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9일, 《Weekly@예술경영》은 독자들의 소중한 사랑을 뿌리삼아 300호 발간한다. 크게 기뻐할 성과지만 기쁨은 잠시, 반성과 부족함의 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오늘이다. 300호 특집을 기념하며, 웹진이 지금보다 더 나은 ‘예술경영 전문 매체’가 되기 위해 무엇을 성찰해야 할지 고민하는 자리를 마련했다./SNS로 날아온 열혈 독자들의 돌직구/숫자로 보는 《Weekly@예술경영》/《Weekly@예술경영》 300호 발행 축전/300호 발행 기념, 원로 예술경영인 인터뷰 다시보기

공연기획, 관객개발, 연극경영이 시작되는 - 김의경

이승엽_세종문화회관 사장
(105호, 2010년 12월 2일 발행)


연극인 김의경은 공연기획과 관객개발, 연극경영이라는 말을 통해 제작자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또한 국내외 새로운 조직과 행사를 만드는 조직자이자 공연예술계에 이전과는 다른 수준의 기록을 남기는 기록자이기도 하였다.

현대극장 창단, “한창 때는 100일, 150일을 공연했다”
현대극장을 창단한 김의경은 당시의 연극 단체들과는 다르게 공연을 많이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지속적인 공연을 위해 배우에게 월급을 주는 등 직업연극을 표방하였다. 극단의 커뮤니티 의식을 강화하기 위한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며 극단을 하나의 공동체로 발전시켰다. 이는 극단의 예술 스타일을 성립하기 위한 것이며, 연극이 전문직업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하였다.

극단, 기획제작, 공연,아카데미… 직업연극, 전문연극의 길
김의경의 현대극장은 연극의 전문화를 위해 공연을 많이 하였다. 극장의 한계를 벗어나고, 연극의 전국적 확대를 위해 이동무대를 만들기도 하였다. 여대생으로 편중된 관객을 극복하고자 관객개발에도 힘써 어린이, 청소년, 장애인 등 다양한 계층 또는 연령층에의 공연을 확대하였다. 이를 위해 기업의 후원을 유치하는 노력 또한 기울였다. 다양하고 많은 공연은 다시 인적 자원의 전문화로 이어져 현대연극아카데미 연구생들의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현대극장은 어린이연극과 청소년연극에 관객개발이나 공연 횟수 증가보다 연령과 지역의 한계를 넘는 관객층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접근하였다. 계층 별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전국을 돌며 공연을 진행하였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초연은 어떻게 올려졌나
현대극장이 뮤지컬을 선보이기 시작할 당시에는 뮤지컬이 배척받거나 연극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현대극장은 관객과의 폭넓은 접촉을 위해 음악과 무용적 요소를 도입한 뮤지컬을 전면으로 내세웠다. 엔터테인먼트적 요소가 많은 요즘의 상업 뮤지컬과는 다르게 극단의 예술성을 바탕으로 연극의 시각에서 뮤지컬을 제작하였고, 자연스레 무대기술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기술적인 무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뮤지컬과 음악극의 개념또한 정리했는데, 뮤지컬은 뮤지컬 코미디의 준말이며, 코미디 장르가 아닌 것은 뮤지컬 플레이로 부른다. 이를 바탕으로 뮤지컬과 뮤직 씨어터 개념의 음악극을 구분하였고, 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에 뮤지컬이 아닌 음악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하였다. 뮤지컬보다 “음악극이 좀 더 외연이 있는 말이다”는 것이다.

기록의 열정, 경영의 과학성
1997년, 서울시립극단의 초대 예술감독이 된 김의경은 ‘시민연극’이라는 잡지를 만들어 공연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작품 배경이나 리뷰, 차기 공연에 대한 정보를 넣어 관객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이어 2001년에는 공연문화산업연구소의 운영을 시작하며 극단 경영에 대한 과학성을 찾고, 지속적으로 한국 공연계의 역사를 기술하는데 몰두했다. 연극의 직업화, 전문화를 위한 노력 외에도 극단 경영과 마케팅의 개념을 도입하였고, 수많은 공연을 통해 연극인들을 육성해냈다. 또한, 계층과 지역, 연령을 넘는 관객 개발에도 힘썼으며 국제 교류를 통해 한국 공연예술의 세계화에도 일조하였다. 1960년 실험극장 선언문에서 언급하였던 ‘전문연극’에의 꿈은 아직도 그의 가슴에 살아 있다.

“우리는 어떤 미술관을 갖고 싶었던 것일까” - 박래경

김은영_한국큐레이터협회 이사
(107호, 2010년 12월 16일 발행)


박래경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성장에 기여한 바는 물론, 한국 미술계의 버팀목 역할을 하였다. 후학 양성과 함께 문화정책과 국공립 미술관의 자문 역할을 맡아 미술계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여 왔으며, 지금도 최연장 큐레이터로서 한국 미술에 있어 중요한 전시를 기획해오고 있다.

뮤지움연구소 체류, 미술관 운영과 경영에 눈 뜨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이 된 후, 박래경은 독일 베를린에 위치한 ‘뮤지움연구소’에 체류하며 미술관의 경영이나 운영적인 면까지 생각했다. 뮤지움연구소에서 관람객들의 분석, 분석 방법, 그 조사가 철저히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베를린에 짓고 있던 새 미술관에서 전시 공간 안의 발자국 소리나 소음을 포함하여 음향에 대해 6개월 이상의 조사 연구 과정을 거치는 것을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팀워크의 개념도 없었고...
우리나라 국공립미술관은 행정직이 학예직보다 직급이나 권한이 높아 업무를 주도하고, 관장과 학예실장의 역할이 명확히 나뉘지 않아 업무에 혼선이 있는 등 조직체계가 분명하지 않다. 특히 학예업무의 경우 관장이 학예사들에게 직접 업무를 지정할 정도로 실장의 역할이 불분명하고, 체계가 부족하다. 직급에 문제가 있더라도 전문성이 있다면 극복할 수 있었던 문제였으나 그것이 이뤄지지 않아 생산적이지 못하게 되었다. 행정직도, 학예직도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고 형식적으로 접근한 탓이다.

