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창업의 현주소: ‘대창업시대’는 지속되고 있을까?

2015년 가을, 필자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설립한 콘텐츠코리아랩(CKL)에서 아이디어 융합공방 프로그램의 ‘프로그램 디렉터’로 일하고 있었다. 문체부 최초의 본격적인 창업 지원 프로그램에 2년 가량을 관여하면서 갖게 된 생각과 신념, 소회 등을 당시 격월로 발간되었던 한국콘텐츠진흥원의 『K'Content』에 게재한 적이 있다.‘‘대창업시대’의 콘텐츠 스타트업’이라는 글이었는데, 여기서 ‘대창업시대’는 당시 아이디어 융합공방 최고의 멘토라 할 수 있었던 배인식 대표(곰플레이어 개발자)와의 대화 과정에서 도출된 개념이었다. 대학로의 1센터에 이어, 전국 광역에 콘텐츠 창업 프로그램을 장착한 CKL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었고, 문화체육관광부는 문화창조융합벨트라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2016년에는『예술분야 비즈니스 모델 분석을 통한 스타트업 지원 방안 연구』(한국문화관광연구원)를 진행하였는데, 이 과정을 통해 대창업시대에 대한, 특히 콘텐츠 스타트업과 예술 스타트업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은 더욱 깊어졌다.

시간이 꽤 흐른 현재, 이러한 흐름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1년 지원사업 설명회’ 자료집에 따르면, 콘텐츠진흥원의 스타트업 관련 사업은 기업육성팀에서 진행하고 있으며, 2021년 사업 예산은 아래 표와 같이 255억 원 가량으로 편성되어 있다. 아이디어 융합팩토리, 창업발전소, 창업도약 프로그램, 창업 재도전, 액셀러레이터 사업 등 창업주기별로 매우 촘촘하게 지원 프로그램이 설계되어 있다. 처음 관련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던 2014년, 2015년을 떠올려보면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다.

‘퍼스트 무버’라 할 수 있는 콘텐츠진흥원의 사업 확장에 더하여,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예술 스타트업 전문 지원 프로그램이 자리를 잡게 된 것도 괄목한 만한 변화이다. 센터의 ‘2021년 지원사업 설명회 자료’에 따르면, 예술창업과 관련한 사업은 예술경제지원본부에서 전담하고 있으며, ‘예술기업 공모전’ 트랙에서 창업과정-초기기업-성장기업 지원 프로그램이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회적경제’ 트랙에서도 창업과정-초기기업-성장·성숙기 기업 등을 구분하여 맞춤형 지원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최근에 이루어진 이러한 창업지원 정책의 체계화는 국내에서 콘텐츠와 예술을 아우르는 문화 창업 지원 태세가 완성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는 정책 현장에서 스타트업 지원 비중이 점점 더 커지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물론 IT를 필두로 한 전통적인 기술창업에 비하면 여전히 지원 예산이 적고 민간 투자자 유치도 쉽지 않지만, 문화 분야에서의 ‘대창업시대’는 이제야말로 본격적으로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점이라 하겠다.

2021년 한국콘텐츠진흥원 기업육성팀 사업 예산
2021년 한국콘텐츠진흥원 기업육성팀 사업 예산
출처: 2021 한국콘텐츠진흥원 지원사업 설명회 자료집

4차 산업혁명과 코로나19,
그리고 디지털 컨버전스라는 예술계의 화두

스타트업이 성공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창조적인 ‘아이디어’(Idea)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그것은 스타트업 성공의 조건이 아니라, 스타트업 시작의 조건이다. 보다 전문적인 관점을 갖춘 이들은 ‘비즈니스 모델’(Business Model)을 꼽는다. 그렇다. 독특한 가치제안에서 시작해서, 타겟 마켓과 고객관계 등에 대한 시장 전략, 자원의 수급과 활용을 위한 공급 전략, 수익과 비용을 합리화하는 재정 전략 등 네 개의 범주로 구분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철저하게 구축하지 않고서는 성공하기가 어렵다. 이에 더하여 함께 파도를 헤치며 나아갈 ‘팀의 구성’(Team Building), 비즈니스 모델을 바탕으로 한 피칭과 ‘투자 유치’(Fundraising)도 빼놓을 수 없는 조건이다.

