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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은 거리에 나서서 영어를 듣기까지 꽤 시간이 걸린다. 그만큼 뉴욕에는 뉴요커보다 관광객이 더 많이 눈에 띈다는 얘기다. 2012년에는 5,200만 명의 관광객이 뉴욕에 다녀갔고, 370억 불이 뮤지컬, 오페라, 박물관, 호텔, 교통, 쇼핑 그리고 먹거리(gastronomy)에 쓰였다.(NYC&Company 2013년 자료) 지난 10월, 미 연방정부의 셧다운(shutdown)이 2주째 접어들던 시점, 뉴욕 주정부가 연방정부 대신 일일비용을 담당하기로 하고 예산을 집행한 곳은 바로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국립공원이었다. 왜일까? 자유의 여신상 국립공원은 연간 방문자 3백만 명을 넘기는 주요 관광 수입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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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트패킹 지구
1) 본래 육가공업체가 밀집한 지역으로, 고기를 실어 나르는 철로가 있었다. 1990년대 후반 업자들이 떠나면서 재개발되었고, 지금은 각 분야 예술가들의 작업실과 갤러리, 명품 부티크, 레스토랑, 카페, 클럽 등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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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시에는 그 외에도 750개가 넘는 시정부 소유의 공원이 있다. 그중 작년 약 450만 명이 다녀간 ‘하이라인(The High Line)’은 맨해튼 서쪽 허드슨 강을 따라 미트패킹(Meatpacking)1)부터 34가를 잇는 화물 철도를 개조해 만든 공원이다. 하이라인은 1980년 마지막 기차가 지나간 후 사용을 하지 않아 철거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에 공간을 지켜내고자 1999년 지역 주민인 조시 데이빗과 로버트 해먼드가 그 보존과 재사용을 위한 아이디어를 냈고, 2002년 시의회의 허가를 받아 2009년 지금의 모습으로 개장했다. 700개가 넘는 전 세계 건축과 조경 회사들의 디자인 공개 입찰을 통해 조경은 제임스 코너 필드(James Corner Field Operations)가, 건축은 딜러 스코피디오 + 렌프로(Diller Scofidio + Renfro)가 당선되었다. 갱스부르(Gansevoort) 가에서 20가를 잇는 섹션1은 2009년 6월, 30가까지 연결하는 섹션2는 2011년 6월에 개장했고 지금은 34가까지 C자형으로 이어진 섹션3이 한창 공사 중에 있다. 약 3층 높이의 계단을 올라가야만 철도 길을 따라 공원이 시작되는 그야말로 하늘 위 공원인 하이라인. 그 물리적 공간보다 그곳을 더 특별히 만드는 ‘예술과 사람 그리고 문화’에 대해 들여다보자.
하이라인의 ‘예술’
▲ (왼쪽부터) 하이라인 우측 건물 벽에 전시된 엘 아나추이의 작품 〈부서진 다리 ll〉 © Ken Goebel
하이라인 인근 건물에 영사된 로만 시너의 작품 〈카약〉 © Timothy Schenck
프랭크 벤슨이 만든 실제 사람 크기 여성 동상 〈제씨〉 © Timothy Schenck
작년 말, 꽤 이른 아침이었다. 하이라인을 지나는데, 21가쯤 옆 건물에 사람들이 녹슨 메탈과 거울처럼 보이는 조각들을 이어붙이고 있었다. 그전에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온갖 잡동사니를 이어 붙여 텍스타일처럼 작업한, 사실 아름답지 않지만 한번 보면 잊기 힘든 엘 아나츠이(El Anatsui)의 〈지구와 하늘 사이(Between Earth and Heaven)〉를 봤던 터라 저 작업이 그 작가의 작품이라면 버려진 철도 길을 예술적 공원으로 재탄생시킨 하이라인에 적격이라 생각하며 무릎을 쳤다. 일주일 지나 다시 지나게 된 하이라인엔 작업을 마친 작품이 그날따라 강한 햇빛에 반사되어 더욱 선명한 이미지로 걸려 있었다. 작품은 엘 아나추이(El Anatsui)의 〈부서진 다리 ll(Broken Bridge ll)〉라고 했다. 가나 출신의 작가인 아나추이가 2012년 파리 트리엔날레에 출품한 작품으로, 2012년 11월부터 1년간 전시한 뒤 지금은 하이라인에서 철거된 상태다. 그뿐 아니다. 해가 질 무렵 허드슨 강의 석양을 등지고 22가 계단에 앉으면 로만 시너(Roman Signer)의 〈카약(Kayak)〉이 건너편 건물에 영사된다. 좁은 자갈길을 카약을 타고 달리는 모습을 다룬 작품으로 역시 하이라인과 연관성이 있다. 이곳엔 존 케이지(John Cage)의 작품이 전시되기도 했다. 남쪽으로 조금 더 걷다 보면 14가로 내려가는 계단 바로 전 프랭크 벤슨(Frank Benson)이 만든 실제 사람 크기의 여성 동상인 〈제씨(Jessie)〉가 기다린다. 제씨는 운이 좋은 날 선물을 받기도 하는데, 어떤 날은 삐딱하게 벌린 팔에 노란 해바라기가 안기기도 하고, 어떤 날은 음료수나 과자 봉지가 들리기도 한다. 이 작품은 작가 9명의 그룹전인 〈버스티드(Busted)〉의 일환으로, 마치 숨은 그림을 찾듯 하이라인을 따라 각각의 동상이 공공장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살피며 감상하면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 외 하이라인 옆 주차장의 커다란 빌보드에도 파크 패스트(Park Fast) 주차장의 후원으로 작품이 전시된다. 11월부터 한 달간은 토마스 디맨드(Thomas Demand)의 〈하이라인(High Line)〉을 즐길 수 있다. 하이라인에서는 열거한 비주얼 아트뿐 아니라, 트리샤 브라운 댄스 컴퍼니(Trisha Brown Dance Company), 시몬 포르티(Simone Forti) 등의 퍼포먼스가 열리기도 해 끊임없이 예술을 접할 수 있다. |
파블로 브론스테인(Pablo Bronstein)의 막간극(Intermezzo)〈야자나무 위에서 패션 의류를 착용한 두 소녀(Two girls wear fashion garments on a palm tree)〉 © Liz Li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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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라인의 ‘사람’
