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리 최실장이 햇볕과 바람을 닮은 펌을 하고 카페에 들어선다. 마스크에 가려 표정의 절반은 보이지 않는다. 화장기 없는 눈매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하나의 세계가 마주 앉는다. 얼마 전까지 유구리 최실장은 ‘창작그룹 비기자’로 활동했지만, 작년부터 조금씩 떠날 준비를 하더니 올해 초 비대면 해단식을 갖고 시골로 거처를 옮겼다. 문화예술교육 판에서 나름의 목소리를 갖고 있던 단체가 사라졌다. 아니 헤어졌다. 그들은 왜 떠났을까. 어디로 갔을까. 비기자의 행보를 멈추게 한 요인들은 무엇일까. 그리고 다른 이름으로 나타난 최실장은 누군가. 계속해서 비기자를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부재의 고통이 뒤따르고, 개명한 최실장에게는 궁금증이 유발된다.

모든 단체들이 이름을 갖고 있지만, 불리는 이름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활동의 메시지와 영향력이 뒤따라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재 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하기 위해서 견고함을 구축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애써 지은 집을 허물어 버렸다. 비기자는 튼튼한 성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젠가 블록을 쌓아 왔고, 지금은 빼내는 과정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는 비기자가 비추는 밝은 면만 봐왔는지도 모르겠다. 달의 뒷면은 곰보자국들로 가득하다. 그것은 지구로 떨어지는 수많은 소행성들과 우주 쓰레기들의 충돌이 만들어낸 상처들인데, 달은 지구와 공전/자전 주기가 같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깨끗한 달의 앞면만 보고 있는 것처럼 그동안 비기자의 뒷면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달의 뒷면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달 궤도선의 눈이 보내준 시선 때문이다. 오늘의 인터뷰는 공주시 유구읍 유구리까지 다가가진 못했지만, 달의 크기와 밝기로 날짜를 유추하듯이 최실장의 주위를 돌며 탐사 임무를 수행해본다.

‘창작그룹 비기자’에서 ‘유구리 최실장’으로의 이동은 우선 대표에서 실장으로 직함이 추락했다. 그리고 개념적으로는 그룹에서 개인으로, 연대에서 독립으로, 끈끈함에서 끈기로, 실천에서 탐색으로, 아스팔트에서 흙으로, 빡빡함에서 느슨함으로 자리 옮김 한 상태다. 이주와 해단을 결심한 계기를 듣고 싶다.

‘유구리 최실장’이라고 소개를 하면 다들 웃는다. 나도 웃는다. 이곳 집값이 이렇게 싸다며 친구에게 링크를 보내주곤 했는데, 그 친구가 “너는 정말 유구리 최실장이다.”라고 농담하더라. 그래서 그냥 큰 의미 부여 없이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대표님이란 호칭이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고, 너무 선두에 나서서 뭘 하기보단 현장 사람과 소통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것이 나의 역할인 것 같다.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인데 공주로 온 후 학교나 일상생활에서 훨씬 안정감과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 한동안 이런 것들을 외면하며 지낸 것은 아닐까 싶었다. 예술 신(scene)에서의 의미나 전략보다는 삶을 살아가는 개인의 판단이 더 중요해졌다. 이전에는 누군가의 부인이자 아이 엄마, 단체의 대표라는 여러 역할들이 있었고, 그것들을 잘 해내고 싶었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은 너무 잘하려 애쓴다는 얘기도 했었다. 비기자의 멤버였던 남편은 이제 그만해보자고 적극적으로 말해준 케이스다. 그만두자는 말을 먼저 꺼낸 건 내가 아니었다. 그러나 결정을 내려야 하는 대표 입장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했다. 처음엔, 잘 되는데, 이제야 잘 되고 있는데, 기회도 많아졌는데 왜 그러나 싶기도 해서 그들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말을 먼저 꺼내준 것이 고맙다. 그때 해산한 것이 가장 잘한 선택인 것 같다. 이 신(scene)에서 살아남는다는 방향성보다는 개개인이 살아나가기 위해서 잘했다는 말이다. 그 부분이 단체 운영과는 다른 측면이 있다. 그 당시 비기자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멤버가 다섯 명 정도였는데, 나의 얘기에 그 누구도 ‘왜 그만하나’, ‘더 키워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쉬고, 다른 걸 해보자는 말들을 해줬다. 고마웠다. 그런 관계로 남았다는 게 그동안 잘해온 결과인 듯하다.

