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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공연기획의 터를 닦다
[창간2주년 특별기획] 한국현대예술경영의 흐름① 낭유 이상만(李相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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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부터 해방을 거쳐 1980년대까지 대략 70여년간 우리나라의 굵직굵직한 공연기획은 거의 신문, 방송 등 언론사의 차지였어요. 최초의 공연도 동아일보가 당시 유형문화재인 광화문을 ‘헐지 말라’는 주장을 펴서 일제 침탈 하에서도 우리 문화재를 살리는데 큰 역할을 했던 일본인 야나기 미네요시(柳木峰吉, 한국명 柳宗悅)의 부인이자 성악가(알토) 야나기 가네꼬를 초청하여 공연한 것이지요. 이때가 [동아일보]가 막 창간의 포성을 울린 1920년 5월이었습니다. 뒤이어 조선일보도 유사한 음악사업을 하기 시작했고요.”
언론사와 대학 그리고 최초의 민간기획자 최성두
“방송사의 공연사업은 경성중앙방송이 시초였습니다. 경성중앙방송은 1927년 설립 초기에는 하나의 채널에서 주로 일본어(일본어7, 조선어3의 비율)로 전파를 발사하지만 청취자가 적으니까 청취자의 증대와 청취료 징수를 위해 조선어의 비중을 늘리게 되었죠. 1933년 제2방송이 설립돼 이중방송을 하게 됩니다. (제1방송은 일본어로 제2방송은 조선어로). 우리말 방송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공연사업도 하게 되었지요.”
1950년대, 공연예술 기획 최초의 사건들
“해방이후 음악계의 주요 공연활동을 보면 현제명이 주도한 고려교향악단이 광복 직후인 45년 9월에 창단되고 한 달 뒤인 10월 국제극장(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첫 연주회를 가졌어요. 이것은 국내 모든 오케스트라의 모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휘는 바이올리니스트 출신의 계정식이 맡았고 연주곡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과 <에그몬트> 서곡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려교향악단은 재정난으로 3년여 후에 해체됩니다. KBS 음악PD로 첫발, ‘정사인 1주기 음악회’의 성공숨 가쁘게 넘어온 여기까지가 이상만 선생 활동 이전의 대략적인 우리 공연계의 흐름이다. 그럼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공연기획자로서의 선생의 활동 궤적을 따라가 보자. 우선 선생은 누구인가. 그를 소개하는 한 언론의 기술을 보자.
선생의 첫 이력은 방송국 음악 PD이다. 대학 재학중이던 1957년(만 22세) 선생은 KBS에 입사하여 행사성 프로그램 기획을 맡는다. 첫 프로그램은 ‘정사인(鄭士仁, 1881 ~ 1958) 1주기 음악회’ 공개방송이었다. 정사인은 플루트 연주가로 우리나라 관악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독일 출신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ret)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군악대를 조직(1901년)한 이듬해 군악대에 입대한 정사인은 그 밑에서 플루트와 작곡법을 배운다. 국권 피탈 후 군악대가 이왕직양악대(李王職洋樂隊)로 이름이 바뀐 후에도 계속 남아 활동하다가, 1916년 에케르트가 죽은 뒤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로 가서 음악교사로 관악대를 지도하며 행진곡 <추풍> <돌진>, 민요 <닐리리야>, 가곡 <타향> 등을 남겼다. 어쨌거나 공개방송은 성공적이었고 패기만만한 젊은 음악학도는 프로듀서이자 공연기획자로 알려지게 된다. 오사카페스티벌을 모델삼아 치룬 ‘제1회 국제음악제’
KBS 음악 PD로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1961년 5.16이 일어나고 얼마 안 있어 당시 음악계 실력자이던 안익태가 5.16 혁명 1주년을 기념하는 ‘국제음악제’ 창설을 제의했다. 당시 공연기획자로 이름이 제법 알려졌던 이상만은 공보부에 발탁되어 이 일을 맡게 되었다. 공보부에 가보니 서울대 성악과 2기 출신으로 당시 ‘시민위안의 밤’이라는 전국 순회공연을 기획하는 등 공연계의 대부격이었던 문공부 과장 김창구(金昌九, 후에 국립극장장 역임)가 나를 추천했다는 것이었다. 그가 국제음악제를 총괄하고 있었고, 그 밑에서 이상만은 김종설 사무관(행정담당), 영어를 잘했던 김영호 주사 등과 호흡을 맞추면서 음악제를 준비해 나갔다. 국제음악제 개최 예산은 당시 유명했던 간첩 황태성의 공작금 20만 달러 중 KBS TV를 설립하고 남은 돈의 일부로 충당하게 되어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고음반 수집 열풍, <잘 살아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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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음악제의 성공덕분에 그는 1969년 두 번째로 ‘제1회 서울음악제’ 창설에 참여했다. 음악협회가 주최가 된 이 음악제는 한국 음악인들의 작품만으로 구성되었는데 조상현 씨가 사무국장을 맡았고 그는 프로그램 기획담당 차장이었다.
