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P 어울림광장의 야경

헌트 선생의 역사 수업 마지막 시간.
“언뜻 생각하기에 단순한 질문으로 시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역사란 무엇인가, 라고 말이지. 뭐 생각나는 것 있나. 웹스터?”
“역사란 승자들의 거짓말입니다.”
내 대답은 좀 빠르다 싶게 튀어나왔다.
“그래, 안 그래도 자네가 그렇게 말할까봐 걱정을 좀 했는데. 그게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나. 심슨?”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안 반스(Julian Barnes) 저(다산책방, 2012년)

맞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언론과 전문가들은 역시나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하다. 드러내느냐 애써 꾹꾹 참느냐의 차이일 뿐 내놓고 환영하는 이는 찾아보기 어렵다. 장난기 넘치는 친구 녀석들은 영화 <스타트랙> 한 장면을 캡쳐해서는 &ldquo;이렇게 생기지 않았냐?&rdquo; 문자를 보내고, 좋은 구경거리 생겼다고 애써 지하철 중간에서 내려 희한 야릇한 모양새를 더듬어보는 등산복 차림의 아저씨, 아줌마 무리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DDP 활용법을 더듬어 볼 &lsquo;개관특별전&rsquo;

사진_45,133장의 외장패널로 만든 DDP 건물 외관 사진_DDP 안내도

▲45,133장의 외장패널로 만든 DDP 건물 외관(상)과DDP 안내도(하)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이하 &lsquo;DDP&rsquo;)가 2014년 3월 21일 문을 열었다. 정말 뾰족한 수가 없다. 4,800억 원이나 들여 지어버린 이상. 한 해 운영비만 300억 원이라 해도 역시 어쩔 수 없다. 4,800억 원을 들여 지어버린 이상. 밉건 곱건 이제 남은 과제는 어떻게든 잘 써먹는 것이다. 그래서 눈길이 가는 건 개관특별전이다. (DDP의) 활용법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자리라서다.

우선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의 작품을 선보이는《자하 하디드 360&deg;》. 테이블이나 의자처럼 자그마한 소품들이다. 차근차근 하나씩 보노라면, 이런 디자인이 머릿속에 들었으니 건물도 이렇게 지을 수밖에 없겠다 싶다. 한편으론 이것만 봐도 이렇게 지을 게 뻔하다. 왜 이제 와서 건축가 탓을 하나 싶기도 하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DDP가 혁신적이라기보다는 매너리즘적이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든다. &ldquo;의자나 테이블로나 해보던 걸 큰 건축물로 지어볼 기회를 잡았으니 하디드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건축가&rdquo;라는, &lsquo;페이퍼 아키텍트(Paper Architect)&rsquo;로서의 아픈 과거(?)를 쑤셔대는 냉소 어린 반응도 들린다. 과연 창의적이었느냐는 반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나름대로 자기 건축물에 대한 해명 내지 설명으로 간주할 수 있으니 좋다.

다음은 《스포츠디자인전》. 지난 소치 동계올림픽에서도 공기역학을 이용한 최신 장비들이 눈을 끌었듯, 기능과 한데 어우러진 디자인이 볼 만하다. 이 역시 곡선이 강조된 미래 디자인이라는 점에서 DDP와 잘 어울린다 싶다. 그다음부턴 고개가 갸웃거린다. 《울름 디자인과 그 후 : 울름조형대학 1953-1968》과 《엔조마리 디자인전》. 여기서 주로 선보이는 건 2차 대전 이후 유럽의 디자인 가구들이다. 그게 정작 본고장인 유럽에서는 더 이상 화젯거리도 아닐뿐더러, 이웃 일본에서는 1980년대에 한 번 휩쓸고 지나갔던 유행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아주 인기다. 나름의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부분에서 존중받을 만하다. 다만 건물 전체가 너울너울 물결치고 있는 21세기 공간에서 참여와 협동을 중시하는, 가장 경제적인 형태의 간결한 20세기 가구들을 선보인다는 게 참 묘하다. 어떻게 보면 DDP와 자하 하디드 전시를 묘하게 깎아내리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서로 다른 것들을 한데 섞여 더 멋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이자 화룡점정은《간송문화전》. 아마 가장 많은 사람이 몰릴 전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전시 기간이나 물량 면에서나 봄, 가을 1년에 두 차례 벌서듯 줄서서 봐야만 했던 간송문화전 애호가들에게 이런 호사가 어디 있겠는가 싶다. 그럼에도 DDP라는 맥락에 맞물리면 그만 어색해진다. 왠지 그간 쏟아진 귀 따가운 비판에 대한 변명처럼 느껴져서다.


