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코로나19가 우리와 이렇게 오랜 기간 함께 사는 것이 현실이 될지는 처음에 잘 인지할 수 없었다. 특정 부분 사람들에게 미래는 예측하기 귀찮은 일이 되기도 한다. 애써 미루어 놓거나 모르는 척 방치하는, 혹은 두려움에 외면하는, 나만 아니면 되는 일처럼 말이다. 하지만 코로나는 우리와 함께 삶의 행간에 혹은 자간에 띄어쓰기처럼 존재하게 되었고, 일상의 한 문장에도 여러 번 두리번거리며 안녕 때문에 띄어 써야 하는 거리 두기의 현실이 되었다. 처음에 그 간격은 산문(散文)적 문법의 간격이었다가 이제는 그 간격의 거리가 더듬더듬 예측하기 어려운 시(詩)의 간격이 된다. 사람 사이의 간격처럼, 문화적 감각의 간격을 더듬거려야 하는 지금을 살아 내는 데에는 결국 문화적 삶의 감각이 필요하다. 우리가 익숙했던 보통의 속도감과 거리감, 안정감은 이제는 오히려 위험한 감각이 되기도 한다. 대신 우리가 미련하거나 쓸모없고 보통의 질서에 반(反)하는 감각, 사회적 컨센서스(consensus)를 탈주하는 이른바 예술적 감각이 코로나와 함께 사는 데 필요한 조력적 감각이 되기도 한다. 작금의 현실이 그러하니 얄밉게도 평생 예술가로 살아온 필자의 삶은 그럭저럭 코로나와 살아가는 것이 살만하다. IMF 때도 그랬고, 금융위기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집 1: 예술가 창작 관점에서의 변화

집이 집이자 회사, 쇼핑센터, 학교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위드(with) 코로나’적 삶에서 집이라는 공간의 중요성은 배가(倍加) 된다. 여기서 신기한 사실은 필자의 삶처럼 살았던 예술가의 삶에서 집은 진작 그런 공간이었다는 것이다. 최근 필자가 만난 예술가 몇의 고백은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삶이 다르지 않다고 했고, 그 중심에 집이 있음을 이야기했다. 이른바 집순이 집돌이, 오타쿠적 예술가들의 삶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 변화가 없고, 그들의 삶을 보편적인 사람들의 삶에 견주어 일반화할 수 없을지라도 위드 코로나의 삶에서 그들의 불편 없는 삶의 중심에 집이 있고, 오타쿠의 취미가 있으며 그것이 예술이 되었건 취미가 되었건 삶을 지탱하는 흥미로운 요소가 된다면 난 그들의 이 편협한 삶을 감히 문화적 삶이라 지칭하고 싶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는 사실은 이 사회의 주인이 되는 것이며 결국 이 편협하고 개별적인 문화적 삶이 모여 문화 다양성을 이룬다. (최근 정책적으로 다루고 있는 문화 다양성은 사회적 약자에 초점을 맞추어, 여성이나 이주민, 장애인이나 노인, 청소년 등의 카테고리로 정책이 집중하고 있는 측면에서 문화를 복지적으로 도구화하고 있어서 반갑지 않다)


무용가 박수진 ‘space몸’의 ‘100일 프로젝트’ 과정 기록
출처: 서울을 바꾸는 예술 블로그

박수진이라는 무용가는 오랜 시간 안무를 만들고, 동료들과,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춘다. 사실 춤을 춘다기 보다는 모두 자신의 몸에 집중하고 동작에 집중하면서 몸을 움직이는 일들을 홀로 하거나 함께 하는 것인데, 옆에서 보면 이를 문화예술교육이라고 불러도 좋고 공동체적 춤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그런 것이다. 그런 그가 최근 몇 년 동안 춤을 춘 공간은 조명과 객석이 있는 무대가 아니라 집이다. 그녀에게 춤은 밖을 의식하기 이전에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대가 내 삶의 전부였었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출산과 육아로 삶의 환경이 달라지면서 마을 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당연히 춤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나는 그저 정해진 수순처럼 춤을 추고 작품을 만들고 공연하기에 바빴다. 삶은 뒷전이었다. 그리고 예술은 거대하고 고고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추어왔던 춤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옆 사람을 위로해주지도 못했다. 이후 삶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고, 나의 작업들은 그것에 대한 탐구과정이 되었다. 기존에 갖고 있었던 당연하다고 생각되던 배치들을 바꾸고 실험하는 과정에서 나의 작업들은 몸에 대한 중심은 있으나 여러 작업의 형태 띠게 되었다. 예술이 사람들과 만나기 위한 무대가 아닌 다른 곳을 탐구하기 위해 <집에서 추는 춤,집 시리즈>, 꼭 공연자와 관객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닌 사람과 사람! <삶의 창조성을 위한 100일의 워크숍>, 몸에 대한 다른 생각 <동의보감, 동양의 몸과 예술>이라는 작업의 결과로 나타났다.”