앞의 두 음악제 경력 때문에 그는 당시 박정희 정권의 실세이자 국무총리였던 김종필 씨와도 알게 되어서 1974년 40세에 ‘광복 30주년 기념음악제’의 집행사무국장을 맡게 된다. 그 때 한 팀을 이루어 일했던 이들이 문공부 예술과의 김문무(전 경기도문예회관 관장), 박중암(전 국립극장 공연과장, 현 문공회 사무국장), 국악원의 이승렬(전 국립국악원장) 등이었다. 이듬해 음악제가 열리던 해에는 당시 민간기획사인 국제문화회 대표였던 김용현(초대 한국공연예술 매니저협회장)도 참여하여 광고유치와 관리를 맡게 된다.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 30주년 기념음악제’의 화제는 첫 귀국연주를 가진 백건우였다. 1972년 뮌헨에서부터 인연이 이어지던 배우 윤정희와의 스토리도 한몫을 한 것 같았다. 국위를 선양하고 있었던 백건우에게는 당시 병역문제가 있었는데, 이상만은 당시 공화당 의장 김정렬의 딸 김태자를 통해서 백건우의 병역이 면제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도 이 음악제에 출연하였고 김남윤, 이대욱, 문용희 등 해외파들도 대거 참여하였다.
음악제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1976년에는 문공부가 주관했던 ‘제1회 대한민국음악제’에도 참여하였다. 그 때의 본직은 KBS 부장이었다. ‘대한민국음악제’는 그때까지 교류가 없었던 동구권 음악인들과 교류를 트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대한민국무용제’ ‘대한민국연극제’ ‘대한민국국악제’ 등이 줄을 잇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977년에는 세계청소년음악연맹 세계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민간단체인 한국청소년음악연맹과 국제문화협회(현 국제교류재단)가 공동으로 주관하였는데, 이때는 국제문화협회의 김광과 공동사무국장으로 참여하였다. 우리나라는 세계청소년음악연맹에 73년 가입했는데, 가입 후 이스라엘의 골고다에서 개최된 세계대회에 가보고 한국유치를 결심하였고 4년 만에 결실을 맺게 되었다. 서울대회에는 3천여 명의 외국음악인들이 참가하여 장관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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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의 광복 30주년 기념음악제, 1976년 제1회 대한민국음악제, 1977년 세계청소년음악연맹 세계대회 등을 1년마다 숨 가쁘게 치르고 난 뒤에도 쉴 틈이 없었다.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예술제의 사무국장을 또 맡은 것이다.
세종문화회관은 1972년 시민회관이 불탄 자리에 1974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이 해에 개관한다. 100일 동안 총 157회의 공연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축제를 통한 관객동원 목표가 50만 명이었는데, 이는 당시 서울인구 5백만 명의 10%였고, 5만 명으로 추산되었던 전체 클래식음악 인구의 10배나 되는 수치였다. 결과적으로는 27만 명이 개관예술제를 다녀갔으니 당시로서만이 아니라 지금에 견주어도 대단한 일이었다.
