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 안에 관객을 사로잡는다’

‘연극은 세상의 거울’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거울은 있는 그대로 비추지 않는다. 오히려 거꾸로 보여준다. 거꾸로 말하기 때문에 연극은 매혹적이다. 무대에 오른 배우가 관객을 향해 교훈을 늘어놓는다면 얼마나 따분할 것인가. 좋은 연극은 관객 스스로 묻게 만든다. ‘저렇게 살아도 되는가?’라고.

10년 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말리 극장(Maly Drama Theatre)에서 연출가 레프 도진(Lev Dodin)을 만났다. 피터 브룩(Peter Brook),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 아리안 므누슈킨(Ariane Mnouchkine)에 이어 유럽연극상을 받은 거장인 그는 “시간 욕심을 낼수록 인간은 주어진 시간도 제대로 못 쓴다. 당신이 오늘 인터뷰 약속 시간에 늦은 것도 자동차 때문이 아닌가”라면서 “세상이 빨라지고 복잡해질수록 연극은 더 천천히 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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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나가와 유키오

일본 연출가 니나가와 유키오(蜷川 幸雄, Ninagawa Yukio)가 올린 <무사시(ムサシ, Musashi)>를 보면서 그 두 가지가 떠올랐다(3월 21~23일, LG아트센터). 거꾸로 말하기와 천천히 가기. 적어도 대학로에 흔해빠진 휘발성 코미디나 눈물을 짜내는 멜로드라마엔 없는 미덕이 이 연극엔 있었다. 세상을 어떻게 비추는지,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를 배울 수 있는 무대였다.

니나가와 유키오는 &lsquo;3분 안에 관객을 사로잡는다&rsquo;라고 호언하는 연출가이다. 살짝 그 비법이 궁금하면서도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은 사실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니나가와 유키오는 기자회견에서 &lsquo;왜 3분 원칙을 세웠는가&rsquo;라는 질문을 받고 &ldquo;관객 중에는 직장에서 퇴근하고 온 사람, 슬픈 연애를 하다 온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 않겠는가&rdquo;라며 &ldquo;그들이 무대 속 세계에 몰입하는데 긴 시간이 걸리면 곤란하다&rdquo;고 답했다. 이는 지당한 말씀이다. 탑승객 역시 여객기가 얼른 활주로를 박차고 이륙해 정상궤도에 진입하기를 바라니까.

극장 밖 일상으로부터 단절

<무사시>의 무대는 결투 장면으로 시작한다. 큼지막한 태양이 떠 있고 파도 소리가 들리는 해변. 1612년 일본 에도 시대의 검객 사사키 코지로는 한나절이나 기다려 당대 최고의 무사 미야모토 무사시를 만난다. &ldquo;왜 늦은 거냐? 겁이 나서?&rdquo;라면서 칼집을 버리고 칼을 빼든다. 하지만 무사시는 노련하다. &ldquo;이 승부는 네가 졌다. 칼집을 던졌으니까&rdquo;라고 응수하며, 말(言)을 무기로 쓴다. 결국 결투는 무사시의 승리로 끝나고, 이어 빽빽한 대숲이 등장하는 무대가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이내 대숲은 밀물처럼 객석 쪽으로 돌진하는가 싶더니 좌우로 미끄러졌다. 안개 속에 독경(讀經) 소리가 겹쳐지면서 떡하니 보련사(宝蓮寺)라는 절이 나타난다. 흡사 일본 전통극 노(能)의 무대를 보는 것 같다. 황홀한 장면 전환이다.

&ldquo;관객이 온전히 생각에 잠길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는 게 극장의 역할&rdquo;이라고 레프 도진은 말했다. <무사시>는 막이 열리자마자 관객을 극장 밖 일상으로부터 단절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가 말한 첫 3분의 마법이다. 일단 관객의 눈길을 낚아채면 그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절을 배경으로 선택한 것은 지혜로웠다. 산사야 말로 일상과 가장 동떨어진, 검투와는 달리 매우 정신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관객은 전쟁터나 다름없는 삶을 잠시나마 잊게 된다.

이어지는 장면은 경사스런 낙성식(落成式). 여기에 보련사 주지 스님 헤이신 이외에도 교토 대덕사의 장로 스님 다쿠앙, 쇼군 가문의 정치 고문인 아규 무네노리, 공사 감독을 맡았던 무사시, 여성 후원자 두 명이 참선 중이다. 그런데 별안간 코지로가 나타나 무사시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2200일, 그러니까 6년 만의 재회다. 하지만 극장엔 긴장은커녕 웃음이 흥건하다. 자그마치 길이가 10장에 이르는 도전장, &ldquo;소금으로 이를 하얗게 닦고 머리를 감아라. 관에 들어갈 채비를 하고 오라&rdquo; 며 건네는 대사 역시 희극적이다.