하이라인의 단골로서 더 놀라운 것은 주말에도 너덧 명의 스태프들과 꼭 마주친다는 것이다. 이들은 레인저(Ranger), 즉 공원 관리원들로서 철도길 혹은 알파벳 ‘H’가 인쇄된 셔츠를 입고 다니며 공원 구석구석을 돌본다. 이들이 소속된 단체가 바로 ‘프렌즈 오브 하이라인(Friends of High Line)’, 데이빗과 해먼드가 1999년에 만든 비영리조직이다. 이들은 시정부 소유의 공원인 하이라인의 운영비 90퍼센트를 펀딩(funding)을 통해 직접 충당한다. 도시 계획 관련 세미나에서 만난 두 명의 창립자는 한눈에도 재치가 뛰어난 장난꾸러기 같아보였다. 공적인 자리에서도 시의회(City Council)의 허가를 받은 후에는 하이라인을 시정부에 넘겼어야 했다는 농담을 주고받았는데, 1999년부터 2009년 첫선을 보이고 지금까지 하이라인을 지켜온 이들의 노고가 그대로 전해졌다. 그리고 위에서 열거한 예술 작품은 하이라인의 퍼블릭 아트 프로그램인, 알파벳 ‘A’를 로고로 써서 ‘Art’를 강조한 ‘하이라인 아트(High Line Art)’에서 책임진다. 담당 큐레이터인 세실리아 알레마니(Cecilia Alemani)와 5명 남짓한 작은 팀이지만 빌보드, 커미션(주로 대형 아트워크는 커미션을 통해 전시), 채널(미디어아트가 영사되는 공간), 퍼포먼스 등의 예술 작품을 큐레이팅하여 하이라인이라는 장소의 의미를 톡톡히 만들어가고 있다. 하이라인 아트는 프로젝트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도널드 멀른 주니어(Donald R. Mullen, Jr.), 뉴욕 시정부(New York City Department of Cultural Affairs, New York City Department of Parks & Recreation), 뉴욕 주정부의 도움 및 브라운 재단,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David Zwirner Gallery), 바이탈 프로젝트 펀드(Vital Projects Fund) 등의 민관 파트너십을 통해 그 예술 작품을 채워나가고 있다.
하이라인의 ‘문화’
프렌즈 오브 하이라인은 하이라인 바로 옆에 헤드쿼터를 만들어 11월에 전 직원이 이사를 한다. 지금도 30가에서 34가로 이어지는 섹션3을 연장하기 위해 디자인, 펀딩, 프로그램 등의 노고를 아끼지 않고 있는 하이라인은 2009년 지어진 이후, 29건의 주요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 1만 2천 개의 일자리 창출, 2,558개의 주거지, 그리고 1천 개의 호텔룸 건립을 통해 20억 불이 넘는 경제적 가치를 만들었으며, 2007~2011년 사이 6,500만 불의 세금 이익을 보았다고 한다. 게다가 코치, 로레알, 구글, SAP, DVF 등의 뉴욕 사무소가 들어섰거나 들어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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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Pierre Bourdieu, The Forms of Capital,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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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Place)’란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다분히 문화적, 인간적, 사회적인 의미를 띤다.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주요 자본을 정의할 때 경제 자본뿐 아니라 문화, 사회 자본까지 포함하며, 특히 문화 자본은 체화, 객관화, 제도화의 과정을 거쳐 축적된다고 설명했다.2) 하이라인처럼 이미 체화된 문화를 지닌 커뮤니티의 경우 사람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돼 있으며 활기를 띤다. 이 경우 정책이나 투자 결정에 있어 시민들의 참여가 자연스럽고 이해 관계자들의 동의를 얻어내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실제로 하이라인에 기부한 금액이 2010년 1,300만 불에서 2011년 2,400만 불로 두 배 성장한 것이나(Friends of High Line 990 Form 참조), 일자리 창출, 부동산 개발 등의 경제적 효과 창출을 보면 그 문화적 자본의 힘을 잘 알 수 있다.
하이라인을 개발한 과정은 흙 속의 진주를 발견한 것과 같다. 진주를 품고 있던 공간의 흙을 잘 털어내고 문화적 자본이 풍부한 장소로 지은 것이다. 한국에서도 버려진 산업공간을 문화공간으로 재해석, 활용하는 예가 많다. 어떤 곳이 진주를 품고 서는지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진주가 가치를 더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퍼블릭 아트나 문화 프로그램으로 그 커뮤니티에 활기를 불어넣을지 하이라인의 예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진제공_하이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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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장선문은 서강대를 졸업하고, 금강기획, 미국 광고 대행업체(Leo Burnett), LG전자 서울 및 미국 지사 글로벌 마케팅 전략부서에서 근무했다. 현재 뉴욕 프랫(Pratt) 대학원에서 예술문화경영(Arts and Cultural Management)을 전공하고 있으며, 뉴욕시공원재단(City Parks Foundation) 예술문화프로그램(Arts and Cultural Program)팀에서 근무 중이다.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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