- 무용가 박수진의 말


그녀는 집에서 춤을 춘다. 그녀와 그녀의 동료들은 각자 집에서 춤을 추고 각자 몸의 소리를 듣고 그것에 응답한다. 그들의 몸짓은 삶에 밀착되어, 삶과 무관하지 않고 때로는 오감을 넘어서는 육감적 탐색으로 집 안과 나, 내 주변인의 삶과의 관계 속에서 성찰되며 움직인다. 사실 큰 무대나 공연장에서의 춤도 이와 다를 바를 없을 것이다. 모든 춤은, 춤꾼은 자신의 삶과 우주관 안에서 탐색과 사고의 과정에서 춤을 길어올 것이다. 춤(꾼)에 있어 자신의 삶과 연동된 몸의 반응과 움직임이란 지난하고 통렬한 삶의 실천과 성찰의 과정이며, 그 목적이 누구보다도 자신을 삶을 향하고 있다는 지점에서 중요하다. 때문에 집 안에서의 모든 미시적 탐색과 사고, 이에 대한 반응의 호명에 응답하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화예술교육이라는 말을 뒷전으로 물리고 탐색과 성찰 실천에 먼저 주목할 일이다.


“예술은 사람들에게 자기만의 고유한 색깔을 찾게 하는 힘이 있다. 무용, 음악, 미술은 예술의 도구일 뿐 그것이 예술의 전부는 아니다. 그래서 예술은 그것을 체험한다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술적 본질은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깨닫게 되는 과정이다. 그것이 예술이 가진 고유한 힘이다. 우리 사회에 스스로를 화두로 삼아 탐구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스스로의 색깔을 찾아가는 과정은 예술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최근 몇 년간의 고민으로 나의 예술관이 바뀌었다. 예술가는 스스로의 삶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예술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삶의 현장이 무대이고, 살아가면서 만났고 만나게 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관객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 속으로 한 발 더 다가가려고 한다. 내가 해왔던, 앞으로 해나갈 모든 작업들은 삶을 위한 예술로 박차고 나가기 위함이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술은 그 무엇보다도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나오는 작품이 예술이고 세상에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면서 오직 예술작품으로만 드러나는 것을 나는 원하지 않는다. 예술 자체보다 예술적인 삶에 주목해야 한다. 예술가란 타이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내며, 그것을 드러내놓을 수 있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술과 삶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다. 예술가야말로 삶에 대한 애착이 가장 큰 사람들이다. 끝없이 살아있음을 느끼려고 하고, 그래서 안주할 수 없다. 너무 많은 호기심으로 계속 주변을 살피거나, 모두 다 식상하다고 느끼는 것에서 계속 즐거움을 찾아낸다.”

- 무용가 박수진의 말


삶의 현장이 무대이고 살아가면서 만났고 만나게 될 사람들이 관객이 되는 박수진에게 누구에게나 자신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그것은 예술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박수진의 말을 ‘자신의 삶을 아름답고 주체적으로 살아내는 시민력을 갖은 시민이 되기 위해 우리는 계속 주변을 탐색하고 모두 다 식상하다고 느끼는 것에서 계속 즐거움을 찾아봐야 한다’로 해석해서 이해한다. 그것은 춤을 추거나 그림을 그리고 연극을 하거나 곡을 연주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삶에 이미 존재한다. 우리가 가진 삶 안에서, 조금 더 미시적이고 예민한 탐색과 성찰이 인지되는 그 순간이, 이른바 문화예술교육의 영역 안에서 ‘미적 경험’이라는 것의 통로를 여는 바로 그 순간이 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때문에 위드 코로나의 삶 안에서 집안을 보고 듣고 만지며 말을 건네 보고 그 대답에 응답해 볼 필요는 충분하다.

