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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단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
아직 예술 현장에 있는, 또는 심지어 공공 부문에 있다가 현장으로 간 친구는 주저 없이 나를 또는 문화재단 직원들을 “공무원”이라고 말한다. 기획재정부가 지적하는 것처럼 공무원들의 손쉬운 수족으로서, <민법>에 근거하여 ‘난립’되었다가, 최근 문화부의 <지역문화진흥법> 또는 안전행정부의 <지방자치단체 출자·출연 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의 통제를 받아 좀 더 공무원에 가까운 법적 신분상 변화를 이해하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냥 표면적으로 시나 국가 정부의 예산으로 정책 사업을 수행하고 있으니 그렇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그들이 만난 문화재단 직원들(나는 아니기를 바라지만...)의 방식이 공무원스러웠을 가능성이 십중팔구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반면에 공무원들은 문화재단 직원들이 ‘그들과는 다른 정신세계를 가진 민간인’이라고 생각한다. 또 필요할 때는 ‘그들과 달라야만 하는 민간 전문가’라고 부추기며 일을 던진다. 하지만 공무원 윤리 강령의 적용과 공공 기관에 대한 감사를 받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이들도 엄연히 공무원은 아니지만 ‘공무원과 같이 분류되어야 할 공직자’로 취급된다.
하지만, 정작 문화부의 공무원들은 스스로 지역문화진흥법을 만들어서 문화재단들의 법적 위상을 달리 규정했으면서도, 여전히 10% 자부담 민간경상보조금을 받는 예총 또는 민예총과 같은 민간단체로 보는 습성을 못 버리고 있음을, 최근 몇몇 정책 설계와 사업 협의 과정에서 비위 상하면서 절감할 수 있었다.
네 가지 문화재단 인재상
문화재단 인재상에 대한 분석은 지금 맡고 있는 연구나 기관 전략기획 업무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 스스로가 조금 더 돈이 되는(?) 분야에서 문화예술 분야로 넘어와서 어떤 인간으로 살 것인가에 대한 생각의 정리에서 시작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얼마 전에 소천하신 강준혁 선생님의 소중한 족적인 ‘다움아카데미’의 10주년을 기념해 2008년에 출간한 <다움 10년 다음 10년>에서 ‘문화기획자의 길’에 해당하는 부분을 맡아 정리하면서, 지역문화재단과 같은 공공부문 문화예술 기관 종사자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할 인재상을 ‘T자형 현장전문가’, ‘工자형 문화행정가’, ‘王자형 문화정책가’, ‘主자형 문화기획자’로 정리해 보았다. |
1) 王자형 문화정책가가 용어의 뉘앙스로 인해 자칫 독재형 행정가로 오해될 수 있겠으나, 필자는 <工자형 문화행정가> 보다 넓고 다양한 시각과 책임감을 갖춘 공공정책 결정자를 <王자형 문화정책가>로 구분했었다. 반면 이보다 창의적이고 직감에 의존하는 주체적인 기획자를 <主자형 문화기획자>로 분류했으나, 최근 선출직 지방자치단체장들과 같이 지나치게 공적이지 못한 공공 부문 정책결정자들이 많아지는 양상을 보면, 차라리 <王자형 문화정책가>가 낫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
이들은 각각 ‘현장’, ‘조직’, ‘전략’, ‘프로젝트’ 분야에서 오랜 경험과 역량을 축적하여 해당 분야에서 전문가로 인정받게 되는데, 각각의 장점과 보완할 단점을 정리하여 문화재단 인력양성 전략으로 나중에 정리해봤던 것이다. 2008년 첫 집필 당시에는 현장의 감각을 잃어가는 나를 경계하면서 ‘主자형 문화기획자’를 지향하는 마음을 다잡았지만, 최근 문화 행정의 정치화가 심각해지는 상황을 보면서 공공 부문에서 계속 상급 정책결정자로 성장한다면 ‘王자형 문화정책가1)’의 기질을 간직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은가를 고민하고 있다.
