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지역, 단체, 인물, 사건 등은 모두 실제와 관련이 없지 아니하지만, 필자의 주관적 해석이 더해진 내용으로 특정 지역, 단체, 인물, 사건에 대한 이야기로만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필자 주

주요 등장인물 소개

등장인물 관계도등장인물 관계도

예술가 J: 노송동에 이사 온 예술가 J는 마을 주민들이 키우는 아름다운 화분들에 감탄하다가, ‘각자 혼자만 보는 화분들을 한날한시 골목에 내어놓고 모두 함께 즐겨보자’고 제안하였고 이는 ‘꽃장’이란 프로그램이 되었다. 여성인권 전시 프로젝트인 '리본(Re-born) 프로젝트'를 계기로 지역 여성인권단체와 인연을 맺으며 선미촌의 도시재생 프로젝트에 결합하게 되었고 이후 한 정책사업의 PM을 맡으며 선미촌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다.

여성인권활동가 S: 20대 여성 4명이 사망한 2000년 군산 성매매 집결지 화재 참사 이후 활동가 S는 전북지역 여성활동단체를 이끌며 반성매매운동의 중심에 섰고, 반성매매 전국 네트워크 구축과 성매매방지법 제정에 기여하였다. 선미촌의 완전한 폐쇄를 사명으로 삼고 활동하고 있다.

마을주민 C: 권투선수를 은퇴하고 선미촌에서 화원을 운영하고 있다. 마을공동체 활동에 관심이 높다. 기존 마을공동체의 리더 그룹이 공공사업의 문법에 물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잠시 거리를 두었지만, 선미촌 프로젝트와 인연을 맺으면서 마을공동체의 대표를 맡았다. 예술가 J에게 ‘너희가 다른 팀들처럼 사업 끝났다고 우리를 버리고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끝까지 예술가가 남아있을 수 있는 마을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행정 : 한옥마을의 성공 경험을 토대로 대기업을 통한 전면적 재개발이나 강제 일시 폐쇄 대신 선미촌의 ‘문화를 통한 점진적인 변화’를 선언하고 꾸준히 실행하고 있다.

정책 : 도시재생, 뉴딜, 도시활력, 문화적 도시재생, 예술촌 등으로 조금씩 이름을 바꿔가며 선미촌을 꾸준히 찾아와 구성원들의 삶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자본 : 선미촌의 사람들은 물론, 다른 지역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여 선미촌을 휘젓고 있다. 정책과 유사하게 여러 개의 가면을 활용하는데 선미촌에는 주로 ‘부동산’과 ‘보상’이라는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부동산업자 G : 선미촌에 도시재생사업이 결정되던 날, 시청에 전화해 사실 여부와 방향을 확인하고, 다음날 “도시재생”, “예술촌”을 크게 써 붙인 기획부동산을 선미촌에 개업하였다.

성매매업주 K: 선미촌에서 30년 동안 업소를 운영하였으며 선미촌 업주들의 사실상 리더 역할을 해왔다. 성매매 알선으로 2차례 복역하면서도 업종 변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지만, 최근 선미촌의 변화에 업소를 닫고 업종 변경을 고심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 1 – 선미촌의 기적

선미촌은 전주시 완산구 서노송동에 위치한 성매매 집결지의 명칭이다. 노송동 일대는 전주의 대표적인 구도심 지역이다. 고도의 구도심에 위치한 성매매 집결지. 누가 봐도 도시재생 사업하기 딱 좋은 지역이다. 그 때문인지 도시재생 초기부터 도시재생 테스트 베드(test bed), 도시활력 증진, 도시재생 뉴딜, 문화적 도시재생, 예술촌 조성 등 현존하는 거의 모든 관련 사업이 이곳을 거쳐 갔다.

사업에 관계된 각 주체들도 남달랐다.