허나 이들은 매우 중요한 조건이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조건은 아니다. 여러 유니콘기업을 키워낸 액셀러레이터들이 입을 모으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바로 ‘타이밍(Timing)’이다. 거대한 이슈, 즉 메가트랜드가 몰려올 경우 그 파도에 올라타느냐, 아니면 이를 거스를 것이냐는 앞서의 모든 조건을 무력화시켜버릴 수도 있는 매우 강력한 선택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현재 창업 생태계를 좌우하는 메가트랜드로 4차 산업혁명과 코로나 사태를 꼽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라는 범용기술(General Purpose Technology)로 무장한 4차 산업혁명은 단순히 기술 혁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플랫폼 비즈니스의 편재화를 추동하며 초연결성, 초개인화, 협업창작, 혼합현실 등의 새로운 문법을 확산하고 있다. 최근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고 있는 ‘메타버스(Meta-verse)’는 이와 같은 흐름에서 게임 체인저(Game Changer) 역할을 할 것으로 예측 받고 있는 기술이자 플랫폼이다.

한편 코로나 사태는 지난 두 해 동안 온 국민에게 비대면 소통방식 학습과 실습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집적화·도시화·세계화라는 오랫동안 도전 받지 않던 신화들에 균열을 내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이웃·지역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어났으며,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시작된 멈춤과 반성이 새로운 삶의 양식에 대한 고민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모양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술 창작을 통해 삶을 영위하기 어려웠던 예술가·단체들의 삶이 더욱 팍팍해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 과정에서 긴급지원이라는 명목으로 여러 가지 사업들이 제안되고, 예술인 복지 시스템의 개선도 일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대응으로 충분한 것일까? 비대면 소통, 비대면 경제의 일상화로 4차 산업혁명을 껑충 앞당긴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코로나 사태에 대한 예술계의 대응은 보다 공세적으로 모색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 지점에서 필자는 ‘디지털 컨버전스’라는 화두를 꺼내고자 한다. 비대면 전시, 공연 영상화 등의 사업이 작년부터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기 때문에, 이 ‘타이밍’을 잘 활용하여 창업 준비를 해야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2000년대 이후, 지난 20여 년간 이루어진 콘텐츠산업의 ‘디지털 컨버전스’ 흐름을 살펴보면, 예술계가 그간 간과해왔던 디지털 생태계 조성이 앞으로 필수적인 생존 전략은 물론 지속적인 가치 창출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래 그림은 우리나라 음악·영화·드라마 시장의 디지털 생태계 구축 과정을 정리한 것이다. 세 시장은 공통적으로 마켓 디스오더(Market disorder) – 갈등 및 시장 위기 – 트러블 슈터(Trouble Shooter)의 등장 – 플랫폼의 영역 확장 – 새로운 시장 형성 –글로벌 시장의 확대로 이어지는 디지털 컨버전스 과정을 겪었다.

음악, 영화, 드라마 시장의 디지털 생태계 구축 과정
음악, 영화, 드라마 시장의 디지털 생태계 구축 과정
출처: 배인식, 정종은 외(2020),『공연·전통예술 온라인 유통 활성화 연구』, 예술경영지원센터, 105~106쪽.

위 사례는 우리나라 예술시장, 가령 공연시장은 P2P나 웹하드 서비스 등으로 인한 ‘시장 교란’보다는 ‘시장의 무관심’에 시달려온 측면이 크다는 점에서 직접적으로 참고할 사례는 아니라고 지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사례가 있다. 웹툰·웹소설·웹드라마의 디지털 생태계 형성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아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아웃사이드 크리에이터(Outside creator)의 등장 – 새로운 시장의 니즈(Needs) – 트러블 슈터(Trouble Shooter)의 등장 – 다양한 플랫폼과 창작자 집단의 등장 – 스타 창작자의 대거 등장 – 글로벌 시장의 확대로 이어지는 디지털 컨버전스 과정은 위의 사례와 다소 차이가 있지만, 큰 방향은 일맥상통한다.

웹툰, 웹소설, 웹드라마 시장의 디지털 생태계 구축 과정
웹툰, 웹소설, 웹드라마 시장의 디지털 생태계 구축 과정
출처: 배인식, 정종은 외(2020), 『공연·전통예술 온라인 유통 활성화 연구』, 예술경영지원센터, 106쪽.