박수진의 말을 듣고 그녀의 활동을 지켜보며 예술가의 삶을 훔쳐본 누군가가 몸이 달아서,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예술적, 문화적 삶이며 타자에게 교육적인 삶으로 비워지는 것이라고 오버하면서 설레발을 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예술은 캠페인이나 프로파간다가 아니다. 그저 묵묵한 실천에 있다. 하필 이런 고루한 생각에서 박수진과 내 생각이 잠시 교차했었고 이내 자기 길로 사라졌지만, 언젠가 그녀의 이런 삶을 어디선가 살짝 떠들고 싶었다.

집 2: 문화예술 향유자 관점에서의 변화

박임자 씨(필자와 다사리 문화 기획학교에서 만난 생태적 치유 전문가, 생태문화 기획자, 산림 치유학 박사)의 어머니는 건강이 악화해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에서 기적적으로 회복되어, 그 이후로 집에서 치료와 요양을 하게 된다. 체력이 저하되고 식욕도 없이 삶을 연명하는 어머님께 우연히 건넨 새의 모이가 박임자 씨와 어머니의 삶을 뒤바뀌게 한다. 사실 놀라울 정도의 수사(修辭)가 필요한 삶의 전환이지만 그저 묵묵하게 그녀와 그녀의 어머님의 삶을 조금 소개하는 것이 오히려 이분들에게는 예의가 되는 것 같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2016년부터 아파트에 거주하며 주변 텃밭에서 채소를 기르면서 텃밭일기를 쓰던 경험이 있다. 나이 든 어머님의 삶에 우연히 건넨 텃밭일기가 어머님의 병원일기로 지속되었다. 그까짓 것이 무슨 삶에 도움이 되겠냐던 핀잔이 어느새 삶의 중요한 루틴이 되고, 퇴원 이후 새에게 모이를 주면서 새를 그리는 이른바 ‘탐조생활’로 진화하게 된다. 베란다에 몇 알 올려놓았던 모이를 새가 와서 먹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노모가 계속해서 모이를 주게 되고, 아파트에 그렇게 많은 새가 서식하고 있다는 지점을 경이롭게 생각하게 되면서 모이 먹는 새를 기록하며 그림까지 그리게 된다. 약 50여 종의 새가 아파트 주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던 박임자 씨의 가족들은 17층 아파트와 2층 아파트의 베란다에서 각각 새의 모이를 주고 새를 탐색하는 ‘탐조생활’을 즐기게 된다.

여기서 어머님의 그림 솜씨에 관해 설명하자면, 매우 오랜 시간을 탐색하면서 사실에 기반하여 오차가 없이 기록하는 리얼리즘적 미학이 특징적이다. 그리는 속도감이야 오랜 병원 생활에 지친 환자의 속도감이지만, 이것이 오히려 미학적 차별성과 개별적 매력으로 작동해 서툴지만 꼼꼼한 밀도감을 형성하며 진정성을 읽게 한다. 그림을 그리고 그날의 단상에 대해 적어 놓은 글들도 일품이다. 칠곡 할머니의 도시적 버전에 일러스트를 입힌 일종의 생태화 에세이 같은 이 글과 그림은 벌써 몇 번의 전시를 개최하였고, 도시의 생태적 환경과 이를 마주하고 성찰하는 도시민의 편견을 해체하게 된다. 박임자 씨의 어머님은 이제 좀 더 적극적으로 망원경을 들고 아파트의 새를 탐색하고 그린다. 그리고 박임자 씨는 아파트가 주변의 동물들과 새, 곤충들에게 생태적 섭생지가 될 수 있도록 아파트의 식수들을 조사하고 바꾸는 일을 하기 위해 작년 아파트 동대표 선출에 나가 당선된다. 예술이란 삶의 신념을 미시적으로 꾸준하게 실천함으로써 진정성 있는 목소리를 얻는 정치적 행위일 수 있다. 탐조는 박임자 씨와 그녀의 어머니에게 단순하게 소일거리를 얻고 행복감을 얻어, 체력과 건강을 회복하는 삶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게 했을 뿐 아니라, 도시와 마을의 생태성을 위해 일상에서 실천하고 노력하는 시민력의 근육을 만들었다.