사진_DDP의 개관특별전으로 선보이는 《스포츠디자인전》, 《울름 디자인과 그 후: 울름조형대학 1953-1968》, 《엔조마리 디자인전》, 《간송문화전》(시계방향순서대로)

▲DDP의 개관특별전으로 선보이는 《스포츠디자인전》, 《울름 디자인과 그 후: 울름조형대학 1953-1968》, 《엔조마리 디자인전》, 《간송문화전》(시계방향순서대로)

정체성에 대한 강박이 빚어낸 풍경

여기서 잠깐 다른 얘기 하나. 숭례문 복구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다. 혹자는 &lsquo;숭례문 복구 코미디&rsquo;라고까지 부른다. 이 와중에 소나무 DNA 검사까지 진행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은 그 유별난 우리의 금강송 사랑 때문인데, 재밌는 점은 금강송이 무엇인지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자세한 얘기는 생략하고, 우리만의 고유한 그 무엇이라는 강박이 숭례문 희극을 낳고 있다는 게 대체적 평이다. 이미 파문은 파문대로 충분히 커졌으니, 과연 이 사태를 어떻게 봉합할 것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마찬가지로 간송이 내세우는 &lsquo;眞景(진경)&rsquo;, &lsquo;風俗(풍속)&rsquo;이라는 것도 너무 신화화된 측면이 크다는 지적도 많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물론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충분한 예우와 신화화 사이의 간격은 크다면 크다. DDP에 대한 정체성 논란이 문제시되자 결국 간송이 호출되어 나온 풍경은, 숭례문의 금강송 타령처럼 우리 고유만의 무엇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강박이 빚어낸 우울한 풍경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차라리 이렇게 먼저 치고 나갔으면 어땠을까. 동대문 지역의 역사성이 뭐 그리 대단 하느냐고. 지역의 역사와 패션 문화? 글쎄. 그간 대규모 개발로 인해 서울에서 역사성이란 다 사라졌다더니 웬 또 역사성? 콘크리크 금융상품이라 불리는 아파트 투기 광풍 덕분에 지역 공동체성이란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려운 게 솔직히 우리의 현실이다. 조선의 수도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서울 자체가 그냥 개발의 지뢰밭 아니던가. 건축이란 건축은 에누리 하나 없이 모두 다 무조건 착해야만 하는가? 발칙하고 도발적인 것은 금기인가?

동대문 패션을 두고서도 싸구려 카피 옷을 넘어서 디자인 혁신과 고급화를 이뤄야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다고 늘 진단해왔던 것은 바로 우리 자신 아니었던가? 또 패션과 디자인이란 일종의 잉여, 초과, 과잉 아니던가. 뭔가 철철 흘러넘치는 관능적인 이미지, 그래서 되레 조금은 낭비적인 것 아니었던가. 화려한 패션과 디자인에 능한 사람들을 별세계 외계인이나 파괴의 팜므파탈로 여기는 것은 오래된 관습이 아니던가. 그런 곳의 상징처럼 등장하는 건축이라면 다소 과잉스럽고 관능적이며 에로틱해도 되지 않을까. 미래 첨단 패션과 디자인의 중심이라면, 주변 경관과 동떨어진 무국적(無國籍)적인 몽환적 공간이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아니, 그 무엇보다도 원래 그렇게 지으라고 자하 하디드를 택하지 않았던가. 주변 공간에 녹아드는 것보다는 최첨단의 압도적인 그 무엇을 창출하기 위한 의도를 높이 평가했던 것 아니었던가.



사진_왼)살림1관_Design Lab1_Sanghoon Park/오)알림1관_Art Hall 1_Sanghoon Park

▲살림1관(왼쪽)은 동대문 지역 상권에서 출입이 용이한 위치로 디자인 아트숍이 있으며, 알림1관(오른쪽)은 다목적 런칭패드, 패션쇼, 시사회, 영화&middot;극 제작발표회 등 다양한 런칭 행사가 열리는 공간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Sanghoon Park

이제 손가락질은 그만두자

사진_자하 하디드

▲자하 하디드

배 터지도록 욕 얻어먹을 소리는 이제까지 충분히 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다시 숭례문 얘기 하나. 숭례문 복원 문제를 계기로 온갖 논란들이 쏟아져 나왔을 때 문화재 관계자들이 겉으론 곤혹스러워 보였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되레 반가워했다. 국민감정을 타고 정치적으로 폭발하는 대목에선 곤란할 법했지만, 어쨌든 이렇게 큰 논란이 한번 일어난다는 것은 해당 분야에 대한 관심이 들불처럼 일어난다는 의미라 서다. 평소에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던 문화재였는데, 이번 기회에 전통을 현대적으로 되살려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솔직하고도 현실적으로 논의해볼 자리가 마련되는 것 아닌가 하는 희망을 품은 것이다. 그 희망의 결론은 아직 모르겠다. 희생양 만들기로 끝날 가능성도 높으니 말이다.

그러니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이제 DDP에 대한 손가락질은 그만두자. 그건 정말 DDP를 몰락게 하는 지름길이다. 우리의 과거란 마음에 드는 부분만 받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안 받고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다. 자꾸만 승자의 거짓말을 지적하는 것이 패자의 자기기만에 그쳐서는 안 된다. 전통, 정체성 강박 없이 자유롭게, 그러나 진지하게 얘기해야 한다. DDP는 숙제다. 달갑지 않아도 우리 손에 떨어진.



사진제공_서울디자인재단

필자사진_조태성 필자소개
조태성은 서울신문 사회2부에서 서울시청 담당 기자로 있다. 모퉁이를 돌아서면 새로운 공간과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건축이 좋다고들 하는데 서울시청과 DDP에서 수차례 길을 잃고 헤맨 결과, 그런 멋들어진 말에 시큰둥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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