현장-제도-주체성 간의 균형을 이루어야 할 인재상 : 하지만 더 경계해야 할 관료화
앞서 언급한 네 가지 유형의 인재상들이 모두 그 정점에 오래 머물면서 그 특성이 지나치면 스스로 퇴화하거나 조직에 해악을 끼치게 된다. 자기 분야만 고집하는 전문가(T)는 그 분야를 벗어나면 제 구실을 못하게 되고, 규정에 근거한 기계적 사고밖에 못하는 행정가(工)는 조직을 경직되게 만드는 관료주의자가 된다. 본인의 이론이 다른 대부분의 사람의 의견인 양 주장하는 정책가(王)는 현실을 호도하여 공공 자원을 낭비하게 하는 테크노크라트(technocrat)가 되며, 조직에 대한 충성심과 공공성을 잃고 프로젝트의 주인 행세를 하는 기획자(主)는 공사 구별을 못하여 조직에 해악을 끼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네 가지 인재상들의 특성 중 특정 영역이 지나치게 결여되어 있으면 하나의 궁극적인 인재상에 도달하기도 어렵게 되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기획자 마인드가 없는 정책가는 단순 행정가로 남을 수밖에 없고, 정책가 마인드가 없는 행정가는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행정 인턴과 같다. 행정의 현실을 모르는 기획자는 현실을 힘들게만 하는 정치 선동가일 뿐이다.
필자는 이와 같이 문화재단(또는 공공 부문 문화인력)들의 균형 있는 역량을 키우기 위한 방편으로 아래와 같은 네 가지 접근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무엇보다도 관료화, 즉 ‘工자형 문화행정가’의 가장 잘못된 상태를 경계하는, 지속적인 자극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가장 강조하고 싶다. 그것은 지역문화재단에 오래 근무하는 직원의 경우 갈수록 필연적으로 관료화되어 단순 행정가로 고착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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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공공 부문에 <主자형 문화기획자>가 절실한 시대
우리나라 문화예술 지형은 공공 부문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그런 상황에서 지역문화재단들의 역할 그리고 거기서 일하는 직원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필자는 그들이 ‘갑’질하는 준공무원으로 남는지, 혹은 전문적인 문화기획자로 남는지가 이 나라 문화예술생태계 전체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이미 김문환 교수가 오래전에 지적했던 것이라고 한다. |
2) 김문환, 1996년, 『문화행정 전문인력 양성방안 연구』, 김용범 외, 한국문화정책개발원, 1997년, pp.20~21에 재인용 |
문화예술에 대한 정부의 역할 증대로 문화예술에 대한 정부 및 공공 지원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지원액이 많아지게 됨에 따라 정부의 예술에 대한 간섭이 증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예술의 창의성과 행정의 효율성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 이를 조화롭게 매개할 전문가의 역할이 중요하게 되었다2)
지역문화재단들이 그동안 지방자치단체들이 수시로 위탁하는 사업들을 쳐내기에 급급했을 뿐, 지역의 문화 인력뿐만 아니라 자기 조직 내 인력들을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성장시키지 못했던 점은 깊이 반성해야 한다. 중앙정부의 지역매칭 사업에 따라 갈수록 확대되는 계약직 인력의 비중, 그리고 당연히 2년 이상 지속되는 국가 시책 업무를 수행하느라 계속 양산되는 무기계약직의 문제는, 원천적으로 제도의 허점, 문화부의 안일한 접근, 그리고 문화재단들의 무기력한 경영 관리 역량이 빚어낸 비극이다. 더 비극적인 것은 그 상황이 개선시키는데 핵심적인 첫 번째, 두 번째 주체는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상황 개선이 절실한 세 번째 주체는 별로 힘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필자가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개최한 문화예술 기획경영 인력양성 심포지엄에서 “문화기획자로서의 야성 회복, 제도에 굴하지 않는 주체성, 융통성·창조성·관용성의 기반이 되는 상상력”을 주장한 것은 사실 배부른 자의 철학 강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최근 심각해지는 젊은 세대들의 경쟁 회피의 방편으로 공무원 되기를 선택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맥락이기는 하지만) 문화예술계 인력의 공공 부문으로의 유입, 문화복지 정책을 통한 문화예술의 공공서비스화, 사회적 가치 보고를 요구하는 소액다건형 창작지원 제도는 조만간 문화예술 부문의 관료화를 심각한 문제로 고민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조직과 제도보다 개인의 힘이 약할 때 관료화는 더 강하고 빠르게 진행된다.
