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치유)’이 그야말로 대유행이다. 이번 특집은 힐링이 사회적 용어로 확대재생산되는 현상을 예술경영인들에게 음미할 기회를 드리고자 기획되었다. 더불어 유난히도 힐링이 필요한 이 더위에, 예술경영인을 위한 힐링은 무엇일지 생각해 보시길 제안 드린다. 연재순서   ① 힐링에 대한 고찰 ② 모두를 위한 힐링 1: 예술치료의 현황 ③ 모두를 위한 힐링 2: 예술치료의 국내외 사례 ④ 당신을 위한 힐링

필자는 이 사태의 모든 책임을 김정문 씨에게 묻고 싶다. 전술한 문장의 ‘이 사태’라 함은, 사회 전반에 걸쳐 차용되고 있는 ‘힐링’이란 용어의 남용을 뜻하며, ‘김정문 씨’는 바로 90년대 한국 주부들의 지갑을 마술처럼 열어젖힌 ‘김정문 알로에’의 대표, 바로 그 김정문 씨를 말한다.

힐링,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우선, 본격적인 주장을 펼치기 전에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른바 ‘힐링 현상’에 대해 짚어볼 필요가 있다. 먼저 ‘힐링’이란 용어의 개념적 정의부터 살펴보자면, 영한사전은 이를 ‘(몸이나 마음의) 치유’라 설명하고 있다. 치유라는 뜻에 걸맞게도, 애초에 ‘힐링’ 은 의학적 용어로 제한적 범위 내에서 사용되었다. 초기에는 ‘신체의 치유’를 뜻하여 사용되었고, 그 중에서도 주로 대체 의학 분야에서 언급되었다. 즉, 수술 없이 식품이나 운동으로 신체의 질병을 낫게 하는 치료법을, ‘OO 힐링요법’이란 식으로 일컬은 것이다. 그 후, 힐링이란 용어가 사회적으로 확대되어 심리적 차원을 언급하는 용어가 되었으니, 이제는 의학사전이 ‘힐링’을 ‘마음을 위안 하는 일, 마음의 치료’라고 명명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필자가 힐링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 용어의 사용이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제는 사회적 용어로 확대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사의 헤드라인에 ‘힐링’이 넘쳐나고, 서점에는 ‘힐링’을 다룬 도서들이 쌓여가고 있다. 광고에도, 방송에도, 각 분야의 연설에서도 이제 ‘힐링’이란 단어는 당연한 듯 등장한다. 실상은 마사지 센터이면서 이름은 ‘힐링 센터’인 곳과, 힐링을 위해 어떤 행위도 하지 않는다는 명목 하에 그야말로 아무것도 않는 ‘휴센터’, ‘힐링’이란 용어를 그대로 차용한 방송 프로그램은 물론,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성적 힐링(Sexual Healing)’까지 등장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필자는 이 현상이 치유가 더 이상 개인의 차원에서 요구받는 것이 아니라, 전사회적 차원에서 요구 받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이 사회를 하나의 신체로 비유했을 때,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장기 곳곳이 병들어 있고, 그 병든 기관들을 ‘치유’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정상적인 작동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에 한병철(2012, 문학과 지성사)은 자신의 저작 제목대로 우리 사회를『피로 사회』로 규정하기도 했고, 그의 주장이 높은 판매고로 동의를 받고 있다는 것은 사회 전반에 걸쳐 피로감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만연해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여기서 잠깐! 필자는 출생이후 줄곧 고급 글쓰기를 지향해 온지라, 다음과 같은 단어를 쓰기에 몹시 거리낌을 느꼈으나, 지난 일주일간 불철주야 고민한 결과, 이 보다 현재 우리사회를 적확하게 설명하는 표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쓰고자 한다. “현재 우리사회는 전체적인 ‘멘탈붕괴’에 빠진 것이다.” 특히 ‘힐링’이란 단어가 ‘마음을 위로하는 일, 마음의 치유’라고 뜻하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우리 사회의 정신, 즉 멘탈이 무너져 가고 있다고 아니 말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외압을 버텨낼 심리적 저항선이 무너진 우리사회가 건강한 정신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는 셈이다.

