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 예술가 발굴과 후원 전시, 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까지, 최근 기업은 단기적, 일방적 문화예술후원 활동에서 벗어나 기업 내부에 예술가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예술적 영감과 창의력을 공유하는 기회를 만들어 내고 있다. 다시 말해 기업은 예술의 창작 활동을 돕고 예술은 기업의 창의적 활동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weekly@예술경영》은 이런 식으로 서로의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기업과 예술의 바람직한 공생관계를 살펴본다.

‘art’의 어원이 ‘techne’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 예술과 과학은 수세기 동안 비슷한 길을 걸어 왔다. 의문에 대한 탐구라는 차원에서 예술과 과학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세기, 예술의 창조성이 강조되면서 이 둘은 서로 다른 길을 걷는 듯 보였다. 비슷한 속성을 지녔다는 것을 다시 인식했기 때문일까. 새로운 세기를 맞아 다시 예술과 과학이 협업을 시작했다. IT 기업에서 예술가들을 초빙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 기업과 미술의 접점이라면 신진 작가의 발굴이나 그 후원, 메세나 활동을 통한 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 지원, 기업이 설립한 미술관의 운영 등을 꼽을 수 있다. 극단적으로 기업 건물의 로비에 장식된 미술품이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기업과 미술의 접점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이 시작된 협업은 단순한 지원과 장식의 차원과는 다르다. 이 새로운 방식의 협업은 기업의 과학자, 엔지니어와 예술가들이 실시간 소통하고 서로가 가진 아이디어 수행방식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발전 등을 돕고 공유한다.

해외, 특히 미국의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IT기업에서 이러한 협업 시스템을 구축했다. 페이스북(Facebook),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플래닛 랩스(Planet Labs), 오토데스트(Autodesk), 어도비(Adobe) 등 예술과 과학의 비슷한 점을 간파한 기업들이다.



페이스북에서의 제프 켄햄(Jeff Canham)의 작업

▲ 페이스북에서의

제프 켄햄(Jeff Canham) 작업

마델린 게넌(Madeline Gannon) <Quipt> ⓒAUTODESK

▲ 마델린 게넌(Madeline Gannon) <Quipt> ⓒAUTODESK



페이스북이 운영하는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아마 이러한 IT기업과 예술가의 협업 사례로는 가장 유명할 것이다. 페이스북의 사무실(캠퍼스)을 미술관처럼 꾸미고 싶어 한 마크 저커버그의 희망으로 2012년부터 운영 중인데, 초기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사실 팔로 알토의 중심가에 위치한 사무실 벽을 치장하기 위해 미술가들을 불러들인 것은 200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매일 밤, 밤새도록’ 페이스북 사무실 내부의 벽화 시리즈를 작업한 드류 베넷(Drew Bennett)은 현재 페이스북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다. 페이스북의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작가들을 위한 작업실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페이스북의 사무실 공간을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 프로그램에 입주한 작가들은 이 공간에 벽화를 그리기도 하고, 조형물을 만들어 전시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작가들은 페이스북 사무실 공간에서 업무를 하고 있는 사람들과 서로 소통하고 어울리고 관찰하는 기회를 가진다. 4주에서 16주 동안 페이스북 캠퍼스에 머물면서 작가들은 공간 곳곳을 자신의 작업으로 채우고 표준 사례비, 즉 보수를 받는다(‘아쉽게도’ 주식으로 주지는 않는다고 한다). 베넷은 이에 대해 “작가들이 공간 곳곳에 작업한 작품들은 기업의 근무환경을 더욱 예술적으로 풍부하게 하고, 이를 경험한 직원들이 업무에 긍정적인 효과를 준다. 그리고 단순한 예술적 경험의 풍부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직원들이 좀 더 구체적인, 혹은 산술적인 성과를 낸다”라고 설명한다.