행정은 (보기 드물게) 쉽고 빠른 결과 대신 점진적 변화의 과정을 선택하였고, (더욱 놀랍게) 이를 장기간 지속해오고 있다. 집결지 안에 위치한 공가들을 꾸준히 매입하여 7개의 거점을 마련하였고, 이를 현장시청, 예술가의 독립서점, 마을박물관, 시민정원, 새활용센터, 커먼즈 필드, 돌봄공간 등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여성활동가그룹은 선명한 철학과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집결지 폐쇄와 피해 여성들의 행복을 위해 노력했다. 선거 때마다 후보자들에게 선미촌 문제에 대한 생각을 꾸준히 물어왔고 이는 관련 조례 제정은 물론 현재 행정 방향성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선미촌 걷기’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의 관심을 높여나가는 한편 상담, 법률지원, 의료지원, 재교육 및 취업 연계를 통해 피해여성들을 도왔다.

지역주민들은 낙후된 구도심, 성매매 집결지로 인한 불편을 오랫동안 피부로 느껴왔기 때문에 지역 문제에 대한 높은 관심과 변화에 대한 강한 욕망을 공유하고 있다. 물론 사업 초기에는 다른 공공사업처럼 라OOO클럽이나 로OO클럽 출신과 같은 협의체 전문 주민들의 참여 비중이 높았지만, 사업이 점진적이었기 때문인지 점차 지역의 문제를 오래 고민해온 진짜 주민들이 주도해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예술가들이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예술가 J를 중심으로, 자신이 나고 자란 지역에서 활동을 꿈꾸었지만 기회를 찾지 못했던 청년 예술가들이 적극적으로 결합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방법론을 이식하려 하지 않고 마을 안에 이미 존재하던 주민들의 삶을 천천히 관찰하고 귀 기울이며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갔다. 공가가 많아서 주민들이 조금씩 밭을 꾸려오던 공간들을 마을 텃밭으로 함께 가꾸고, 그곳에서 자란 식물을 가공해서 판매하는 방법을 함께 공부했다. 공공이 거리에 설치했다 폐기하는 화분에서 마리골드를 수거해 꽃차를 만들고, 주민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던 야시장을 다시 열어 손수 키운 작물들을 함께 팔았다. 집결지에서 야시장을 연다는 것은 업주는 물론 업주들을 관리하는 지역 ‘조직’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소품 하나하나에까지 선미촌과 도시재생의 의미를 고민해 꾹꾹 눌러 담았다.

선미촌 야시장 전경 선미촌 야시장 전경
선미촌 야시장 전경

또, 예술가들은 집결지 한가운데 독립서점을 열고, 지갑을 털어 책을 채우고, 프로그램들을 기획해 운영하며 시민과 예술가들이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이러한 피와 땀은 기적을 만들었다.

85개가 넘던 업소의 숫자가 15개까지 줄었다. 성매매 업소에서 종사하는 여성의 숫자보다 여성인권단체 활동가 숫자가 많아졌다. 집결지 업소를 방문하는 사람보다 도시재생 사례 견학 인파가 많아졌다. 변화는 변화를 불렀다. 성매매 업소를 운영하던 업주가 문을 닫고 김밥집을 열었다. 예술가들과 주민들의 신뢰관계는 인디마을관리협동조합으로 결실을 맺었다. 인디마을관리협동조합은 예술가와 주민이 함께 만든 100% 민간조직으로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와 같은 중간 조직의 도움 없이 만들어졌다.

지금까지의 이야기 2 – 기적의 그늘

하지만 현실은 늘 잔인하다. 도시재생 사업이 결정되고 선미촌에 가장 먼저 생긴 변화는 기획부동산의 출현이었다. 전주시가 매입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평당 부동산 가격이 다섯 배가 올랐다. 부동산 정보를 다루는 방송 프로그램에 선미촌이 최고의 투자지역으로 소개되었다.

등장인물 관계도선미촌에 등장한 기획부동산
*사진제공: 주성진

건물이 빠르게 외지인들에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건물을 활용할 생각이 ‘1도’ 없었기 때문에 불이 켜지지 않는 건물이 늘어갔다. 성매매 업소도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업주가 결단을 내리고 닫은 가게들을 인천이나 원주 등 최근에 폐쇄되고 보상이 이루어진 집결지의 선수들이 공격적으로 매수했다. 최근 3년 사이 선미촌 업소 60%이상의 주인이 이들로 바뀌었다.