봉추찜닭. 사진출처 봉추찜닭 홈페이지

▲ 봉추찜닭.
사진출처 봉추찜닭 홈페이지

그렇다면 현재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사용, 아니 애용되고 있는 힐링이란 용어는 과연 적절한가. 여기서 민속지학적 연구방법을 지향하는 필자의 관찰과 통찰, 아울러 심층 인터뷰의 결과를 미루어보아, 현재의 힐링 열풍은 감히 그 수명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그 근거로 과거 우리 사회 전반을 강타했던 ‘봉추 찜닭’의 사례를 들고자 한다. 아아, 봉추 찜닭이란 어떤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가. 과거 한국사회의 치킨업계를 수십 년간 장악해왔던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과 이를 단 한방에 물리친 양념치킨을 단숨에 제압한 바로 그 매콤 달콤하면서 면발까지 쫄깃한 바로 그 봉추 찜닭이 아닌가. 양념과 후라이드로 경색되었던 치킨 업계에 혜성처럼 등장해 요식업계의 황태자로 자리매김하고, 선남선녀의 데이트 메뉴로 기꺼이 희생하여 애정을 돈독케 하고, 부부갈등 해결의 일등 공신이었던, 바로 그 봉추 찜닭이 아니었던가. 유흥가는 물론 동네 어귀까지 봉추찜닭이란 네 글자의 네온사인으로 전국의 야간 지형도를 다르게 만들었던 바로 그 영화로웠던 봉추찜닭 말이다!

그나저나 필자는 이 대목에서 봉추 찜닭의 매콤 달콤한 맛을 생각할 때마나 그리움에 젖어 폭포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거둘 수 없으니, 우리 사회가 이토록 매정하게 저버렸던 것이 어디 봉추 찜닭뿐인가! 한 때 애정을 듬뿍 담아 열광했던 ‘피시방’‘노래방’‘비디오방’과 ‘조개구이 집’, 그리고 ‘멘토열풍’마저 모두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으니, 슬프게도 한국사회의 빠른 관심사의 이동으로 인해 힐링열풍 역시 언젠가는 비수기의 해변가에 쓸쓸히 바람만 맞이하는 조개구이집과, 임대료는 싸지만 행인의 발길이 닿지 않는 시외 변두리로 몰린 봉추찜닭과 같은 운명의 길을 걸을 것으로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웰빙 열풍과 힐링 열풍 사이

여기서 또 잠깐! 만약 당신이 세심한 독자라면, “필자는 왜 서두에서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김정문 씨에게 묻고자 하였는가?” 라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그것은 필자의 예리한 시선으로 볼 때, 힐링 열풍의 원천에는 웰빙 열풍이 있었고, 그 배경에는 바로 김정문 알로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김정문 알로에가 선풍적 인기를 끌기 전인 90년대 이전까지 그저 먹고 사는 문제에 몰두 해왔던 것이었다. 한국전쟁 직후와 60년대, 새마을 운동이 성행했던 70년대는 말 할 것 없거니와, 80년대에까지 우리의 화두는 ‘잘 먹고 사는 것’이 라기 보다는, 그저 ‘고민 없이 먹고 사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김정문 선생은 모두 먹고 사는 것을 고민할 때, 잘 먹고 사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놀랍게도 82년부터 소외 받은 지역 김제에 대 알로에 농장을 설립한 것이다. 그 이전에 선생은 이미, 필자가 채 걸음마도 못하던 시절이자 동시에 온 국민이 새마을 운동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노동했던 1976년, 국내최초로 ‘알로에의 집’을 세우고 외로이 국민건강 증진을 위해 노력해왔으니, 그 노력의 결실이 90년대의 폭발적 매출로 이어졌다 할 수 있다.

이후 고조된 건강에 대한 관심이 ‘웰빙 현상’을 촉발하고, 웰빙은 ‘단순히 몸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사회적 자각이 심리적 치유를 위한 힐링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할 수 있으니,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사회적 관심의 변화에 따른 영광은 물론, 책임까지도 김정문 선생에게서 기인한 것이라 부인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증거 앞에 우리는 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현상과 관계없이 선생은 오로지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해 홀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셨으니, 필자는 선생에게 책임을 물으면서도 애처롭고 안타까운 마음을 떨쳐 낼 수 없다. 이 때문에 문화 연구자는 강직한 마음을 지녀야 하지만, 본인은 어쩔 수 없이 장이 예민한 A형의 인간이니 이 모두 필자의 업보라 여기고 있다.

