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웹진에 실린 글의 내용은 (재)예술경영지원센터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TEL 02-708-2293 FAX 02-708-2209 E-mail : weekly@gokams.or.kr
대공황과 뮤지컬영화, 그리고 <오클라호마!>
[특집] 경기변동과 예술의 혁신 ②
"투모로우, 투모로우 난 너를 사랑해. 언제나 널 기다려"
뮤지컬 <애니>의 주제곡인 ‘투모로우’의 가사는 경제 대공황에 빠진 1930년대의 암울한 미국에게 한 고아 소녀가 전하는 희망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이다. 사실 이 작품에는 뮤지컬로는 드물게 미합중국의 현직 대통령이 실명으로 등장하는데 그는 바로 루즈벨트 대통령이다.
미국인들은 경제대공황이라는 엄청난 시련을 겪었고 그것을 극복했다. 세월이 흐른 후 그 어려움을 어떤 방법으로 극복했었는지를 밝히는 여러 경제 연구가 뒤따랐지만, <애니>와 <42번가>를 비롯한 경제공황기를 다룬 작품 속에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다. 다만 이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고달플지라도 ‘애니’와 ‘미스터 워벅스’처럼 혹은 ‘페기 소여’와 동료 배우들처럼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산다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행복한 예측만이 있을 뿐이다.
대공황과 보더빌의 몰락
1차 대전 이후 미국은, 하딩-쿨리지-후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보수정권들이 구축한 친기업적 자유방임주의라는 보수적 경제 기조가 유지되는 가운데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1920년대에 정점에 오른 이러한 시장 정책은 경제성장의 과실이 기업가와 일부 부유층에게만 돌아가도록 함으로써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심화시켰다. 기업가들은 기계화를 통한 높은 효율성 덕분에 점점 더 많은 생산이 가능했지만 정작 노동자들은 기계에 밀려 실업자가 되고 구매력은 하락하게 되었다. 겉으로는 나라의 국민소득과 저축도 증가했으나, 구조적으로 가장 기본적인 소비자들이 점점 가난해지는 문제가 발생하면서 자금은 증권과 같은 투기시장으로 몰려들었다. 기업체의 주가가 실질 가치 이상으로 높아지는 거품 현상이 발생하면서 결국 1929년 10월 24일, 이른바 ';블랙 먼데이';라는 최악의 결과가 나타났다.
금융 위기의 진원지인 뉴욕 월가는 오늘날의 브로드웨이 극장가가 형성되기 이전부터 실질적인 미국 공연산업의 핵심 지역이었다. 영국이 뉴암스테르담을 접수하여 도시이름을 뉴욕으로 개명한 후인 1732년, 최초의 상업극장 씨어터 온 낫소(Theatre on Nassau)가 현재의 월가에 문을 열었으며 그 뒤를 이어 1767년에는 영국 셰익스피어 극단이 공연한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를 비롯한 흥행작들이 연이어 상연된 존 스트릿 극장(John Street Theatre)이 개관했다. 또한 1789년에는 파크 극장(Park Theatre)이 개관했는데, 이 극장은 오늘날과 같은 오케스트라 피트, 박스석 등의 구조를 갖춘 최초의 극장으로, 대형극장이라는 이점을 살려 연극은 물론 오페라와 서커스도 공연한 덕분에 다양한 계층의 관객들을 불러 모았다. 뉴욕의 쇼비즈니스 중심지는 도시의 발전 경로를 따라 월가 부근에서 출발, 공연계의 큰손이었던 극장주들이 당시의 기업 친화적인 분위기에 편승해 경쟁적으로 타임스퀘어에 극장을 설립하기 시작한 1920년대 전후를 기점으로 비로소 현재의 위치인 타임스퀘어 42번가 부근에 본격적으로 브로드웨이 극장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경제공황을 목전에 둔 1920년대 중후반, 미국에서는 집집마다 라디오와 영화가 보급되면서 문화생활에 혁명적인 변화가 시작됐는데, 가장 먼저 타격이 예견된 것이 바로 당시 최고의 인기를 모으고 있었던 유명 배우들이 등장하는 보더빌 쇼였다. 보더빌이 성행한 약 50년 동안(1880년대 초-1920년대 말) 무려 총 2만5천명의 배우들이 보더빌 무대에서 일을 하는 등 보더빌은 명실상부한 쇼비즈니스의 중심이었지만, 티켓 가격이 10분의 1에 불과한 무성 영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한 1920년대 중반부터는 눈에 띄게 쇠퇴하게 된다. 