박임자씨 어머니의 꾀꼬리 그리기(좌) 및 처음으로 그렸던 곤줄박이 새(우)

대한민국 도시의 대다수 사람들은 아파트에 산다. 아파트에 살면서 나의 아파트 단지에 어떤 나무가 있고 어떤 새가 살고 있는지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아마 누군가 “우리 아파트에 몇 종류의 새가 사는지 알아?”라는 질문을 이웃에게 던진다면 매우 한가한 사람이나, 그냥 생태 환경에 관심이 있는 사람처럼 취급받을 것이다. 더욱이 베란다에서 새의 모이를 주는 행위는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기행으로 다루어질 소재거리가 될 것이다. 이제 내 집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과 접속한다는 것, 불확실성의 자연과 접속한다는 것은 그만큼 낯설고 부담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다. 대신 생태 교육을 위해 숲에 가서 숲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탐색 키트 안에 들어 있는 돋보기로 곤충과 풀을 관찰하고 역시 키트 안의 장갑을 끼고 나무와 돌, 흙의 질감을 배운다. 모두가 똑같은 속도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똑같은 꽃의 향기를 맡는다. 때문에 우리의 아이들에게 생태는 실천이 되지 못하고 전체화된 정보가 되고, 원데이 클래스로 만들어 온 화분처럼 이쁘게 가꾸어야 하는 팬시한 상품이 되고 만다.

집 3: 문화예술교육 사업의 변화

3년 전부터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함께 ‘예술가의 가방’이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예술꽃 씨앗학교’를 통해 파일럿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계속 부족한 부분을 수정하고 다듬는 중이다. 수십 년을 문화예술교육 영역에서 일해 왔지만,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새롭게 만들고 그 가치를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의 프로그램은 그대로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여러 번 적용하기가 불가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늘 변화무쌍한 ‘예술’의 그 고유성과 매우 닮았다. 그런 이유로 교육의 ‘보급’이나 ‘확산’을 목적으로 하는 공공기관의 목적성과 별개로 나는 늘 작업을 하는 작가의 입장으로 프로그램에 접근하니, 어쩌면 나와 공공기관 사이에는 이를 매개하는 다른 미디엄이 필요할지도 모르고, 돌아보면 늘 그 미디엄의 역할을 누군가 대신해주었던 것 같다.


"정성스러운 질문에 걱정과 우려가 느껴지지만, 예술가 멘토의 입장에서 변론을 할까 합니다. 멘토의 역할이 추가된다기보다는 참여자의 능동성이 더 요구되는 상황으로 바뀐 것이 비대면입니다. 어른들(교사, 부모, 예술가멘토)의 이끎과 안내 그리고 간섭 없이 아이들 스스로 얼마나 독립적이며 자율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보는 것이 예술가방 입니다. 비대면은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론적 실험이며 대면의 관성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 정도입니다. 지금은 문화와 예술과 교육을 잊지 않도록, 더 후퇴하지 않도록 붙잡아 두는 것도 힘든 시기입니다. 이런 와중에 ‘인스턴트 이벤트 선물꾸러미’를 갖고 성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욕심이고 판타지입니다. (우리나라는 어른의 욕심 때문에 교육이 망가진 나라입니다.) 성공이 아니라 어떻게 실패하는지 그 면면을 보려고 하십시오. 거기에 비대면 교육실험이 짚어야할 출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술가방은 진단의 과정을 설계할 뿐이지 섣불리 백신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비대면 예술교육이 아이들에게 그리고 교사들에게 어떤 증상을 낳고 오염된 사유(예술을 빙자한)로 이상행동을 이끄는지 유심히 지켜봐야 합니다.
만약 친절한 설명 요구가 매뉴얼과 키트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어지는 텍스트를 읽고, 그렇지 않다면 읽지 마십시오. 기분이 상할 수 있어 주의 드립니다. 쉽게 잘 따라 해서 뭔가 이뤄낸 것 같은, 그것은 예술이 아닙니다. 교육도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 때우기용 문화산업에 지나지 않는 장삿속으로 아이들을 소비자 또는 이용자로 만드는 파렴치한 일입니다. 경제 논리를 예술과 교육이란 이름으로 포장하려 하지 마십시오. 예술가와 교육가에게 이런 요구는 하지 마십시오."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진행한 ‘예술가방’의 교육 철학과 신념에 대한 L작가의 변


