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여느 도시들과는 사뭇 다른, 잘 닦인 도로와 독특한 현대 건축물들이 늘어선 로테르담의 거리 위에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듯 갈라진 돌들이 깔렸다. 거리 끝에 세워진 조형물 안의 모닥불을 둘러싼 사람들은 그 위에 걸린 하얀 유리구를 바라보며 전설 같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억새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걸어나가자 흑백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오래된 버스와 트램이 종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돋보이는 미술관 안에서는 불에 타 녹아내린 듯한 검은 샹들리에가 빛나고 있었다.

한밤중의 자연사 박물관을 그린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 (2006)와는 많이 달랐지만, 지난 3월 8일 네덜란드 로테르담에는 영화만큼 멋진 풍경들로 가득한 또 다른 뮤지엄에서의 밤(Night at the museum)이 있었다.

미술관의 밤, 밤의 예술축제

티켓 대용 LED 배지 밤의 예술축제를 즐기는 인파

▲티켓 대용 LED 배지와
밤의 예술축제를 즐기는 인파
(사진출처: 로테르담 뮤지엄나잇 홈페이지)

2002년부터 시작된 로테르담 뮤지엄나잇(Rotterdamse Museumnacht)은 로테르담 내의 50여 개의 뮤지엄과 갤러리가 한밤중까지 문을 여는 단 하룻밤의 페스티벌이다. 기존의 전시와 함께 다채로운 워크숍과 공연 등의 프로그램이 밤 8시 반부터 시작하는 이 행사는 쇼핑 거리의 가게들이 대여섯 시면 문을 닫는 이곳에서는 이색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밤 11시가 넘은 시각에도 문화의 거리 비테 데 비트(Witte de with)와 뮤지엄파크(Museumpark)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온 가족부터 관광객까지 많은 사람으로 가득하고, 도시 곳곳의 미술관 근처 카페와 펍들은 야외에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빈다. 티켓 대신 사용하는 모든 미술관, 갤러리와 워크숍에 입장이 가능한 LED 배지가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옷 위에서 계속 빛나며 장관을 이룬다. 13회째를 맞은 2014년 로테르담 뮤지엄나잇에는 1만 2,500장의 티켓이 팔렸고, 추산 1만 5,000여 명이 방문했다고 로테르담 뮤지엄나잇 재단이 밝혔다. 로테르담에서 가장 유명한 보이만스 미술관(Museum Boijmans Van Beuningen)의 한 해 방문객이 30만 명 내외인 것을 고려할 때, 휴가철도 아닌 단 하루의 축제로써는 놀라운 수치다.

1997년 12개의 기관이 참여하여 시작된 베를린의 뮤지엄의 긴 밤(Lange Nacht der Museen)을 필두로 한 뮤지엄나잇은 유럽에서 이미 보편적인 행사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네덜란드 내에서만도 암스테르담, 로테르담, 레이든, 헤이그 등 중∙대형 미술관이 있는 주요 도시들은 모두 3월부터 11월까지 중 하루를 잡아 ‘뮤지엄나잇’을 개최하고 있다. 보통 저녁 7시쯤부터 시작하는 행사는 새벽 2시~3시에 끝나 애프터파티까지도 이어진다. 그야말로 밤을 새우며 예술을 만끽하고 즐기는 ‘밤의 예술축제’인 것이다.

‘밤의 예술축제’의 개념은 196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하얀 밤 축제(White Nights Festival)’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야 동안 발레, 연극, 오페라 등을 감상하는 이 행사는 유럽과 미국에서 온 2,000여 명의 관광객들을 모았다. 매년 10월 파리의 중요한 행사 중 하나인 ‘하얀 밤(Nuit Blanche)’ 역시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2002년 만들어져 가장 많이 알려진 ‘하얀 밤’은 입장료 없이 하룻밤 동안 파리의 미술관, 박물관, 시청, 심지어 수영장까지 대중에게 문을 열고, 각종 야외 공연들을 선보이는 행사이다.

롯본기 아트 나이트 2013의 모습

▲롯본기 아트 나이트 2013의 모습
(사진출처: 롯본기 아트 나이트 홈페이지)

유럽을 넘어 캐나다, 호주로까지 퍼진 이런 예술축제들은 파리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름을 따와 ‘하얀 밤(White Night)’ 혹은 ‘아트 나이트(Art Night)’라는 이름으로 언뜻 보면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지만, 기반이 되는 도시에 따라 그 분위기도 달라지며, 매해 정해진 주제를 통해 각 도시만의 특별한 행사로 자리 잡고 있다. 이웃 나라 일본 역시 2009년 모리 미술관을 비롯하여 신 국립 미술관, 산토리 미술관 등이 위치하며 예술의 거리로 알려진 롯폰기에서 롯폰기아트나이트(六本木アートナイト)를 개최하여, 작년에는 83만 명의 방문객을 모았다.