이 바닥 일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남에게 필요한 일로 에너지를 써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곳저곳의 제안과 요구를 들어주다 보면 활동 지형이 넓어지고 역할도 커지면서 점점 잘 굴러가는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 단체 내부에서는 내적 충족감이 차오르지 않고 마모되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우리의 활동에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으며, 지금 이렇게 가도 괜찮은 건가 하는 질문을 비기자 멤버들 각자가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단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쉽게 이뤄진 것처럼 들린다. 외부에서 볼 때는 비기자가 오래 유지되고, 지속됐으면 하는 아쉬움과 과감한 결단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반반이다.

재밌는 것이 친한 친구나 멤버들, 사람 대 사람으로 마음 써주는 사람들은 해단한다고 했을 때 ‘좋다’, ‘재밌겠다’라며 응원해줬다. 그런데 일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아쉽다’, ‘왜 그만하는 것이냐’ 묻는다. 잘 아는 사람들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해주는 이들도 있었다. 창작그룹이라 ‘폐업’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봤지만, 일과 비즈니스로 본 사람들은 되레 비기자를 그만둔 단체, 폐업한 곳 아니냐고 물어봐서 좀 흥미로웠다.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으로 해단식을 했지만, 원래는 ‘인디아트홀 공’에 작년 초 해단식 기획서를 보냈다. 그쪽에서 먼저 대관료 없이 한 달 동안 하고 싶은 거 하라고 얘기해주셔서 준비하는 데 힘이 되었다. 기댈 곳이 사방에 있구나 싶었다. 기획서를 14년째 써왔고 다른 이들의 기획서를 멘토링 하기도 했었는데, 해단식 기획서는 30분 만에 단박에 써졌다. 처음으로 ‘잘 썼다’는 생각이 스스로 드는 기획서였다.
해단식 과정 중에는 공공성에 대한 공감도가 높았던 것 같다. ‘천천히 안녕’이란 말로 시간을 두고 조금씩 정리해가는 과정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동안 많은 기사들이 잘 된 사례들을 중심으로 다루면서 단체 내에서는 어떤 문제들이 발생하는지, 그 과정에서 개인은 무엇을 겪는지, 자기 언어가 있는지 등의 이야기는 잘 하지 않았다. 그걸 비기자 해단을 통해서 공표하는 것은 재미있는 작업이기도 했지만, 공공성 차원에서 경험을 나누는 의미도 있었다.
SNS에 비기자 해단에 관한 포스팅을 해나가자, 오히려 몇몇 문화기획 활동가분들이 해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솔직한 이야기를 만나서 듣고 싶어 하더라. 살아남는지 아닌지 보다 사업 기회는 많아지고 잘 굴러가는데 이게 맞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몇 분과는 연락이 닿아서 두어 시간씩 이야기하기도 했다. 사실 나는 안정성을 추구하는 불안 가득한 사람인지라 (비기자로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오래, 계속 갖고 싶었다. 될 대로 되라 하는 자세보단 일단은 최선을 다하고 쉬는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했는데, 근래엔 달리기만 한 것 같았다. 아무튼, 스스로는 솔직해지고 나니 편안해졌다. 많은 단체들에게 맞는 각자의 시기와 필요들이 있을 것이고 그게 작동되는 순간을 외면하지 않는 게 필요하다. 언어가 너무 거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간적으로 건강하게 살기 위한 판단이었고 실행을 해본 것뿐이다.