코로나는 ‘예술가의 가방’을 ‘예술가의 택배’로 변화시켰다. 예술가가 예술가의 관점으로 선택한 예술가의 오브제를 학교와 집으로 보내고, 택배를 받은 선생님과 학생들이 받은 당황함이 스스로의 탐색과 행위로 이어지는 순간을 기다리며, 이후 친절한 안내와 쉬운 키트가 되어 주지 못했던 ‘예술택배’의 경험들을 가지고 다음 행보를 또 진행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우리는 예측가능성의 ‘키트’가 주는 비창의성을 싫어했다. 오히려 키트를 부수고 버리고 맘대로 방치하는 위법과 위반의 상상력과 실천력을 기다렸다. 개별적 탐색만이 가능한 성찰과 실천은 이런 용기로 만들어진다.


"비대면은 친절해야 한다는 명제는 근거가 부족한 논리입니다. 기술과학의 한계와 맹점을 태도로 감추려고 만든 일종의 알리바이 같은 것입니다. 예술교육은 고고학처럼 찾는 영역이지 제품설명회 같은 무대가 아닙니다. 예술가방의 오브제와 가이드는 한 편의 시로 다가가는 것이지 에세이집을 건네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오브제와 발문은 상상력을 촉발하기 위한 준비운동 도구이며, 행동지침서로만 작동됩니다. 매우 무책임해 보이겠지만, 예술가들은 아이들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전부입니다. 뭔가 잘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우리의 현재를 보여주는 거울이 될 것입니다. 뻔히 아는 상태를 눈 가리고 아웅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예술이 아닙니다. 교육도 아닙니다."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진행한 ‘예술가방’의 교육 철학과 신념에 대한 L작가의 변


"비대면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인 ‘예술가방’은 ‘바비칸 박스’의 개념과 실행방식을 원용으로 하면서 ‘궁금함’의 철학과 수행력을 비대면 버전으로 번역한 프로그램이다. 읽기에 따라 혹은 감각적 사유에 따라 ‘예술가 방’이 되면서 ‘예술 가방’이 되는 중의적, 다층적 함의가 되있다.‘예술가방’은 자신의 방이 ‘예술가 박스 – 궁금함’이 되는 방식으로 설계된다. 자신의 방과 집, 동네로 확장되는 관찰과 탐색, 상상과 사유, 용기 있는 실행, 실수와 보완을 교육 참여자 스스로가 모두 해결해야 하는 모험의 여정이다.‘예술가방’은 동시대 예술가들이 작업을 하기 전에 어떻게 관찰하고 탐색하며, 어떤 경로로 작업에 접근하고 수행하는지를 직접 경험해보는 프로그램이다. 때문에 동시대 예술가들의 상징 체계와 수사적 표현, 사물과 풍경을 다루고 해체하고 조립하는 방식, 예술과 삶에 대한 질문과 답을 찾아가도록 설계되었다."

-'예술가방'을 설계한 필자의 변 중에서



예술가방 택배 설계도(좌) 및 택배상자 안의 사물들(우)

