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취수장 안의 모습
▲▲구의취수장의 위치 지도
|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에 위치한 구의취수장. 구체적으로 말하면 워커힐 호텔 바로 아래 한강변에 붙어있는 산업시설. 1976년부터 최근까지 서울 시민의 수돗물 공급을 맡았던 공간. 도로상 혹은 웹상에도 나와 있지 않은 기밀 장소. 여기는 제1취수장, 제2취수장, 염소투입실, 변전소, 직원관사, 임시 사무실 용도의 컨테이너 가건물까지 6개동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총면적이 5만 제곱미터(약 1만 5천 평)에, 반지하 형태의 건물 높이가 18미터에 달하니 꽤 큰 규모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다.
구의취수장은 인근에 강북취수장이 생기면서 물 공급원의 기능이 점차 중단되었고, 새로이 용도 변경의 가능성이 제기되었다고 한다. 이에 작년 한 해 동안 도시계획자, 문화연구자, 예술가, 행정가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검토를 거쳐 최종적으로 서커스와 거리예술을 위한 창작공간으로 선정되었다. 내년에 본격적인 리모델링에 들어가기 앞서, 이번 해에는 예술가들과 일반 시민들에게 그간 숨겨왔던 존재를 내보이고 가능성을 탐색해보는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이 공간의 예술력은 지금이 ‘0년’ 인 셈이다.
서울시와 서울문화재단에서는 이러한 과도기적 시간을 위해 여름과 가을, 총 2회에 걸쳐 작은 축제 형식의 오픈스튜디오를 진행했다. 필자는 이 행사의 구성작가로 참여하여 취수장이라는 그릇 안에 담기게 될 내용물을 어떻게 풀이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본인도 잘 모르는) 낯선 공간에 대한 이용 안내서 혹은 사용 설명서를 구상하게 되면서, 그 과정에서 산업유산과 거리예술, 도시 재생과 시민 참여 등을 반추해보게 된 것이다.
산업유산과 거리예술의 만남
산업유산(industrial heritage, 産業遺産)은 역사적, 기술적, 사회적 건축학적 또는 과학적 가치가 있는 산업문화의 유물을 지칭한다. 따지고 보면 산업유산은 문화유산에 속한다고 볼수 있다. 한국에서는 최근 (구)서울역사의 복원 및 새 단장, 당인리 발전소의 용도 변경 등으로 새로운 관심 대상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100년이 채 안 된 우리의 산업유산은 현재진행형의 도시상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다. 살펴보면 2차 제조업의 대상인 ‘물’ 을 생산해왔던 취수장은 엄청난 양의 수돗물을 소비했던 거대 도시 서울을 되살피게 해주는 것이다.
구의취수장의 용도 변경은 별다른 잡음 없이 이뤄졌다. 이는 공간이 갖는 특색과 성격이 거리예술을 담아내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리라. 주어진 공간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것이 시민들을 위한 공공성과 가치 지향성을 갖고 있는지, 두 가지 문제를 고려할 때 ‘거리예술’ 이라는 콘텐츠는 이에 자연스럽게 부합했다. 이를테면 구의취수장이 가지고 있는 실내의 깊이감과 천장을 관통하는 바(Bar) 형태의 브리지들, 그리고 거주지역과의 멀리 떨어진 거리는 거리예술의 실험공간으로 적당하다. 그간 거리예술계가 제작소와 창고부재에 따른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었고, 거리예술의 메카로 불리는 프랑스 샬롱 지역(Chalon)의 도축장이 국립거리예술센터로 개조된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관계자들에게도 어떤 방식으로 변화와 정착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 롤모델을 통해 쉽게 그 미래를 그려볼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거리예술 창작 기지로의 변화는 취수장을 관리하는 서울시와 협력 파트너로서 서울문화재단이 추구하고 있는 문화민주주의에 대한 그림 안에 시민들을 위한 예술축제 콘텐츠로서 ‘거리예술’ 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민들이 먹고 마시는 ‘식수’ 를 생산하던 시설이, 다시 시민들이 향유할 수 있는 ‘예술’ 을 생산하는 기지로 탈바꿈 한다는 취지가 강한 설득력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구의취수장에서의 순간들
필자는 올해 5월의 초여름, 처음으로 구의취수장을 방문했다. 비밀스럽게 보안을 유지하면서 입구를 통해 들어가는 과정에 놀랐고, 겉으로 보기와는 다르게 깊고 거대한 공간에 또 한 번 놀랐다. 첫인상은 입체적인 자극으로 다가왔는데, 실내에 들어서니 싸늘한 기운과 함께 눈앞에 펼쳐진 아찔한 공간감이 압권이었다. 놀라움이 가시자 긴 세월에 걸쳐 쌓인 먼지와 모래들, 그리고 벽면 곳곳에 배인 고약한 화학약품의 냄새가 몸과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한 층 한 층 아래로 내려가면서 구불구불한 수도관과 거대한 펌프가 ‘산업유산’ 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그려주었다. 마치 영화에나 나올법한 그로테스크한 지하 세계를 맞대면한 느낌이었다(심리적인 위축감을 안겨주는 실내와는 다르게 취수장 옥상에서는 탁 트인 한강의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영국의 뱅크사이드 화력발전소(Bankside Power Station)를 테이트모던 미술관(Tate Modern)으로 변모시킨 사례나 기차역을 개조한 프랑스의 오르세 미술관(Musee d’Orsay), 공장지대였던 독일의 뒤스부르크 노드파크(Duisburg-Nord Landscape Park) 등 이미 정착되어 산뜻하게 변한 예술공간 등을 별 생각 없이 떠올렸던 필자에게 산업유산의 민낯이 주는 충격은 실로 신선했다.