[Time]지(誌)가 이 개관공연을 다룰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당시 타임지 동경지국장 S. Chang(여)은 그를 가리켜 ‘촛불 같은 사람’이라며 박스 기사로 선생을 다루겠다고 제안해 왔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가 만만치 않았던 관계로 ‘사건’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거절하고 말았다.
그때 사무국에서 같이 호흡을 맞추었던 기획자들이 강석흥(현 한국공연예술경영인협회장), 양인식(전 예술의전당 공연부장), 강인(한국문화예술진흥원), 최충식, 김원구(음악평론가, 작고) 등이었다. 영문 교열을 담당하던 브라이언 베어리라는 외국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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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현(1936-1997) 국제문화회 회장도 사무차장으로 같이 일했다. 김용현 회장은 서울중학교 합창단 출신으로 서울문리대 철학과 졸업 후에 [사상계]에서 총무부장을 하다가 김지하의 <오적(五賊)> 필화사건으로 잡지가 폐간되면서 숨어 다니기도 했다. 이후 김자경오페라라단에서 총무로 일하다가 1972년도에 국제문화회를 설립하고 한때 [콘서트가이드]라는 얇은 정보지도 발간하였다. 근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민간 공연기획 사업을 했던 사람이다.
기획사의 재정적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삼익피아노 대리점까지 겸업하였으니 흡사 해방전 최성두의 음악사와 유사한 포트폴리오를 가졌던 셈이다. 국제문화회는 당시 국내 정상급 연주자들의 공연을 도맡아 했는데, 그때그때 주어지는 대로 한 것이 아니라, 반기별로 또는 연단위로 공연기획을 했으며, 그때만 해도 연주가가 직접 뛰어다니며 연주회를 주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비로소 연주가는 개런티를 받으며 연주만 하고 매니지먼트는 전문가가 맡는 시스템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민간기획사로서 연간 주최하는 공연에 회원을 모집하는 시도를 한 것도 김용현 대표의 국제문화회였다.
이후의 공연기획사로는 2~3년 늦게 소아음악사무소(대표 임석규)가 출범을 하였고, 이로부터 한참 후 1984년 한국무지카(송희영), 1986년 서울예술기획(박희정)과 미추홀예술진흥회(전경화) 등으로 이어진다. 국제문화회는 이들보다도 10여년이나 앞섰고, 요즘을 대표하는 기획사 (주)크레디아(1994, 정재옥), 빈체로(1995, 이창주), 마스트미디어(1997, 김용관) 등 보다는 20여 년을 먼저 시작했던 셈이 된다.
김용현은 1982년도에 당시 일본기획사들의 해외 연주단체 알선 독주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강석흥(KBS 교향악단 공연기획), 강인(문예진흥원 공연담당), 강준혁(당시 공간사랑 대표), 양인식(숭의음악당 사무국장), 한진석(중앙일보 차장) 등과 함께 한국공연예술매니저협회(현 한국공연예술경영인협회)의 설립을 주도하고 초대 회장이 되어 공연계의 합리적인 비즈니스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후에도 음악관련 세계적인 이벤트와 이상만 선생의 인연은 계속되는데 1981년에는 세계민속음악학회에 관여하였고, 가장 최근인 2009년에는 제주도에서 열린 예술올림픽이라 할 세계델픽대회를 유치하여 위원장을 맡았다가 곡절 끝에 도중에 손을 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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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화회관 개관예술제가 끝난 뒤에는 숙원이던 미국 유학길에 올라 예술경영을 공부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1970년도에 벨기에 고등기술학교에서 뉴미디어예술을 공부하고(이 덕분에 이후 (주)SKC에서 CD사업을 하는데 자문을 하기도 함) 귀국길에 미국에 들러 UCLA의 예술경영 프로그램을 견학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때부터 언젠가는 이 과정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1974년 풀브라이트 장학생 시험에 합격하여 여건을 만들어 놓은 다음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예술제가 끝난 다음 마음먹었던 일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UCLA(MBA과정)에서는 예술경영 전반을, 예일대(MFA과정)로 옮겨서는 극장경영을, 뉴욕대에서는 예술의 재정경제를 들었다. UCLA의 졸업논문 「올림픽과 문화」는 역대 올림픽의 예술행사를 정리한 것이었는데, LA올림픽에서도 참고하였다. 국내에서는 문예진흥원이 발간하던 [문예진흥]에 발췌 게재되기도 했다. 이후 예일대 예술철학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다니고 있었으나 장학금도 끊기고 해서 2년 만에 귀국하였다. 인생의 첫 직장이자 입신(立身)의 기반이 되었으며, 웬만한 음악제마다 차출되기를 거듭하면서도 20여 년 동안 적을 두어 온 KBS에는 귀국 후 복직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완전히 퇴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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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기획자로서, 음악평론가로서 이런 저런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중 적어도 수년 동안 연봉을 받은 직장생활은 두 군데가 더 있었으니 하나는 (주)예음이고 또 하나는 가장 최근의 고양문화재단이다. 다움문화예술기획에서도 이사장으로 초기부터 6년여를 관여했지만 보수를 받는 직장의 개념은 아니므로 제하고 보면 그렇다.