택배 안의 사물들을 꺼내기 위해서, 이른바 '언박싱(unboxing)'을 하기 위한 프로세스의 전 단계에서는 촉각적으로만 사물을 탐색한 후 어렵게 그 사물을 꺼낼 수 있는 일종의 룰이 존재했다. 물론 반칙이 성행했지만, '예술가방 택배'에 대한 사전 워크숍과 그 사용법의 예술적 가치에 대해 경험한 교사들은 그 개별적이고 촉각적 관찰이 선행되어야 하는 탐색 방식을 학생들이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모든 사물의 탐색은 학생들이 자기 방과 집안 사물의 탐색, 기억으로 연동되는 발문을 마주하게 된다. 위드 코로나는 비로소 자기 방의 사물을, 집의 사물을 보게 한다. 침대 밑을 보게 하고, 창문 틈 사이에 부는 바람의 향을 보게 하고, 방 모서리 햇볕의 따스함과 맛을 보게 한다. 이불 밑의 내 체온을 보게 하고, 그 적당하게 뽀송뽀송한 습도를 보게 한다. 어쩌면 언제나 존재하던 이 모든 것을 새삼스럽게 보고 느끼게 하는 것이 '예술가방 택배'의 목적이 되었다.


예술가방에 입장하기 전 다져야 할 마음의 준비
우리는 이제 가능성과 편리함의 문으로만 열려있던 통로를 닫고, 보이지 않는 세계의 통로로 들어서야 한다. 이 통로는 마음으로 드나드는 창의적 선택의 통로이기 때문에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의 통로가 될 수 있고, 때로는 고통과 반성으로 성찰의 계기를 만드는 성장의 통로 바뀔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사랑처럼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이유 없는 통로로 작동하기 때문에 예술가방을 마주하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라! 그리고 움직여라!


예술가방 5계명

1. 머릿속에 있는 예술을 지워라
2. 가치판단을 멈춰라!
3. 실수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4. 쓸모없는 일에 주목하라!
5. 즐겨라!

‘예술가방’ 가이드북에 기재된 안내문(위)과 5계명(아래)


사전에 배달된 택배를 열기 전에 '예술가방 택배'의 가이드북에는 이런 설명문이 붙어 있다. 일종의 '예술가방 택배' 행동 강령 같은 이 메시지들은 학교의 문화예술교육이 가진 전체화의 관성을 경계하고 성과에 대한 해석 자체를 해체하는 목적이 숨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동시대의 예술에 대한 불확정적이고 비선형의 논리를 숨겨 놓았다. ‘예술가방’은 너무나 쉽고 한없이 어려운 우리들의 삶에 연루된 예술과 교육이자, 교육이면서 예술이고, 삶이다. '예술가방 택배' 프로젝트에 처음부터 참여했던 K작가의 경우 충북의 부용초등학교에서 예술가 멘토로 참여하면서 다음과 같은 피드백을 남긴다.


우선 저랑 만나기 전에 웜업(warm up) 활동으로 예술가방이 담겨있던 택배 박스를 분해해서
아이들과 함께 교실에 큰 설치물을 세웠어요. 계획을 잡고 만든것은 아니고 만들다 보니
엄청 거대한 콜로세움 같은 형태로 만들어졌고 이것은 예술꽃 씨앗학교 수업하는 내내 있었습니다.

또 다른 웜업 활동으로는 경험과 상상을 결합하거나 따로 생각해보는 시간으로
나뭇잎 -: 각자가 직접 경험한 색
똥 -: 미래 내가 아이를 갖는다면 그 아이의 똥의 색깔? (경험+상상)
소행성 -: 상상의 색
이런 식으로 개인의 경험과 상상이 합쳐지거나 분리하는 연습을 했고요.

일지를 다시 보면서 재미있었던 것은

1. 선생님이 직접 톱을 들거나 톱질을 도와주면서 평소라면 절대 잘라보지 않았을 사물들을 잘라본 것
(사진에 보면 돌을 자르고 있는 장면도 있습니다. 많은 선생님들이 톱을 아예 제외하거나
사용하는 데 소극적인 반면, 여기에서는 매우 적극적으로 사용함)

2. 아이들이 박스에서 촉각으로 사물을 관찰해서 맞추기를 할 때 사물의 형태를
자신의 신체로 비유하여 설명하는 것:
ex) 이건 내 새끼 손가락만 하고~

3. 굉장히 평소 활동에 소극적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평소에는 거의 한 자리에서
안 움직인대요..
근데 저희 활동 중에 피곤한 사물을 편안한 장소에 두어 달라는 미션을 받으니까
교실 한 쪽 끝에서 다른 한 쪽 끝까지 움직인 것. 이걸 ○○쌤이 짚어내 주시더라고요.