나름의 결심으로 가게를 닫고 직접 업종전환을 결정한 업주들이 예술가들과 마주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평생 살아온 데서 뭘 한다는데, 왜 아무도 우리에겐 여태 이야기도 안 해주고, 우리 생각은 한번 묻지도 않아?’라며 속내를 어렵게 드러내고, ‘우리가 뭘 해야 할까?’ 용기 내어 물었지만 그들은 아직 행정을 마주할 수 없었다. 반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인권단체의 입장에서는 어제까지 악이었던 그들과 마주할 수 없었음은 물론, 그들에게 어떤 종류의 공적 지원이 이루어지는 것에도 찬성할 수 없었다. 업종전환을 희망하는 업주들은 점점 더 어두워지는 거리에서 무슨 장사를 할 수 있을지 고민이 점점 깊어져 가고 있다.

몇 년 전 만들어진 제도들은 유통기간이 지나기 시작했다. 피해여성의 전환을 돕는 프로그램들은 현실의 전환으로 연결되지 못하기 시작했고, 그들을 돕는 지원금 규모는 이제 최소 임금에도 못 미치게 되었다. 선미촌의 규모가 줄어든 반면 인근 집결지인 선화촌은 규모가 날로 커져 업주 전국조직인 한터전국연합회 지부 중 전국에서 여섯 번째로 많은 회비를 납입하는 지역이 되었다.

젊은 예술가들은 무기력해지기 시작했다. 책방을 거점으로 마을의 빈칸을 채워나갈 수 있을 것이라 꿈꿨던 청년 예술가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빈칸의 구획이 얼마나 확고한지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집결지 여성들과의 소통은 허락되지 않았다. 새로 결합하는 작가들은 성범죄 예방 교육을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했다. 할 수 있는 이야기도 할 수 있는 일도, 의욕도 줄어갔지만, 해야 하는 이야기는 늘어갔다. 전국 팔도에서 사례탐방을 오는 팀은 날마다 늘어났고, 언제부터인지 행정은 예고도 없이 찾아와 인터뷰를 요구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이 활동하는 예술촌은 인권예술촌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들이 걷는 길은 여행길(여성이 행복한 길)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인권예술촌은 민중미술을 중심으로 채워져 나가야한다는 결정이 났다. 주변에 그들이 알지 못하는 예술작품이 설치되기 시작했고, 그 작품들은 그들이 꿈꾸는 예술과는 많이 달랐다. 하지만 아무도 선미촌이 자랑하는 청년작가들에게 그에 대해 의견을 물어본 사람은 없었다.

희망 예고편 – 점진적 변화의 지속을 위한 실험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누구의 잘못일까? 진짜 문제는 딱히 잘못한 사람도, 잘못된 일도 없다는 것이다. 마을의 변화를 꿈꾸는 주민도, 더 재미난 세상을 만들고 싶은 예술가도, 자신이 믿는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활동가도, 구도심을 활성화시키겠다는 정책이나 행정도, 심지어 좋은 재료를 찾아 돈을 벌려고 한 부동산 업자도 이 모든 문제의 책임을 전가할 만한 잘못은 없다. 하지만 잘못되었다. 이대로는 점진적인 변화가 계속될 수 없다. 선미촌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 소위 선진지라 불리는 대부분의 도시재생 지역에는 이렇게 애써 주목하는 기적과 애써 외면하는 기적의 그늘이 공존한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플러스알파는 무엇일까? 가보지 않은 길은 무엇일까? 답은 결국 문제로부터 찾아야 한다. 도시재생은 물론 도시와 관련된 많은 프로젝트가 현재 당면한 문제의 핵심은 분업과 자본이라 생각한다.