명상 아무튼 사태의 전개야 이렇다 치더라도, 이쯤 되면 정색하고 진지하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 하나 있다. 전술한대로 힐링이란 용어가 과열되어 사용된다면, 과연 현재 우리 사회에 힐링은 필요하지 않은 것인가? 아니다. 아니다. 아니 되올시다. 가진 것 오직 월세집의 보증금 삼천만원 밖에 없는 필자지만, 그 보증금을 걸고서라도 필자는 단연코 힐링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오히려 더욱 필요한 시점에 우리는 처해있다. 여기저기서 가짜 힐링 프로그램이 터져 나오고 있다는 것은 그 만큼 진짜 힐링에 대한 수요가 뜨겁게 들끓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러므로 더욱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어루만지고 회복시켜줄 참 치유가 필요하다.

여기서 본격적으로 예술치유에 대해 논의할 수 있겠다. 일찍이 미술치료, 음악치료가 등장한 것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예술은 사람의 심리적 치료뿐만 아니라, 마음의 정화까지 담당해왔기 때문이다. 좀 더 근원적인 논의를 하자면, 예술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기능이 바로 인간의 마음에 카타르시스, 즉 정화작용을 일으키는 것 아닌가. 정화작용이라 함은 안개처럼 뿌옇게 자신을 둘러싼 현실의 고민이 예술작품으로 인해 하나둘 씩 걷히는 기분, 즉 모호했던 삶의 의미가 밝혀지는 체험을 말한다. 그것은 비단 미술이나 음악 치료뿐만이 아니라, 한 편의 연극·영화·시·소설을 접했을 때 우리가 이미 맛보았던 바로 그 정서이다. 그러므로 굳이 힐링이란 표현을 지금껏 쓰지 않았을 뿐이지, 거의 전 분야에 달한 예술행위들이 실질적으로 힐링의 역할을 해온 것이다.

물론, 예술의 목적이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만은 아니기에, 그 반대의 역할을 하여 인간으로서 반드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들, 예컨대, ‘바람직한 사회란 무엇인가’, ‘인간다운 삶이란 어떠한 것인가’, 와 같은 주제로 고민에 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 또한 궁극적으로는 ‘참다운 삶(즉, 평안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고민이므로 근원적인 힐링의 역할과 같은 범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한술 더 떠, 좀 더 근원적인 방식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그것은 비단 우리가 예술가이기 전에 ‘내 주변의 모든 사람, 즉, 공무원과 자영업자, 교사와 환경미화원, 교수와 운동선수 등, 다른 직종의 모든 이들과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적 차원에서의 힐링이 필요하지 않다고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글이 한낱 지면을 채워 원고료나 받아내려는 삼류작가의 얄팍한 수작에 지나지 않으려면 인본적 차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쓰다 보니 본의 아니게 몹시 거창하게 기대를 하게 만들어 송구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지만, 사실 나의 관심사는 무척이나 소박하다(대저 행복은 작은 것에 있을지니).

그것은 들어주기가 아닐까. 토닥거려주고, 들어주고, 어깨동무해주는 것. 그것이 생활의 힐링이 아닐까 싶다. 외로운 자와 함께 길을 걷고, 햇볕을 쬐고, 바람을 느끼며, 그저 시간을 함께 소비하는 것. 그래서 굳이 ‘힐링’이란, 즉 세상 이곳저곳에 떠다니는 흔한 말을 꺼내지 않더라도, 둘이 함께 마시는 공기만으로도 참 치유가 되는 시간을 보내는 것 말이다. 나는 이것이 근원적인 힐링이라 믿는다. 사실, 우리는 다들 이 복잡하고 번거롭기 그지없는 별에 떨어진 한낱 외로운 존재들에 불과하니까. 쇼펜 하우어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인생이란 섬에 유배를 온 존재들”이므로,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당신의 외로움이 나의 외로움인 양 함께 살을 맞대면서 시간을 맞대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본원적인 힐링이라 생각한다.

그나저나 이토록 단순한 이야기를 굳이 지면을 빌어 이야기를 해야겠냐고? 그래서 시시하다고? 맞다. 나도 동감한다. 하지만 원래 인간사의 모든 문제는 이 시시하고 사소한 것들이 지켜지지 않을 때, 일어나는 법 아닌가.

최민석 필자소개
최민석은 1977년 경북 포항에서 태어났다. 2010년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lsquo;제13회 창비 신인소설상&rsquo;을 수상하며 등단했고, 2012년 장편소설 『능력자』(민음사, 근간)로 &lsquo;제36회 오늘의 작가상&rsquo;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쓴 책으로는 『너의 눈에서 희망을 본다』(조화로운 삶, 2010)가 있고, 현재 6&middot;70년대 지방 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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