“그때 그 작품들만 모았어도 ...”
당시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이 박물관과 다르게 ‘뮤지엄’이라는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박물관에서 관리하는 미술품을 이관 받지 못하거나 활동 중이던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하지 않았다. 영문 명칭이 Contemporary가 되면서 근대미술을 놓쳐버린 것 또한 문제였다. 과천에서의 재개관 이후 소장품정책이 없었으며, 이후에도 관장들의 컬렉션에 불과하였다. 2000년대 들어서 학예사들이 소장품을 검토, 분석하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권한에 따르는 전문성과 윤리의식이 필요하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수집 권한은 보통 학예직 70%, 관장 30%이다. 이후의 수집심의위원회는 외부 전문가들과 관장, 학예실장으로 구성되어 진행되는데, 학예직의 힘이 강해진 만큼 이를 뒷받침하는 미술사적 연구나 미술이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또한 미술품의 가격이나 미술 시장을 분석하는 등의 작업은 사람들과 연계하여 파악할 수밖에 없으나, 지나치게 시장에 밀착될 수 있는 부작용이 있기 때문에 윤리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가 시작하면 ‘흐름’이 되었다 - 故강준혁

김소연_연극평론가
(111호, 2011년 1월 13일 발행)


강준혁은 공간사랑 극장장으로 수많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하였으며, 이후 문화예술분야 기획컨설팅을 전문화하였다. ‘춘천인형극제’을 비롯하여 수많은 축제를 기획하고 만들어왔다. 그가 ‘문화기획자1호’로 불리는 이유는, 독자적이고 전문적으로 만들어낸 영역에서 제2, 제3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수근과의 만남, “공간사랑 10년 동안 카페가 내 사무실이었다”
공간그룹은 이미 ‘공간’ 잡지를 통해 예술발표회나 감상회를 열고 있었는데, 공간사랑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지어졌다. 공연단체가 없는 공연장이었기 때문에 기획, 제작을 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구조를 지녔었다. 예술가들이 식구처럼 공연장에 드나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강준혁은, 공간사랑 1층 카페에서 예술가들과의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시나위의 합주, 채희완의 허튼춤과 김덕수, 김용배, 최태현, 이종대의 풍물 연주로 ‘사물놀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만들어졌다. 개관 1주년 프로그램으로 선보였던 공옥진의 곱사춤과 ‘심청가’ 전편을 소리와 춤으로 바꿔 공연했던 것은 ‘1인 창무극’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으로 귀결됐다. 그의 프로그램 제작 철학은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는 공간의 지향성과 사회에서 꼭 필요하지만 받아주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예술가들과 끊임없이 접촉하며 사람들의 취향과 니즈를 파악하는데 기초했다.

공연기획가에서 문화기획가로
공간의 정신을 바탕으로 건축가들과 함께 스튜디오 메타를 설립한 강준혁은 백화점 문화 공간 설계를 시작으로 문화프로젝트 컨설팅을 하게 되었고, 춘천 어린이회관 위탁운영에 대한 컨설팅을 맡으면서 어린이축제를 만들었다. 이는 후에 춘천인형극제가 되었다. 공연기획가였던 강준혁은 축제를 자주 하게 되면서 ‘문화기획가’라는 타이틀을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세계평화축전을 통해 만든 임진각 음악의 언덕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축제를 통해 쓰임새 있는 무언가 남기고자 하였다. 1998년, 아비뇽페스티벌의 한국주간 예술감독을 맡게 된 강준혁은 아비뇽 예술감독의 전통예술로만 꾸며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과거의 좋은 것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현재의 창조력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사물놀이, 판소리, 현대무용, 재즈 등이 어우러진 공연을 선보였다. 그는 프로그래머를 넘어 공연 연출을 할 수 있었던 이유로 ‘역할이 분화되지 않은 세대’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문화의 집은 우리나라 문화복지 정책 1호”
문화체육부(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문화복지시설 ‘문화의집’에 대한 기본 컨셉을 잡아달라는 의뢰를 받자, 강준혁은 문화의집에서 스스로 자기계발도 하고, 문화적 활동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창작 중심, 중앙 중심의 당시 문화정책과는 달리 문화복지에 관심을 가지고, 공동체 누구나 문화적 혜택을 받도록 하는 지역 중심 문화복지 정책의 탄생이었다.

20세기와 21세기를 잇는 문화예술기획경영
강준혁은 예술과 관련된 기획자들은 예술가나 창작 작업에 대한 이해를 확실히 하기 위해 깊게 몰입해볼 필요가 있고, 이를 통해 축제 또한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것을 하게 만드는 힘이 공익성에 있다는 그의 말과 함께, 결국 그가 말하는 문화기획은 문화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사회에 대한 공공적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인터뷰 전문

공연기획, 관객개발, 연극경영이 시작되는 – 김의경
“우리는 어떤 미술관을 갖고 싶었던 것일까” - 박래경
그가 시작하면 ‘흐름’이 되었다 - 강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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