<무사시>의 부제를 붙인다면 &lsquo;두 검객의 싸움을 막아라&rsquo;쯤 되려나. 아규 무네노리는 자신의 양 발을 각각 무사시와 코지로의 발과 묶고, 두 검객의 다른 발을 두 스님의 발과 묶는 꾀를 낸다. 이를테면 5인 6각이 된 것이다. 이들은 엉거주춤 한 덩어리로 움직이게 되면서 누군가의 가랑이가 찢어지는데, 그 불편함이 주는 웃음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정겹다. 이 대목에서 무사시는 코지로에게 &ldquo;말(言)은 무사가 지닌 최초의 무기, 최고의 무기&rdquo;라고 말한다. 이 문장에서 &lsquo;무사&rsquo;를 &lsquo;연극&rsquo;으로 바꿔도 무방해 보인다. 연극 또한 혀를 무기로 쓰니 때문이다. 이는 연극의 솜씨에 대한 비유로 읽고 싶어지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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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lsquo;죽는다&rsquo;는 사실이 삶을 바꾼다

<무사시>는 영국 바비칸센터(Barbican Centre), 미국 링컨센터(Lincoln Center)를 비롯해 세계 무대에서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니나가와 유키오는 셰익스피어 희곡을 공연할 때도 &lsquo;일본색&rsquo;을 담는다. 노(能), 대나무, 수묵화 같은 요소로 물리적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면서 극의 정신을 보여준다. &lsquo;폭력은 폭력을 부를 뿐이니 용서하라&rsquo;란 메시지는 단순해도 보편적이다.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Independent)는 &ldquo;<무사시> 놀라움에서 철학적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마법 같은 작품이다&rdquo;고 썼고, 싱가포르 공연에서는 &ldquo;전설적인 검객, 명예를 건 결투를 다뤘지만 니나가와 유키오의 연출은 온화하고 웃기다. 삶의 가치를 증명해주는 연극&rdquo;이라는 평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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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과 2막의 첫 장면은 잠언에 가까워 간명하다. 이 드라마는 목숨을 건 싸움을 다루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정신과 삶을 칭송한다. 각 인물의 감춰진 사연이 하나씩 풀리는데, 무사시와 코지로의 싸움을 뜯어말리는 겹겹의 극중극과도 같기도 하다. 보련사 후원자인 오토메는 무사시의 묘책(&lsquo;무대책의 대책&rsquo;)에 따라 기습공격으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 하지만 오토메는 (恨)이 풀리기는커녕 되려 두터워짐을 느낀다. 이어 다쿠앙 스님은 &ldquo;마음 속에 3가지 독(毒), 욕심과 분노, 어리석음이 있다&rdquo;면서 무사들의 살생을 꾸짖는다.

산다는 것은 평생 욕심과 분노, 어리석음에 맞서 평정심을 지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2005년 스탠퍼드 대학에서 한 연설에는 삶과 죽음의 대칭이 있다. 그는 &ldquo;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lsquo;오늘이 죽기 전 마지막 날이라면 뭘 할까&rsquo; 자문한다. 췌장암 진단을 받은 뒤 나는 늘 죽음을 마주하며 살고 있다&rdquo;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ldquo;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 모두의 종착지다. 인생에 이보다 훌륭한 &lsquo;발명품&rsquo;은 없다. 곧 죽는다는 사실이 삶을 바꾼다.&rdquo;

잡스의 말이 이 연극에도 적용된 것일까. 무사시와 코지로를 뺀 나머지 인물들은 둘 중 한 명이 결투로 죽는 것을 막느라 혼신을 다해 동분서주한다. 살인을 저지르거나 아이를 낳아 버린 과거를 참회하는가 하면, 막장 드라마에나 등장할 법한 &lsquo;출생의 비밀&rsquo; &lsquo;모자(母子) 상봉&rsquo; 수법도 동원된다. 그리고 결투 전날 밤. 무사시는 코지로를 깨워 &ldquo;함정에 빠진 것 같다&rdquo;면서 &ldquo;그들을 물리치려면 우리가 싸우는 길밖에 없다&rdquo;고 말한다.

결국 무사시와 코지로는 기어이 칼을 빼든다. 그러자 갑자기 번개가 치고 숲이 흔들리고 나무가 쓰러진다. 살아라, 죽지 마라, 울어대는 것 같다. 지나간 인물들이 전부 유령이 돼 나타난다. &ldquo;바보, 멍청이, 천지, 아까운데&hellip;. 소중한데&hellip;.&rdquo; 시간을 엿가락처럼 길게 늘인 슬로모션으로 움직이면서 속내를 고백한다. 목숨을 버린 게 경솔한 짓이었다고. 살아 있을 때 삶을 너무 하찮게 여겼다고. 아무리 슬프고 외로운 날이어도 죽음보다는 낫다고. 그 진실을 전하고 싶었다고. 극장을 나서는 마음이 소슬해진다.

사진제공_LG아트센터

필자사진_ 박돈규 필자소개
박돈규는 조선일보 문화부에서 8년간 공연을 취재했다. 현재는 출판 담당 기자다. 대학에서 미생물학과 불문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2006년 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가 선정하는 올해의 기자상을 받았다. 저서로 에세이 『뮤지컬 블라 블라 블라』가 있다.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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