포스트-코로나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
주목 받는 예술 스타트업의 자세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나라 콘텐츠산업의 국제적 경쟁력은 다소 다른 경로를 거쳐서이기는 하지만, 기존 패러다임이 충족시키지 못하는 수요에 대한 트러블 슈터의 등장, 그들의 서식지로서 플랫폼 경제의 확장, 이를 통한 글로벌 시장 확대라는 흐름을 통해서 확보되어왔다. 좀 더 자세하게 정리해보도록 하자.

첫째, 문화 분야의 디지털 컨버전스는 기존 창작자들이 접근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화 향유자를 끌어들여, 국내 시장을 획기적으로 확대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둘째, 디지털 컨버전스를 통해 시장 규모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혁신적인 창작, 유통, 향유 방식이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하는 계기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셋째, 이러한 혁신 지향 디지털 컨버전스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영향력 있는 플랫폼이 출현하여 다양한 창작자 그룹을 진흥하는 것이 필요하다. 넷째, 디지털 컨버전스는 국가간 영역의 한계를 아주 쉽게 넘어설 수 있기 때문에 문화의 글로벌화를 현실화하는 계기로 활용될 수 있다. 다섯째, 기초예술 분야가 콘텐츠산업 분야와 갖는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은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엄존하는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트러블 슈터가 아직 전면에 등장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여섯째, 이는 시장의 규모나 수익분배 방식 등에서 민간이 나서기 어렵기 때문으로 파악되며, 따라서 먼저 공공 차원에서 트러블 슈터의 역할을 하거나 그러한 플레이어를 집중 육성할 필요가 있다.

포스트-코로나 또는 위드-코로나 시대, 국내 예술 생태계도 더 이상은 ‘디지털 컨버전스’란 메가트랜드를 먼 나라 얘기로만 치부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 예술 스타트업의 꿈을 키우고 있거나 초기 창업자로서 부단히 애쓰고 있는 이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장르의 고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내가 그리고 나의 스타트업이 어떻게 주목 받는 트러블 슈터로 가치 제안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근 미래 가장 성공적인 예술 스타트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는 이들 중에 탄생할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을 필자는 가지고 있다.

예술 스타트업 활성화가 예술 생태계에 가져올 기대 효과

이와 같은 대창업시대,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의 예술 창업 활성화가 가져올 기대 효과는 매우 분명하다. 아래와 같이 다층적인 여섯 가지 효과가 직접적으로 파생될 것으로 전망된다.

예술 스타트업 활성화의 주요 기대 효과
예술 스타트업 활성화의 주요 기대 효과

우선 기초예술과 문화산업 사이에 존재하는 ‘예술산업’의 영토가 굳건해지고 넓어질 것이다. 이는 기초예술의 체질 변화를 견인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며, 동시에 매년 5조 이상씩 성장하고 있는 문화산업·콘텐츠산업과의 C&D(Connect and Development)를 위한 접촉면을 제공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예술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전후방 연관산업의 활성화가 이루어질 것이며, 이러한 국내 시장의 변화는 종국적으로 예술대학의 커리큘럼 개편과 함께 예술분야 해외시장 진출 유형을 다각화하는 결과를 낳을 것으로 기대된다.

전술하였듯이, 예술계의 대창업시대는 이제 겨우 막을 열었을 뿐이다. 예술계의 고질적인 한계점이나 예술에 대한 새로운 니즈에 부응하는 혁신적인 트러블 슈터의 출현·성장·활약을 위해 우리 모두의 관심과 지원을 집중해야 할 때다.

  • 정종은
  • 필자소개

    정종은은 학부에서 미학과 종교학을, 석사과정에서 미학과 미디어경영학을, 박사과정에서는 문화산업 정책을 전공했다. ㈜메타기획컨설팅의 부소장을 역임했고,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서 근무하였으며, 현재는 상지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연구재단 인문학대중화운영위원, 장애인 정책 조정위원, 문화도시 컨설턴트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 정부미술품 운영위원, 문화영향평가 전문위원, 한국예술경영학회 연구기획위원장, 원주 유네스코 창의도시 부위원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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