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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츠(Linz)’는 오스트리아의 수도도 주요 도시도 아닌, 빈에서 무려 160km 떨어진 중소 도시이지만, 2009년 EU로부터 ‘유럽의 문화 수도‘로 선정된 바 있다. 바로 (뉴)미디어아트 분야의 선두 기관인 아르스 일렉트로니카(Ars Electronica)와 2007년부터 시작된 그들의 페스티벌의 영향으로 말이다. 예술가뿐만 아니라 공학자, 과학자들이 가세하여 다양한 예술 작업과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이 페스티벌은 강력한 실험성을 장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회 전 세계에서 온 많은 예술 애호가와 관광객들의 호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프랑스 남부의 작은 도시, 아비뇽 역시 1947년부터 시작된 ‘아비뇽 페스티벌(Festival d’Avignon)’로 인해 여름마다 도시 전체가 극장으로 변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 기간 동안 이 지역은 여러 나라에서 온 수많은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이다. 이웃 나라 일본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는데, 시코쿠 가가와 현에 있는 ‘예술 섬’ 나오시마가 바로 그러하다. 1989년부터 이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예술가들의 재생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들의 공통점은 문화예술과 관련된 기관과 프로젝트가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새로운 관광 콘텐츠를 개발하였다는 데 있을 것이다.
조용히, 조금씩 움직이는 제주 문화예술계
사실, 오랫동안 제주도는 문화예술의 불모지로 남아 있었다. 겉은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막상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제주 사람들에게 삶을 버텨 낸다는 것은 말 그대로 전쟁에 가까웠다. 게다가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로 또 다른 고난을 받으면서, 그들에게는 어느덧 문화예술을 향유한다는 것이 크나큰 사치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상황은 바뀌었다. 1962년부터 제주도특별자지도관광협회가 관광객 유치를 위해 적극적인 홍보를 시작하면서, 1966년에 10만 명이던 관광객은 2013년 1000만 명을 넘어섰다. 그리고 관광산업이 무엇보다 중요한 경제적 원천이 된 지금의 상황에서 이제 ‘문화예술’은 단지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개발이 시급한 중요 콘텐츠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제주의 천혜의 자연환경은 1980년대에는 전국의 신혼부부를 불러 모았고, 2000년대에는 전국의 청춘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특히 2008년을 기점으로, 많은 이들이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더불어 제주도를 새롭게 채워 줄 콘텐츠의 필요성을 토로해 오고 있다. 물론 신호탄은 이미 발사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기대 반, 걱정 반인 상태다.
현재 제주도는 그야 말로 전에 없던 이례적인 사건들로 충만해 있다. 몇 해 전부터, 한적한 시골 빈집에 하나 둘 자리를 잡아가던 문화예술 공간들(문화공간 양, 재주도 좋아, 꿈꾸는 고물상, 아트창고 등)은 몸집뿐만 아니라 나름의 노하우를 늘려가면서, 지역의 이정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이방인들은 새로운 유형의 관광객들로,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것들을 찾아다니는 에너지와 호기심이 넘치는 이들이다. 과거, 특히 1980~90년대만 하더라도 제주도에는 단체 관광객이나 개인 택시를 대여하여 여행을 다니는 신혼부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근래의 관광 형태는 천편일률적인 관광지 방문이 아니라,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시간을 갖는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고로 제주의 작지만 다양한 문화예술 공간들은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관광객들의 욕구를 채워주기에 매우 적합하다. 이러한 대부분의 공간과 이벤트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이들은, 양은희 큐레이터가 ‘제주의 소리’에 기고한 글에서처럼, 육지에서 왔거나 육지를 거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신 보헤미안들로, 다양한 경험을 통해 갖추게 된 국제적인 감각과 유연함, 적응력 등을 기반으로, 대도시와 다르지만 결코 수준이 떨어지지는 않는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해나가고 있다. 이에 더해 비교적 큰 규모와 시설을 갖춘 문화예술 공간들(아라리오뮤지엄, 본태박물관, 제주종합문화예술센터 등)이 설립되어 국내외를 아우르는 다양한 예술가와 그들의 작업들을 소개하기도 한다. 이러한 공간들은 여행객뿐만 아니라 지역주민들에게까지 문화예술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며, 각각의 소재지를 새로운 명소로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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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문화공간 양 전경 우) 제주 본태박물관 전경 ⓒ본태박물관
새로운 유형의 문화예술 관광 트렌드
국내외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제주도는 제주시 원도심 일대를 재생하고 활성화시키는 방안으로, 이 지구에 문화예술 활동가들을 불러 모았고, 그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으로 제주도 제주시 삼도2동을 아우르는 원도심 일대에는 작지만 다양하고 알찬 문화예술 공간들이 여럿 생겨나게 되었으며, ‘제주프린지페스티벌’ 등의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활동들은 아직까지 대외적으로 큰 주목을 받을 만큼, 그 움직임의 폭이 크지는 않지만, 이들은 조용히 그리고 조금씩 지역의 환경을 바꿔나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중에서 공연과 미술을 기반으로 한 아트세닉, 오이 등의 공간들도 독특하지만, 생활예술의 다양한 방식을 제시하는 쿰자살롱 등의 활동 역시 특기할 만하다. 쿰자 등은 지역주민과 이주민 그리고 외지인을 위한 다양한 워크숍 프로그램들을 개발하면서, 제주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예술적 생존 방법을 공유하고 있다. 그간 여러 번 지적되어온 제주의 관광산업의 문제점이 한정된 콘텐츠와 부족한 체험프로그램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이들의 활동은 앞으로도 눈여겨 볼만 하다. 물론 이 지역은 태생적인 문제점 또한 지니고 있는데, 과거 뉴욕, 런던을 비롯해 서울의 홍대 일대를 휩쓴 바 있는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것이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 이 문제를 걱정할 만한 단계는 아니지만, 외지인들의 자본 유입으로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제주의 부동산 가격을 염두에 둔다면, 마냥 멀리 있는 일만은 아닐 테다.