결정적으로 알 존슨의 <재즈 싱어>(1927)를 시작으로 화면속의 배우가 노래하고 춤추고 말도 하는 영화(Talkie)가 관객들을 유혹하기 시작하자 보더빌은 되돌릴 수 없는 내리막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영화의 저렴한 입장료가 보더빌의 쇠퇴에 방아쇠가 되긴 했지만 그것이 전부라고는 볼 수 없다. 영화는 그 출발부터 무대 연극을 필름으로 찍는 등 드라마적인 짜임새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에 익숙해진 대중의 기호는 보더빌에도 그에 뒤지지 않을 만치 완결성이 있는 이야기 구조를 요구했다. 보더빌은 우선 급조되는 제작의 특성상, 그 요구에 빠르게 부응할 수 없었다. 또한 1920년대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던 재즈클럽이 문전성시를 이루며 관객 참여형 문화를 확산시키자 보더빌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29년 대공황이라는 직격탄을 맞은 보더빌 제작자들은 하루아침에 미래가 보이지 않는 냉엄한 현실을 목도해야 했다. 공연 횟수를 대폭 줄이고 마치 19세기로 돌아간 듯, 쇼의 내용도 선정적으로 변질되어 갔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 선 줄은 지구상에서 가장 화려한 쇼를 표방했던 <지그필드 폴리스>가 열리는 극장 앞이 아니라, 식량 배급소 앞과 취업 소개소 앞이었다. 대공황 직전인 1928-29년 시즌에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한 프로덕션은 총 264개였다. 공황이 절정에 달했던 1935-36년 시즌에는 그 반밖에 안 되는 138개가 남았고 총 68개 극장 중 24개가 문을 닫았으며, 남은 극장들도 생존을 위해 다수가 영화관으로 업종을 변경했다.
할리우드, 브로드웨이의 피난처가 되다
보더빌은 쇠퇴했지만 그렇다고 쇼비즈니스가 끝장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보더빌이 세상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쇠퇴했지만, 이 시기에 건립된 수많은 극장과 재능 있는 작가들, 배우들의 인프라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쇼비즈니스의 자산이었다. 진 켈리를 비롯한 화니 브라이스, 에델 머먼 등 당시 촉망받는 뮤지컬 배우들은 조지 거슈인, 콜 포터 등의 일류 작곡가들과 함께 일자리를 찾아 할리우드로 몰려들었고, 할리우드 역시 이들을 필요로 했다. MGM으로 대표되는 뮤지컬 영화의 중흥기가 시작된 것이다. MGM사는 원래부터 무성영화를 제작하던 메이저 영화사였는데 <재즈 싱어>의 성공에 크게 자극받아 기존 유행가들의 저작권을 사들이고 발 빠르게 뮤지컬 영화의 판권 계약을 브로드웨이의 작곡가들과 체결하는 등,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며 변화된 상황에 기민하게 대응함으로써 주도권을 잡았다.
당시 브로드웨이의 창작자를 포함한 공연계 종사자들의 75%가 정든 뉴욕을 떠나 할리우드에서 새로운 직장을 찾았다. 할리우드는 브로드웨이 작가, 작곡가들에게 더할 수 없이 소중한 피난처를 제공해주었으며 지속적인 창작 활동이 가능하게 하였다. 대공황은 결과적으로 할리우드 영화의 전성시대를 연 셈이다. 이는 뉴욕발 경제공황이라는 매서운 추위마저도 피해가는 파라다이스를 이끄는 새로운 시대의 서곡과 같았으며 달콤한 환상과 좌절하지 않는다는 소위 ‘미국인의 꿈’을 담은 작품들이 대거 만들어질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이 당시 브로드웨이에서 할리우드로 간 작가들은 곧바로 이어지는 브로드웨이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알란 제이-프리데릭 러너 콤비, 로렌스 하트-리처드 로저스 콤비, 어빙 벌린, 콜 포터 등이 맹활약을 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수많은 뮤지컬 영화들은 상처받은 대중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1932년에 제작된 영화 <42번가>(뮤지컬 42번가의 원작)는 흘러간 보더빌의 전성기를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자신들의 아픔마저도 쇼비즈니스의 소재로 활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밖에도 <러브 미 투나잇>(1932), <발끝으로>(On Your Toe, 1939), <풋 라이트 퍼레이드>(1933), <골드 디거스>(1933/1935), <호텔 할리우드>(1935) 등 수많은 명작들이 이때 탄생했다.