취수장과 예술가와의 만남을 현장에서 조율했던 서울문화재단의 김재용 감독의 말을 빌자면, 취수장을 첫 대면한 거리예술가들의 반응 또한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일단 거리예술가들은 취수장의 규모에 감탄을 했고, 공간이 주는 아우라에 반했다고 했다. 일단은 구의취수장이 ‘날 것’ 그대로 거리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던 셈이다.
아마도 이러한 호응은 ‘거리예술’ 이기 때문에 가능할 터이다. 특정 공간의 예술성을 포착하고 기획하는 거리예술가들에게 구의취수장이라는 산업 시설은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장소였을 테니까. 실제로 다양한 전공과 개성을 가진 오픈스튜디오의 참여 예술가들은 저마다의 접근법으로 공간 활용에 임했다. 누군가는 야외에서 이동형 음악과 거리댄스를 선보였고, 누군가는 실내에서 중세 시대 신화를 바탕으로 한 현대무용을 시도했다. 거대한 벽면과 천장을 이용해서 미디어 퍼포먼스와 공중 곡예를 콜라보레이션 했고, 구불구불한 미로 바닥을 이용해서 격렬한 신체극을 보여주기도 했다.
 |
 |
▲6월에 구의취수장에서 선보였던 배낭속사람들의 〈멈춘 시간, 흐르다〉(왼쪽부터)과
창작그룹 단디의 〈아주 작은 꿈〉
▲▲9월에 선보인 극단 몸꼴의 〈불량 충동〉(왼쪽부터)과 창작그룹 노니의
〈템페스트-2013_듣고 있니?〉(오)의 공연 장면 중
|
예술가들의 창의적인 접근과는 다르게 이를 무난하게(?) 홍보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약간의 고충이 잇따랐다. (지나고 보니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산업유산이 갖고 있는 무거운 이미지를 탈색하기 위해 여러 가지 ‘말’ 들을 괜히 떠올려야만 했다. ‘취수장’ 이라는 개념도 딱히 없던 상태에서 동일한 입장에 놓인 시민들 혹은 예술 종사자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려는 이미지 메이킹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구’ 와 ‘취’ 가 들어간 말의 어감이 문제였다(일일이 따지면 ‘의’와 ‘장’도 문제다. 외국인은 정말 발음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명칭을 바꿀 수도 없었기에 더욱 머리를 쥐어짤 수밖에 없었고, 결국엔, ‘취’ 라는 글자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그리하여 6월의 오픈스튜디오에서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공간을 취하다, 예술에 취하다“였다. 취(取)한다는 것은 점(占)한다는 의미와 동시에 빠져든다(醉)는 다의어로 사용되었다. 이미 어딘가에서 사용한 바 있는 표현이라는 걸 알지만, 새로이 공간을 점유하고 그 속에서 예술에 몰입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이야기로 관심을 돌려보고자 했다.
이어 9월의 오픈스튜디오에서는 불리한 어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하여 “거리예술펌프, 시험가동개시!” 라는 작업(?)용어를 사용했다. 한편으로는 9월의 시간성을 강조할 겸, ‘구의’ 라는 말을 ‘92’ 로 음차한 말을 만들어냈다. 이름에서 연상되는 답답한 느낌을 명랑하게 풀어내려는 시도라고 봐주면 감사하겠다. 재미있게도 구의취수장에서 행한 작품 중에는 이러한 ‘말’ 의 맥락에 어울리는 작품들이 더러 있었다. 장내로 진입하게 되면 강한 냄새와 묘한 기운 때문에 약간 몽롱한 기분이 드는데, 아마도 감각이 예민한 예술가들이 이를 무의식적으로 작품에 반영한 것은 아닌가 한다.
6월과 9월의 행사가 벌어졌던 구의취수장은 아마도 그 역사상 가장 활기차게 들썩였던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온전히 거리예술을 위한 공간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하는 예술가나 보는 예술가나 감탄과 경이의 순간들로 스튜디오를 축제로 만들었다. 그간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던 곳에 사람들이 북적이고 새로운 활기를 만들어내는 광경이 재미있었다. 살펴보면, 구의취수장은 서울시민들이 사용하는 식수원이었기 때문에 그 존재를 널리 노출할 수 없었던 존재의 슬픔을 안고 있던 곳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내년부터 새로 들어서게 될 예술가들과 기획자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근로자분들의 이별 시간이기도 했다.
|

▲ 제1취수장의 옥상에서 선보인 노노앤소소의 〈18h, 구의취수장〉
|
구의취수장의 앞날
필자가 경험한 구의취수장은 예술가와 기획자의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건강한(!) 욕심을 엿볼 수 있는 자리였다. 오픈스튜디오를 거쳐간 많은 팀들이 이곳을 실험실이 아닌 본격적인 무대로 사용했다는 점이 인상적인데, 실험을 하다 보니 완성하게 되었다는 참여자의 말이 흥미롭게 들렸다. 공간이 갖는 독특한 아우라와 입체적 공간성이 예술가로 하여금 작품을 온전하게 만들고자 하는 충동으로 이어지게 하지 않았을까. 물론 이 장소가 창의적인 실험성 이전에 거대한 극장성의 요소, 즉 스펙터클을 지니고 있음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요소를 거리예술의 미학에 보탬으로 잘 활용한다면, 이 산업유산은 그제야 신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공간은 입주부터 지속 관리에 이르기까지, 타당성과 적합성 여부를 묻는 질문들이 끊임없이 제기되기를 바란다. 외관상으로 어떻게 변하든지, ‘여기’ 가 거리예술의 창의적인 토론장이 되고, 시의적절한 생각들과 말들이 오가는 자리가 되기를! 더 많은 고민을 가지고 나이를 먹어갈 구의취수장의 화창한 앞날을 기대해본다.
사진제공_서울문화재단, 김태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