1984년부터 91년까지 일했던 (주)예음은 공연기획과 예음홀 운영, [월간객석] [시사저널] 등을 발간하던 회사였다. 여기서의 활동은 예음홀 프로그램 운영이었다. 서양음악 위주의 공연계에 가야금산조 유파전, 판소리 유파전 등 한국음악 공연의 씨앗을 뿌린 점들이 보람으로 남았다. (주)예음 이전에 88서울올림픽준비추진위원단에서 문화행사전문위원으로 개폐회식 프로그램 구성에 관여하면서 국악이 전면에 등장하는데도 그의 노력이 컸다. ‘문화올림픽’이란 말도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상만의 개인적 스승은 국악학자인 만당(晩堂) 이혜구(1909-2010) 박사인데 그가 국악에 대해서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실제로 기획도 많이 하였던 것은 스승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이었다. 서양음악 중심인 ‘제1회 국제음악제’에서는 우리음악인들의 음악 연주로 시작하였는데 이때 종묘제례악을 처음으로 재현하였다. KBS 재직 당시에는 전국의 민요수집을 시작했고, 아악, 판소리, 진도씻김굿 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도록 노력하기도 했다. 1959년 서울신문에 ‘연예천일야화’라는 이름으로 60회 동안 개화기 이후 음악의 흐름을 연재하여 한국의 근대음악사 정리의 단서를 최초로 던진 바도 있다.
특히 그는 국어사용에도 남다른 애착이 있다. 이런 그의 특성을 말해주는 사례로 고양문화재단 소속 공연장 이름을 그 흔한 ‘문화예술회관’이나 ‘예술의전당’이라는 이름들을 다 물리치고 ‘덕양어울림누리’ ‘일산아람누리’라는 순수한 우리말로 정한 것, 공연장 도우미를 ‘돌보미’로 바꾸고 한복을 입힌 것, 보통 R, S석 등으로 구분하는 좌석 이름을 ‘으뜸 자리’ ‘좋은 자리’ 등으로 시도한 것 등이 있다. 이런 애착 때문에 한글학회로부터 ‘한글으뜸지킴이’라는 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이제까지 문화예술에 끼친 공로로 대한민국예술상과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이제까지 남들이 안하던 것을 처음으로 시도했던 한 사람의 궤적을 거칠게나마 살펴봤다. 이상만의 생에는 음악평론을 비롯하여 다른 장르인 연극이나 무용, 심지어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 등 교육기관에도 관여한 인연들이 많이 있지만 무엇보다 음악공연기획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언론사가 주도해온 20세기 한국의 음악공연계에서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거나 영향을 미쳐 온 큰 음악제들을 처음으로 일궈온 역사는 예술경영사의 한 장(章)으로 기록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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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이용관은 중앙일보/호암아트홀 문화사업부장, 부천문화재단 전문위원, 안양문화예술회관 관장을 역임했다. 부천과 안양에서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공연시즌제를 도입하여 성과를 거둔 바 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공연예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사)한국예술경영연구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본지 편집위원. speed2653@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