공황기를 피해 뉴욕에서 건너온 창작 인력과 할리우드를 기반으로 한 감독들이 만나면서 영화 기술 자체도 눈부시게 발전했다. 왜냐하면 뮤지컬 영화야말로 무대 뮤지컬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필름 기술을 이용한 스펙터클 연출을 중요한 볼거리로 삼았기 때문이다. 높은 크레인 위에서 수십, 수백 명의 무희들이 움직이는 것을 내려다보는 버스 버클리 감독의 ‘버드아이뷰’(Bird Eye';s View) 기법도 이때 큰 인기를 끌었다.
할리우드에서 자리 잡은 창작자들 역시 1929~1933년의 가장 힘든 시기를 버틴 후, 타고난 무대예술인으로서 마치 연어처럼 속속 뉴욕으로 회귀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경험은 이후 드라마 구성이 강조된 북 뮤지컬(Book Musical)이 브로드웨이 무대 뮤지컬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바야흐로 뮤지컬의 황금기로 돌입할 수 있었다.
극장 불이 꺼져도 작가만 잉태한다면
아무리 많은 작가들과 배우들이 할리우드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틀었다 해도 브로드웨이의 극장들이 한꺼번에 문을 닫지 않는 한, 공황기에도 브로드웨이는 현재진행형이었다. 오히려 대공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변을 살펴보게 만들었다. 뮤지컬은 비록 춤과 노래라는 형식을 고수했지만 그 안에서 진지함을 지니기 시작했다. 조지 거슈인은 전쟁을 비판적으로 풍자한 <풍악을 울려라>(1930), 대통령 선거를 소재로 삼은 <조국찬가>(1931) 등을 발표했다. 전작에서는 지금까지도 귀에 익은 노래 ‘양키 두들 리듬’ 등의 히트곡이 탄생했다. 2차 대전이 1939년에 발발하면서 미국은 다시 도약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전쟁 말기였던 1943년, 리처드 로저스와 오스카 해머스타인 콤비의 <오클라호마!>가 개막하면서 브로드웨이는 북 뮤지컬로서의 황금기를 열게 되었다. <오클라호마!>에서는 카우보이가 정착하는 과정과 미국의 절대 다수를 이루던 농가의 평범한 일상이 잔잔하게 그려진다. 이런 평범한 일상 이야기가 당시 2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 사람들의 눈물을 뽑아낸 것은 ‘우리가 지키려던 것이 바로 이 잔잔하고 평범한 일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브로드웨이는 두 번의 세계 대전과 베트남전, 대공황은 물론 수많은 불경기를 이겨냈다. 불황기를 맞을 때마다 개막하는 쇼의 개수가 줄었고 많은 작품들이 취소되고 불 꺼진 극장이 늘어났지만 늘 다음 시기를 예비하는 작가들이 잉태된 상태였다. 하지만 2009년 현재, 브로드웨이의 불황이 더욱 어두운 것은 이런 버팀목이 되는 작가들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뚜렷한 대가의 작품 없이 버텨온 1990년대와 2000년대의 브로드웨이 뮤지컬계는 원작 영화를 기반으로 한 뮤지컬 코미디와 주크박스 뮤지컬이 다수를 점거하여 오리지널리티를 갖춘 무대 뮤지컬의 등장이 전시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지난겨울에는 <렌트>, <스프링 어웨이크닝>, <리걸리 블론드>를 비롯한 많은 작품이 한꺼번에 막을 내렸을 정도로 불황의 골은 깊다.
국면을 전환시킬 비법이란 없다. 완성도 있는 작품, 시대정신을 읽어내는 신선한 콘텐츠의 등장만이 관객들을 열광시키며 다음 시기를 준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가장 멋진 작품들이 탄생해 왔다는 사실만이 이 공황기를 버티는 관객들이 유일하게 기댈 구석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공황기가 시작하던 1930년에 뮤지컬 작곡가인 스티븐 손드하임이 태어나지 않았던가.
![]() |
필자소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