해단식까지 마무리한 지금, 오늘의 언어로 비기자의 활동을 반추해보자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초창기에는 하고 싶은 걸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어떻게 읽힐지 고민하지 않고 하던 시기다. 나는 읽어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장치들을 마련한다. 사실 관심 없는 사람에게 관심 갖게 하는, 그 과정 자체가 거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말을 못하는 사람, 표현이 서툰 사람, 지식을 갖지 않은 사람, 문화예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 등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했는데, 이렇게 정책 용어와 달리 대상을 풀어서 표현하면 스펙트럼이 넓어진다. 그러면 사회가 구분해 놓은 선들이 겹치면서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관계의 가능성들이 보인다.
대표로서 더 추구했던 건 단체를 안정화하는 일이었다.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기회를 늘 찾았는데 한편으로는, 그건 스스로 내려놓지 않으면 아무도 해줄 수 없는 일이다. 제도나 정책, 멘토가 필요하다고들 하지만 어떤 순간엔 그 누구도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고 스스로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한편, 제도가 오히려 성찰의 기회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많은 제도들이 사업 실행에 맞춰져 있을 뿐이고 성과 외에 동료와의 사이는 어땠나, 자연을 파괴하진 않았나, 사업은 성과가 있었으나 실제 진심으로 소통한 것 같은 관객은 왜 만나지 못했을까 이런 질문을 할 자리는 아예 없다. 어떤 유형, 어떤 형태의 성과를 만들어야 하는지가 정해져 있고 이제는 나도 알겠다. 아는 이상 이건 이제 재미없는 게임과 같아졌달까. 다만, 누군가는 실천하고 고민하고 있음을, 신호처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방법이 없는데? 잘 지내는 것 같은데?’가 아니라 ‘그게 아니라서 해체하려 한다, 아직도 모르는 게 있어, 이런저런 것들을 잘 모르겠어’, 이런 류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다. 성과주의 때문이다. 예술 활동은 정확하거나 적절한 방안을 내놓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적어도 나는 그렇게 지내보고 있다. 활동을 지속하려면 그런 삶을 살고 있어야 한다. 계속 질문하려면 나만의 기운을 유지해야 하고, 약간 외곽으로도 빠지면서, 몸을 움직이고 있어야 한다. 그게 가장 어렵지만 재미있는 지점이다. 비기자는 해단하지만 삶은 다른 질문 안에서 지속되고 있다.

폐교에 큰 보드게임을 만들었던 폐교에 큰 보드게임을 만들었던
2010년 가창현장미술제 <파종> 작업
예술장돌뱅이 팀과 함께 개발한 예술장돌뱅이 팀과 함께 개발한
2013-2020년 <예술장돌뱅이>
2016년 전시&퍼포먼스 <Very Very Important Pududuk> 2016년 전시&퍼포먼스 2018년 놀이전시 <다다다방> 2018년 놀이전시 <다다다방>)
창작그룹 비기자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들

비기자의 활동 전반에 대한 아카이빙은 스스로 정리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무조건 공유하고 싶었다. 언어든 비언어든 현장의 활동은 쉽게 휘발된다. 차분히 정리만 해도 그다음 고민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단체 활동에 대한 아카이빙은 특별하거나 세부적인 것이 아니었다. 해봤는데 어땠다, 무엇을 해봤다 정도의 차원을 정리했던 것이다. 활동 영역이 콘텐츠 저작권으로 치부되는 것도 의아한 현상이다. 카피가 될 수 없다는 자신감도 있다. 동일한 상황도, 동일한 사람이나 태도도 아니기에.

‘유구리 최실장’ 인스타그램 계정을 보면 나다움을 드러내는 게 보다 자유로워 보인다. 삶의 리듬과 속도가 달라지다 보니 사유의 관점도 달라진 듯싶다. 이전 생활과 비교하면 어떤가. 삶과 일의 문제를 개인의 서사로 말해주면 훨씬 와닿을 것 같다.