마이크로소프트 리서치의 본부인 빌딩99에 위치한 스튜디오99(Studio99)는 원래 마이크로소프트 레드몬드 연구소의 연구자들이 제작한 작업들을 전시하기 위해 2012년 11월 문을 열었다. 이와 함께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 또한 진행되었는데, 2013년 8월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미디어 작가 제임스 조지(James George)가 3개월 동안 입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컴퓨터 비디오 아티스트인 조지는 이곳에서 다양한 작업을 하면서 예술과 과학의 통합을 통한 창조의 가능성을 보았고, 연구원들 또한 가까이에서 예술가가 작업하는 방식을 관찰하고 아이디어의 교환을 통해 연구에 자극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설계나 디자인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쓰는 프로그램인 오토캐드(AutoCAD), 영화 속 시각효과를 구현하는 프로그램 마야(Maya), 3차원 컴퓨터그래픽용 소프트웨어 3ds 맥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든 IT기업이 오토데스크다. 이 기업이 2013년부터 운영하는 피어9(Pier9)는 아이디어를 디지털 모델로, 실제 제품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공간으로서, 이곳에서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AIR)이 운영되고 있다. 단순히 예술가뿐만 아니라 메이커, 학자, 건축가, 디자이너 등 다양한 크리에이티브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초청하는데, 4개월간 이곳에 머물면서 프로그램을 수행한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통해 CAD나 3D 소프트웨어가 어떻게 실재의 하드웨어로 만들어지는지를 최대한 실험하고 소통한다. 가장 앞선 프로그램을 통해 제작할 수 있기 때문인지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홈페이지에 쓰인 “세계에서 가장 좋은 공방에서 만들고 디자인하라(Build and design in the world's finest workshop)”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플래닛 랩스(Planet Labs) 또한 우리에게 생소한 IT기업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중 하나로 인공위성과 그 안의 이미지 시스템을 만든다. 어떻게 보면 예술과는 꽤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 기업 또한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오히려 이 프로그램을 통해 가시적인 혁신의 결과물을 내는데, 2013년 첫 작가였던 포리스트 스턴즈(Forest Sterns)는 플래닛 랩이 제작한 인공위성에 별자리를 형상한 작품을 제작했다. 우주의 극한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도록 작가는 기업의 엔지니어 팀과 협업을 통해 레이저와 음각으로 작품을 새겼다. 예술과 과학, 작가와 기업이 직접적이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컬래버레이션의 결과를 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어도비(Adobe)에서의 켈리 앤더슨(Kelly Anderson)

▲ 어도비(Adobe)에서의

켈리 앤더슨(Kelly Anderson)

플래닛 랩스(Planet Labs)

▲ 플래닛 랩스(Planet Labs)



2015년 5월에는 어도비(Adobe)가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런칭했다. 어도비는 우리에게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IT 기업. 어도비 크리에이티브 레지던시(Adobe Creative Residency)로 명명된 이 프로그램은 작가들에게 다양한 지원을 하고 그 대가로 작가들은 그들의 능력을 발휘하고 공유한다(거창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하던 작업 활동을 계속하면 된다). 이곳에서는 “‘'absorb’-->‘learn’-->‘share’”라는 세 가지의 과정, 즉 받아들이고 배우고 이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프로그램의 첫 작가로 베키 심슨(Becky Simpson)과 켈리 앤더슨(Kelly Anderson)이 선정되었는데, 이 작가들의 주 임무는 위에 열거한 다른 IT기업의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어도비가 만든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창의적 과정에서 기업과 관련된 유기적인 커뮤니티를 조직한다. 또한 심슨과 앤더슨은 분기별로 어도비 본부에서 그들의 작업에 대해 과학자나 엔지니어 팀들을 대상으로 프리젠테이션을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기업의 혁신을 예술가들이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도비는 2016년부터 2017년까지 프로그램에 입주할 작가를 2월 29일까지 모집하고 있다.

IT기업과 예술가의 협업 특징은 바로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형식을 취한다는 점이다. 기존의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과거 작가들에게 작업실을 제공한다는 의미부터 함께 모여서 서로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예술적 성취를 이루는, 기본적으로 작가들에 대한 지원프로그램이라는 성격이 강하다면, 이들 IT기업이 주도하는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단순한 작가들에 대한 기업의 지원이 아니라, 서로 쌍방향으로 도움을 주고받는 상호 ‘윈윈’의 관계에 있다. 결과보다는 과정 중심의 이 프로그램을 통해 예술가들은 기업의 기술을 십분 활용하여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기업의 과학자들은 작가들의 작업의 구체화 과정을 지켜봄으로써 또 다른 아이디어의 고양과 감수성의 보완을 이루어내기 때문이다. 짧게는 수개월부터 1년간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통해 예술가들은 기업의 기술을 십분 활용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이에 대한 보수를 받는다. 작품의 판매를 통한 수익창출의 구조에서 벗어나, 예술적 재능을 통한 자생성을 구축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IT기업의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운영은 예술계에 또 다른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할 수 있다.

예술가가 새로운 발명을 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 또한 질문에 대한 답을 모두 얻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술가와 과학자, 작가와 기업이 만나서 가시적인 시너지 효과를, 손에 직접 쥘 수 있는 혁신을 가능케 했다. 예술계와 기업이 맺을 수 있는 바람직한 공생 관계의 한 사례가 되지 않을까. “예술가들은 도구를 어떻게 활용해야 좋은 결과가 나오는지 연구하는 최고의 탐구가다. 그리고 엔지니어들은 이들로부터 인간적인 감성을 기술에 접목시키는 방법을 배운다”라고 한 오토데스크의 노아 웨인스타인(Noah Weinstein) 매니저의 말처럼 말이다.

류동현필자소개
류동현은 서울대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10여 년간 미술전문지 《월간미술》의 기자로 일했고, '문화역서울 284' 큐레이터를 역임했다. 『인디아나 존스와 고고학』, 『만지작만지작 DSLR카메라로 사진찍기』,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공저), 『서울 미술산책 가이드』(공저), 『한국의 근대건축』(공저), 『런던-기억』, 『미술이 온다』 등의 저서가 있고 공역서 『고고학의 모든 것』이 있다. 현재 미술 저널리스트 겸 페도라프레스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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