4. 개인적 상징을 설명하면서 "의자"를 예시로 들었는데, 보통 의자라고 하면 앉아서 쉬는 것(기능) 이지만,
선생님에게는 아이들이 의자 위에 올라가서 놀다가 다치는 경우가 많아서 본인에게 의자는 공포 라는 인식이 있다고 하셨어요.


부용초등학교 선생님과 K작가는 '예술가방 택배'를 위해 사전 워크숍부터 이 택배의 순기능과 역기능, 또 불확정한 가능성들을 미리 탐색하면서 좋은 파트너로서의 긴장감을 유지했고 결과적으로는 위와 같은 피드백을 만들었다. 설계자가 보기에 좋은 결과적 피드백이지만, 과연 아이들에게 이 택배가 사고한 관계적 사물과 풍경을 탐색하고, 사유하고, 해체하고, 재조립하면서 개인적 사회적 컨텍스트를 만들고 이해하는 미적 통로가 되어 주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에필로그

위의 사례에서 다룬 ‘집’들은 사실 특별한 집이 아니다. 나의 집이나 친구의 집, 혹은 누구의 집이어도 무방한 집이다. 그 집들의 공통점은 딱히 특징이 없고 차별점이 없다는 지점이다. 그 집에는 예술가가 살거나 시민이 살거나, 아이들이 산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자신의 삶을 문화적으로, 예술적으로 살아내는 누군가가 살고 있다는 지점이다. 코로나는 이 평범한 집에 사는 특별한 삶을 호명하였다. 늘 한결 같이 예전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묵묵하게 살아내는 삶의 특별함이 오늘 문화예술교육의 새삼스러운 귀감이 된다는 지점이 시사하는 바가 많다. 어쩌면 우리는 문화예술교육을 미술관이나 박물관, 공연장 같은 어떤 특별한 곳에서 누릴 수 있는 혜택으로, 또는 예술가나 예술 강사가 있어야만 가능한 교육이라는 편견을 두고 일반화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또 여러 명이 모여서 선한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공유하는 속에서, 공동체성을 배우고 사회화의 과정으로 성장된다고 믿고 있었는지 모른다. 또 정해진 교안과 매뉴얼과 안전망 속에서 좋은 교육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위 사례에서 언급된 ‘집’들은 교실이고, 무대이고, 야생이고, 흔들리는 운동장이다. 결국 나의 생각으로는 누구에게나 우아하고 권위적인 예술의 위계감보다는 용기있는 문화적 삶이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또 누구에게는 관찰과 탐색, 성찰과 실천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삶이 예술이라는 격려가 필요하다. 또 아이들에게는 장난감이 없어도 장난을 칠 수 있는, 놀이기구가 없어도 놀 수 있는, 선생님이 없어도 배울 수 있는, 위험함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는, 스스로의 주체적 '앎'이 만들어지는 '언러닝(unlearning)' 과정의 허무맹랑한 위대함을 선물해야 한다. 그리고는 조금 더 문명을 덜어내고 야생의 생태로 되돌아가면서, 비로소 ‘나의 방’과 ‘집’을 보게 하자.


  • 김월식
  • 필자소개

    김월식은 고도의 압축 성장을 통하여 대한민국의 산업화 과정을 함께한 커뮤니티의 전체주의적 목적성을 경계하며, 발전과 성장의 동력이자 조력자로서의 개인의 가치에 주목하는 작업을 해왔다. 2010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에서 예술보다 창의적이고 독립적인 삶에서 발생되는 의미들을 존중하며 이를 공유하고 나누는 컬렉티브 그룹 ‘무늬만커뮤니티’를 결성해서 활동 중이다. 그 외 2011년 생활문화재생레지던시 '인계시장프로젝트', 2012년 중증 장애인과의 협업극 ‘총체적난 극’, 2014년 동시대 아시아 예술가들의 커뮤니티에 대한 연구 'cafe in asia'와 2016년 시흥시의 ‘모두를 위한 대안적 질문 A3레지던시’를 기획하였으며, 2020년에는 국제 문화예술교육 혁신실천가 대회인 ITAC5에서 언러닝(unlearning)을 주제로 기조발제 하였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광역문화재단의 다양한 문화예술교육 사업을 기획,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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