오토바이로 동네를 다니는데, 그 뒷자리에서 보이는 범위도 도시와 다르다. 산골을 휘저으며 다니고 골짜기나 천변을 따라가면 길이 없을 것 같은 곳인데도 계속 갈 수 있다. 차가 없으니 평균속도란 게 없다. 가다가 멈춰서 사진도 찍고 커브도 마음대로 돈다. 삶의 방식도 그런 게 아닐까. 우리한텐 이게 너무 편안한데 누구나 그렇진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해산은 우리를, 우리 삶의 방식을, 개개인을 지켜내는 방식이었다. 주변과 동일한 속도와 페이스로 갔다면 정신적으로 힘든 때가 왔을 것 이다. ‘내일도 모르는데 왜 이렇게 불안할까, 다 낭떠러지는 아닐 텐데’라는 생각도 했었다. 성북문화재단의 〈나 좋자고 해봤니〉프로그램과 서울문화재단의 〈멈추니까 보이는 것들〉 라운드테이블 등을 함께 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비기자와 달라졌으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도 한데, 그 안에서 편안하고 나를 지켜낼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다. 해산과 이주만으로 달라진 것도 아니다. 프로페셔널하지 않은 것 같고, 너무 개인적이거나 게을러진 것 같기도 하지만, 문화예술 영역에선 자기다움을 지키는 것에도 의미가 있다. 우물 안 개구리가 가질 불안은 더 커질 수도 있지만, 멀리 떨어져 나왔기에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많다.
한동안은 흔들리는 듯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열심히 한 것들도 있는데, 이제는 안 되는 것에 관한 이야기도 필요한 것 같다. 잘한 것만 이야기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누군가는 "선영아, 난 네가 흔들려서 좋아"라고 하더라. 그래, 흔들리는 게 보여도 좋지. 흔들리는 걸 알고, 외부에 발언하는 것도 너무나 필요한 일이다. 단체 지속을 위한 지원제도보다 흔들리고 약해도 괜찮다는 응원과 연대의 정책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마치 기회가 많을 것처럼 홍보하며 모호한 상을 두고는 단체를 만들어라, 운영 구조를 갖춰라 하는 게 희망고문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것이 현장에게는 더 잔인할 수 있다. 제도가 다 해줬으면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실천하고 발언해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잠시 유구리 이야기로 수다 꽃을 피웠다. 배달 어플이 소용없는 곳이기 때문에 먹고살려면 오일장 리듬에 맞춰 장을 봐야 하고, 미용실에 갔더니 본인 빼고 모두가 아는 사이라는 지역사회의 특성과, 초등학생 때 이후로 4월의 연두색을 새롭게 보게되는 것 같다는 둥, 남편은 산불감시원에도 지원해보려 했다는 등등 최실장은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만들고 있다 했다) 듣다 보니 어째 의무감을 내려놓고 도망간 게 아니라, “나 잡아봐라~” 하고 유혹하는 유구리 놀이처럼 느껴진다. 불편하고 비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세계의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실장은 의도적으로 길을 잃어버리는 산책을 한다. 그럼에도 길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지 않고 즐긴다. 원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구분할 줄 알게 된 것 같다. 자신의 재미가 어떠한 사회적 의미를 갖는지 순간순간 질문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녀는 지금 낯선 곳으로 모험을 떠난 항해자처럼 보고 듣고 생각하고 보여주며 말을 걸고 있다. 여기 유구리에 베이스캠프를 쳤으니 놀러 오라고.

미팅이 3시간 정도 지나자 최실장이 조급해한다. 다시 유구리로 내려가 엄마 노릇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강아지들도 기다린단다. 봉식이, 복많이, 봉우리, 귀봉이. 최실장을 끌어당기는 강력한 힘들이다. 인터뷰어는 더 붙잡아 둘 명분이 없지만, 막상 떠나보내려니 덜컥 부족하단 생각에 사로잡혀 갑자기 조급해진다. 최실장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있지만, 얼마나 본모습을 찾아냈을까. 궤도선 흉내를 내며 뱅글뱅글 돌았지만, 착륙선이 아니기에 최실장이 머무는 세계를 탐사하지는 못했다. 그곳은 시청각으로 볼 수 없는 촉감의 세계로, 만져볼 수 있는 살아 있는 세계다. 웹진 독자들은 한 가지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 제목에서 왜 ‘달’을 지칭했는지를. 유구리의 삶은 제도와 기관이 요구하는 삶보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위한 ‘한 걸음’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닐 암스트롱의 발자국만큼이나 꾸욱 누른 각인효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체스의 나이트처럼 본질을 향해 도약한 최실장은 삶의 맥락을 바꿔 다른 세계를 열었다. 내가 나로서 꽃피기 위해서. 이것이 달빛이 아니면 뭐겠는가.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최실장의 삶에 대한 인력이 커져서 문화예술교육이란 바다가 출렁거렸으면 좋겠다. 인터뷰를 마친다. 아마도 이 글을 확인하는 최실장은 오글거린다며 온몸을 배배 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훗.

  • 최선영
  • 필자소개

    임상빈은 임체스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할 정도로 체스마니아다. 본업은 미술 작가인데, 문화예술교육이라는 밥벌이 때문에 게으른 전시 활동을 하고 있다. 일상에서의 체스는 생각도구이면서 동시에 하루를 진단하는 성찰도구처럼 쓰인다. 작업에서는 체스말의 상징과 행마법으로 개인의 미적 취향과 행동 패턴을 읽어보려는 점꾀 작업을 하고 있으며, 체스의 예절과 이름들을 상상한 책 『귀띔 체스』를 펴냈다. 그 외 교육예술연구팀 ‘잔꾀’로 활동하며 ‘개똥수거 캠페인’, ‘닭에서 알까지’, ‘프로메테우스 변신술’, ‘이글이글 스토브’ 등의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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