낭만과 현실, 그 사이의 모색

이러한 일련의 성공과 확산에도 뮤지엄나잇-밤의 예술행사에 대한 우려 역시 존재한다. 뮤지엄나잇이 새로운 관객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마케팅 수단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미술관 그 자체보다는 특별한 행사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흥밋거리에만 몸을 움직일 가능성이 높으며, 오히려 기존의 관람객들과의 간극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낭만적인 미술관의 밤 풍경 뒤의 현실 역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미술관 내부 전시물을 관람하는 관객들 미술관 외부 전시물을 관람하는 관객들

▲미술관 내외 전시물을 관람하는 관객들
(사진출처: 로테르담 뮤지엄나잇 홈페이지)

올해 로테르담 뮤지엄나잇 동안 로테르담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두 개의 미술관, 보이만스 미술관과 쿤스탈(Kunsthal)은 어둠 속에 잠겨있었다. 지난 1월 보이만스 미술관과 쿤스탈이 뮤지엄나잇을 위한 비용이 이익을 훨씬 웃돈다는 이유로 참가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두 미술관은 뮤지엄나잇을 위해 미술관의 추가적인 보안에 드는 비용을 각각 2만 5,000유로와 2만 유로 정도로, 예비비용을 1만 유로로 측정했다. 단 하루의 행사에 쓰기에는 미술관에 충분히 부담될만한 금액이다. 5~6시간 남짓 동안 미술관에 몰려드는 관람객들 역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연약한 예술작품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평소보다 많은 관람객을 받아들이는 것은 내부적으로도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작년 행사의 6시간 동안 보이만스 미술관은 1만 3,600명의 관람객을 받았다. 시간당 2,000명 이상이 입장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두 미술관은 다음 해 행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한정된 시간 안에 많은 관람객이 모이는 행사의 특성상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두 미술관의 재참여는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보안과 예비비용으로 추가적인 예산을 책정해야 하지만, 참여 미술관들은 주최 측으로부터 어떠한 보상을 받을 수 없다는 것도 문제이다. 티켓 판매 수익은 모두 뮤지엄나잇의 홍보와 야외 프로그램, 미술관과 미술관 사이를 오가는 교통편에 쓰인다. 게다가 워크숍 프로그램과 스태프 운영을 위한 지출 역시 고려해야 한다. 소규모 갤러리들은 물론이고 대형 미술관들로써도 행사 참여의 이익을 따질 수밖에 없다. 뮤지엄나잇을 통해 미술관들이 기대하는 것은 ‘새로운 관객의 개발’이지만, 막상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는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아 재방문에 대한 수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니 뮤지엄나잇이 과연 관객개발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암스테르담의 태도는 긍정적이다. 매해 관람객이 꾸준히 늘고 있으며, 특히 젊은 층의 참여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14회째를 맞은 2013년 암스테르담 뮤지엄나잇(N8)은 3만 매의 티켓을 매진시켰으며, 방문객의 77%가 18세에서 35세 사이의 젊은 연령층이었다. 전해의 티켓 판매량이 2만 7,000여 장이었기에 이러한 수치는 더욱 고무적이다. 특히 소규모 미술관들이 유명 미술관보다 더 많은 이점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젊은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관객개발이다. 암스테르담 뮤지엄나잇재단이 2010년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뮤지엄나잇의 관람객은 기존의 미술관 방문객들보다 젊고, 평소 미술관을 자주 가는 사람들과 거의 가지 않는 사람들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뮤지엄나잇 관람객의 절반이 이전에 뮤지엄나잇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도 흥미로운 결과이다. 게다가 뮤지엄나잇을 통해 이전에는 가보지 못했던 새로운 미술관을 발견할 것이라는 관람객들의 응답은 뮤지엄나잇이 보다 덜 유명한 미술관들에게 좋은 홍보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밤의 미술관을 발견하다

두 대형 미술관의 불참에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올해 로테르담 뮤지엄나잇 행사였지만, 거리로 나온 사람들 모두가 티켓을 구매한 것은 아니었다. 티켓은 구매했지만, 오히려 근처에 있는 펍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미술관은 곁눈질로만 바라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미술품들을 낯선 시간에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겠다는 욕심보다는, 이 비일상적인 하룻밤을 즐기고자 하는 분위기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처음 뮤지엄나잇을 경험하며 약간의 부러움을 느꼈던 것은, 배지를 달고 편안하게 거리 곳곳의 갤러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뮤지엄나잇이 미술관의 문턱을 낮춰주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활기를 띤 밤공기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었고, 미술관에 들어갔다 나오며 다음주에 다시 올 약속을 잡아보기도 했다. 사람이 가득한 미술관은 무거운 분위기보다 작품에 대한 순수한 즐거움과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밤의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미술관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언제나 무심결에 지나쳤던, 그곳에 있는지도 몰랐던 미술관과 갤러리들이 눈에 들어왔고,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새롭게 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살아 숨 쉬어도 이상하지 않은 ‘미술관에서의 밤’은 그렇게 새로운 풍경을, 즐거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필자사진_김참슬 필자소개
김참슬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과에 재학 중이다. [Weekly@예술경영]의 코디네이터로 활동하였으며 현재는 네덜란드 윌렘 드 쿠닝 아카데미(Willem De Kooning Academy)에서 교환학생 자격으로 공부하고 있다.

  • 페이스북 바로가기
  • 트위터 바로가기
  • URL 복사하기
정보공유라이센스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