을 돕고 풍요로운 곳으로 만드는 일에 손수 나서주는 자원봉사자, 지속해서 도서를 구매하면서 공간을 유지하는 데 힘을 보태는 사람에 더해서 선입금을 내고서 책을 나중에 사 가는 사람까지, 모두가 회원이 되고 회원의 성격에 따라서 책임과 권리가 달라지는 달라지게끔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또한, 이제까지 서점에서 도서 판매를 통해서 영리를 획득하고 이것이 개인의 소유로 돌아가는 방식에서 영리를 추구하지 않고 모든 수익을 사회로 환원하는 방식으로 바꾸었습니다. 덧붙여 작품 제작 지원 및 공간 지원을 통해서, 예술 작품이 제작되고 전시될 수 있도록 갤러리 운영의 방법도 전면적으로 변화를 주었습니다.

2010년 첫해의 수익금으로, 베트남 중부 꽝남성 탕빈현 빈쯩사 초등학교 도서관을 건립하였습니다. 책방이음의 운영 주체가 된 ‘나와우리’에서는 이미 2000년부터 해왔던 베트남전쟁으로 황폐해진 지역 지원사업의 일환이자, 한국군이 10년 동안 주둔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 지역의 상처 입은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으로 희생자 위령비와 같은 평화의 상징물을 만들고, 삶에 필요한 길을 놓고 마을과 마을을 다리로 잇고 집을 세우고 유치원을 건립하는 일에 이어서 도서관을 짓는 일을 하였습니다. 살림이 가난한 마을의 학교에는 교사(校舍)밖에 없었습니다. 교과서조차 부족한 곳에 책 한 권이 보이지 않고 도서관을 지을 재정은 도무지 마련할 방법이 없어 보여서, 몇 년 동안 오가면서 못내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2010년 책방이음에서 번 수익 중 약 1,000만 원을 들여서 자재를 사고 건축 전문가를 초빙해서, 4주 동안 동네 청년들과 한국의 청년과 베트남의 대학생이 땀 흘리면서 도서관을 지었습니다. 이처럼 첫해부터 매년 기부한 금액이 천만 원에서 천오백만 원 되었고, 10년이 넘으니 1억 이상이 된 금액을 도서관 건립금, 도서관 및 출판 지원금, 대학생과 대학원생의 장학금, 시민사회 후원금, 작품 제작비 등으로 사회를 위해서 썼습니다.

책방이음 도서 행사 및 모임 프로그램 책방이음 도서 행사 및 모임 프로그램
책방이음 도서 행사 및 모임 프로그램

지난 10여 년 동안 살아남은 책방이음은 결국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한 손님의 급감과 수익 확보의 불가능성이 지속되는데도 조금도 낮아지지 않는 임대료와 정부의 무대책, 도서정가제의 개악 강행의 흐름 속에서 2020년 말 폐점을 결정했습니다. 2009년에 한 번, 2020년에 또 한 번 폐점하는 것입니다. 왜 동네책방은 폐점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인터넷 서점에만 유리하게 만들어진 도서정가제가 구조적인 문제로 도사리고 있습니다. 현재 출판사 추산으로 60% 이상, 책에 따라서 90%의 구매가 인터넷 서점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통상 이야기합니다. 2003년 제정된 도서정가제는 인터넷 서점에 한해 10% 할인이 가능한 제도였습니다. 당시 이제 막 싹을 틔우는 전자 상거래 활성화를 위해서 설계한 제도였습니다. 그 뒤 전자 상거래는 점점 일반화되고 인터넷 서점은 성장해서 현재 한국의 어느 출판사보다 크고, 어떤 도매상조차 넘을 수 없는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인터넷 서점은 출판사의 수익조차 확보하기 어려운 낮은 금액으로 책을 받아 할인과 적립, 총알 배송 등을 통해 덩치를 키워왔습니다. 여기에 정부가 더 많은 할인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동안, 저마다의 특성과 지역의 특징에 맞춰 책을 선별하고, 동네 주민과의 교감을 나누며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데 기여한 작은 동네 책방들은 하나둘씩 스러지고 있습니다. 결국 책방이음도 그 차례를 맞았습니다. 그럼에도 책 이야기꽃을 피우며 기뻐하는 세상을 만드는 꿈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와 여러분이 함께 꾼다면.

  • 조진석
  • 필자소개

    조진석은 ‘나와우리’ 대표 겸 ‘책방이음’의 대표이다. 그 외에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 사무국장, 도서정가제 사수를 위한 출판·문화계 공동대책위원회 간사, 종로문화재단 서점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으며 서울도서관 서점위원회 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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