2014년 10월에 개관한 아라리오뮤지엄 제주(탑동시네마, 탑동바이크샵, 동문모텔 Ⅰ, Ⅱ 등)는 미술관과 함께 생겨난 다양한 부대시설과 숍들로 한동안 깊이 침체되어 있던 탑동 지구를 트렌디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탑동은 과거 무근성 부근 어민들의 생계를 책임지던 해안가를 인위적으로 매립하면서 주민들과 환경단체로부터 수많은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며, 이후 영화 극장과 다양한 여가 시설들이 생겨나면서 한때 제주의 청춘들이 젊음을 음미하던 장소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기업이 운영하는 멀티플렉스가 제주에까지 손을 뻗고, 거대 자본이 이곳이 아닌 다른 지구에 매혹되기 시작하면서, 탑동의 화려한 시절은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러한 시점에 등장한 아라리오뮤지엄은 이 지역에 예술적이고 감각적인 활기를 불어넣으면서, 새로운 유형의 방문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물론 이러한 현대적인 미술관이 어떻게 지역의 독특한 성격과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한 걱정 어린 목소리도 있지만, 외연을 확장시킨다는 측면에서 기대되는 부분 역시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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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리오뮤지엄 탑동시네마, 동문모텔 Ⅰ 외관 ⓒ아라리오뮤지엄
제주 근대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제주시 동문로터리 산지천 일대 샛물골 여관길 역시 문화예술지구의 모습을 서서히 갖춰나가고 있는데, 이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 바로 ‘비아아트’이다. 비아아트는 2014년부터 ‘아트페어’라는 제주에서는 매우 독특하고 흥미로운 사건을 만들어내면서, 이 일대에 머무르고 오가는 관광객들에게 이전에는 제주에서 경험하지 못하던 새로운 예술적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이 인근에는 또한 ‘왓집’, ‘The Islander’, ‘Like it’ 등 제주와 관련 있는 상품과 책 등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러한 공간들의 활약으로 그동안 젊은 관광객들에게는 다소 올드하게 느껴지던 제주시 칠성통은 과거와 현재, 전통과 컨템퍼러리아트가 공존하는 독특한 지구로 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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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제주아트페어 전경 |
이외에도 근래 제주도에는 특색 있는 다양한 공간과 사건 들이 여전히 더욱 늘어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일상 용품에서 다양한 예술 작품까지 판매하는 벼룩시장이다. 그중에서도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의 ‘벨롱장’, 서귀포시 법환동의 ‘소랑장’, 제주시 애월읍 장전리의 ‘장전리 프리마켓’, 서귀포시 강정동의 ‘마르쉐’ 등이 대표적이다. 이곳에서는 단지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만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예술 이벤트를 경함하게 한다. 이러한 벼룩시장의 활성화로 각 지역에는 관광객 유입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관련 시설(숙박업소, 음식점 등) 역시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해안가에 떠내려온 다양한 부유물을 이용하여 친환경 디자인 상품을 제작, 판매하는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에 위치한 ‘재주도좋아’처럼, 감상과 체험이 모두 가능한 공간들이 생겨나면서, 새로운 형식의 여행을 선호하는 이들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이렇듯 다채롭고 다양한 장소와 이벤트 중에서 제주도를 대표할 만한 단 하나의 브랜드가 아직은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제주도는 저렴한 비용으로 여행할 수 있는, 그저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경관을 갖춘 지방 정도로 인식되어온 경향이 없지 않다. 고로 제주도에 필요한 것은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브랜드이다. 그야말로 ‘린츠’를 유럽의 문화 수도로 부상하도록 하고, ‘아비뇽’을 전 세계인의 향유 공간으로 만든 대표적인 브랜드가 생겨나기를 기대해 본다.
※ 참고링크 [핫&이슈] 제주 문화예술의 현황과 제언 - ‘제주, 예술과 영감의 섬’, 총체적 디자인이 필요하다. [이.상.공간] 제주 가시리창작지원센터 - 삶의 현장과 현대 예술의 만남 [현장+人] 이상철 제주국제관악제 집행위원장 - 제주의 바람, 음악으로 화(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