지난 11월 12일부터 14일까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세계도시문화포럼에서 필자가 맡았던 발표에서도 관료화 문제에 대한 우려를 내비쳤는데, 포럼에 참여한 대부분 국가(중국 제외)의 참가자들이 이에 동조하며 깊은 관심을 보였다.
▲ 필자가 세계도시문화포럼 2014년 서밋에서 발표한 내용 중 마지막 슬라이드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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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민사회와 민주주의에 대한 고전으로 통하는 <강한 민주주의 : Strong Democracy>의 저자. 현재 뉴욕시립대 대학원의 자선 및 시민사회 연구센터의 선임 연구학자로 재직 중임. 클린턴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자문가. 2013년에 “If Mayors Ruled the World”을 저술함. |
서밋의 개막식에서 초청 강연자로 나선 벤자민 바버(Benjamin Barber)3)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서로 다른 인종, 종교를 뛰어 넘어 같은 인간임을 인식하게 하는 ‘상상력’이 필요하고, 문화예술 또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발흥하기 때문에 결국 같은 처지라고 얘기했다. 도시는 상상력에 기반 한 문화를 통해 발전하고, 그래서 도시와 문화는 또한 같은 처지라고 결론지었다.
필자는 공공 부문 문화 인력들의 주체적인 상상력을 가로 막는 것이 바로 관료주의라는 제도의 억압이고, 이 관료주의를 뛰어넘는 힘 또한 상상력에서 나온다고 본다. 상상력은 주로 창의력으로만 해석되지만,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의 처지를 헤아리는 오지랖과, 주어진 지시가 없이도 상황을 파악하고 대응하는 융통성과, 선한 목표를 지향하는 동료 인간에 대한 관용성으로도 발현된다. 그리고 그것은 제도와 자본이라는 강한 외적 억압 앞에서 쉽게 위축되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만이 약한 개인이 그 두 억압을 넘어서게 해주는 힘이 되고, 자유로운 인간으로서의 야성을 불러일으켜 준다.
아무리 뛰어난 조직적 인력관리 프로그램으로도 진심으로 사람을 바꿀 수는 없다. 이미 직장에까지 들어온 성인은 타인에 의해 훈육되지 않는다. 스스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내면의 야성을 발휘하여 제도와 외부의 억압, 그리고 맞닥뜨린 한계를(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뛰어넘어야 한다. 그래야만 문화재단에 종사하는 인력도, 문화재단도, 문화예술계도 발전할 수 있다.
*편집자주
이 글은 필자가 2014년 11월 20일(목)에 열린 '예술경영아카데미 LINK <문화예술 기획경영 인력 양성 심포지엄 : 지금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 당장 꿈꿀 수 있는 미래>'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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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해보는 포항공대에서 물리학을, 추계예대 대학원에서 문화정책을 전공하였고, 현재 서울시립대학교에서 도시사회학 박사과정 중이다. 축제극단 무천, 사물놀이 한울림, 한국과학문화재단을 거치며 과학과 예술을 아우르는 문화사업들을 기획했다. 2004년부터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며, 조직 중장기 발전전략 개발, 서울시 창작공간 조성, 4계절 축제제작, 서울연극센터 운영, 예술지원 등 다양한 업무를 두루 거쳤다. 현재 서울문화재단 정책연구팀장을 맡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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