칸을 나누고 각자 영역에서 나눠진 역할을 완수해 다시 합치는 방식은 한계가 있다. 칸을 나누어 다스리는 ‘자치’는 권한의 부여 ‘분권’이 따라야 완성된다. 그리고 그 권한은 칸을 넘을 수 있어야 한다. FC바르셀로나의 제로톱(zero-top, 정해진 위치에 구애받지 않고 움직이는 축구 공격수를 부르는 말)과 같은 역할을 넘나드는 플레이어가 있어야 하고 그 플레이어에게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

(쓸데없이 공간을 차지한 것 처럼 보였던) 글머리의 등장인물 관계도를 다시 한 번 보아주시기 바란다. 나눠진 역할을 연결할 수 있는 플레이어가 보일 것이다. 많은 현장에서 이 위치엔 예술가가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각 칸을 연결할 수 있는, 칸을 오갈 수 있는, 예술가가 예술가적인 방식으로 일할 수 있는 충분한 권한이 주어진 경우가 얼마나 있었을까? 예술감독도 좋고 선미촌 문화특별보좌관도 좋다. 물론 직함이 아닌 다른 방식도 가능할 것이다. 무엇이든 예술가들이 가장 잘 활동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역할을 원 없이 할 수 있게 하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 자치분권이 귀에 익숙해진지 오래다. 자치의 사례는 이제 제법 눈에 보인다. 하지만 자치에 분권이 더해진 사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독재의 트라우마 때문일까?

자본과 욕망도 공공사업에서 더 이상 술자리에서만 탓할 대상이 아니라 생각한다. 자본과 욕망을 공공사업에 활용하는 실험도 가능하지 않을까? 작년 인천 연수에서 목격한 일이다. 한 지역에 야외 대형 상업 지역이 조성되었다. 나름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운하를 낀 상업지역 이었는데, 개장 후 인근에 대형 쇼핑몰들이 들어서면서 상권이 급격히 죽어버렸다. 공실들이 날로 늘어갔다. 문제는 이 상업공간의 몰락이 인접한 대단지 아파트 가격 하락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이때 지자체에서 이 상업공간을 중심으로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고, 이 상업공간이 활성화 되면 다시 아파트 가격이 상승할 것을 기대한 아파트 주민자치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물론 아파트 가격 상승에 대한 기대 – 주민자치회의 적극적인 참여 – 프로젝트의 성공을 단선적인 인과관계로 연결할 수 없다. 하지만 영향이 있었다. 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 가격이 오르기를 기대하며 지역의 문화예술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은 나쁜 일이기만 할까?

도시 관련 공공사업에서 습관처럼 존재를 인정해온 칸막이를 부정하는 시도, 습관처럼 존재를 부정해온 자본과 욕망을 인정하는 실험이 현재 도시재생과 도시 관련 사업들을 가로막고 서 있는 문을 열 열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선미촌을, 또 다른 선진지를 찾는 분들께 전하고 싶다. 사례는 함께 이야기 나눈다고 쉽게 복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한계는 함께 이야기 나누고 연대하면 더 쉽게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서로 무엇을 이루었는지 만 묻지 말고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묻어보면 어떨까? 공동의 문제를 찾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행동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다른 도시보다 먼저 사업에 선정되는 것보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하지 않는가?

요원하던 선미촌의 완전한 전환이 코로나19로 업소를 찾는 방문자가 줄어 갑자기 가능해질지 모른다는 소식이 들린다. 재앙이 가져다 준 희망이랄까... 선미촌 프로젝트의 점진적인 변화가 계속되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 주성진
  • 필자소개

    주성진은 (주)메타기획컨설팅에서 8년간 배우고 일하며 조직을 덜 고상하게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후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명칭을 고민하다가, 용역으로 가득한 프로필을 보며 스스로를 <문화용역 주성진>으로 칭하였다. 모든 것에 쉽게 중독되며 특히 맛있는 것과 즐거운 것에 광적으로 집착하여 도파민 분비 체계의 이상이 의심된다. 최근에는 다수의 문화기획 교육과정에 관여하며 멘토를 사칭하고 청년들에게 문화기획을 배우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여전히 매년 20%씩 일을 줄여 50살에 은퇴하고 탁구로 전국을 제패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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