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문화공간으로서 첫 숨을 틔운 문화골목의 초안은, 건축가 최윤식과 갤러리 관장 박봉련이 각자 꿈꾸는 공간에 대한 상상의 공감으로 시작되었다. 22억 원을 들여 경성대 앞의 주택 다섯 채를 사들여 벽을 허물고 리모델링해서 최윤식 대표의 공간 솔루션에 박봉련 대표의 문화 콘텐츠가 조화를 이루었다.

모퉁이 하나를 돌아 골목으로 접어들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전혀 여기에 있을 법 하지 않은 기묘한 공간이다. 사자의 얼굴을 한 목어가 입구에 달리고, ‘문화’라는 글자가 달필로 높은 종탑에 걸렸다. 좁은 골목으로 들어선 사람은 시야를 비집고 푸르게 가꾸어진 ㄱ자 정원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공간에 흠뻑 취하게 된다.

부산 사람 누구에게라도, 문화골목의 사진 몇 장을 보여주며 경성대 앞에 있는 문화공간이라고 설명하면 다들 놀라워한다. 경성대 앞은 연극이나 전시를 전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이름난 유흥가이고, 주말에 꼭 한 번씩은 경성대 앞 골목골목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어린 술꾼들도 문화골목의 존재를 생경해 할 정도로 그곳에선 낯선 공간이기 때문이다. 골목 입구에 바싹 붙어 지나치더라도 이 예쁘장한 골목 안에 공연장이나 전시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느 잘 사는 집의 담장 낮은 정원이거니 할 뿐이다.

지역자본으로 문화공간 만들어

문화골목 입구
문화골목 입구

문화골목 입구

2008년 ‘부산다운 건축상’의 대상을 받으며 지역 문화공간으로서 첫 숨을 틔운 문화골목의 초안은, 건축가 최윤식과 갤러리 관장 박봉련이 각자 꿈꾸는 공간에 대한 상상의 공감으로 시작되었다. 22억 원을 들여 경성대 앞의 주택 다섯 채를 사들여 벽을 허물고 리모델링해서 최윤식 대표의 공간 솔루션에 박봉련 대표의 문화콘텐츠가 조화를 이루었다. 대표 두 사람의 자산으로는 턱없이 모자란 건설비는 부산은행의 프로젝트 파이낸싱으로 충당했다. 불황에도 메세나를 중단하거나 규모를 줄이지 않는 부산은행은 문화골목 외에도 자갈치의 BS조은극장을 후원하는 등 지역문화에 대한 기여도가 높다. 그래서 문화골목은 순수한 부산 자본으로 살아남는 것이 가능했다.

80석의 객석을 갖춘 소극장 ‘용천지랄’과 채광이 살아있는 전시장 ‘석류원’을 필두로 2만장의 CD와 LP를 보유한 뮤직 퍼브 ‘노가다’, 전통술과 지짐이를 파는 ‘고방’, 앤티크 느낌이 나는 자개장 옆에서 위스키와 칵테일을 즐기는 오리엔탈 바 ‘색계’, 정원을 매장 안으로 일부 끌어 들여 커피와 와인을 갖춘 ‘다반’, 일본식 사케와 한국식 안주를 조화시킨 ‘몽로’, 단체 손님을 위한 노래방 ‘풍금’과 부산 외 공연, 전시팀을 위한 게스트하우스 ‘선무당’에 이르기까지 문화예술과 취기의 치맛자락에 폭 휩싸여 며칠 밤 달콤한 꿈을 꾸기에 충분하다.

공연과 전시를 사랑하는 이들 누구나 한번은 소망해봄직한 것들이 문화골목 안에 다 모였다. 흔히 비교되곤 하는 서울의 ‘인사동 쌈지길’처럼 소극장과 갤러리를 제외한 가게를 하나하나 분양했더라면 운영이 힘에 부치지 않았을 것이나, 문화골목의 힘 있는 자생은 그렇게 쉬운 길로 걷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 특별하다.

예술과 실무경영의 조화, 안정적인 운영에만 3년 걸려

돈을 받고 운영을 남에게 맡기자마자 골목을 하나로 아우르는 중심이 깨져버리기 때문에 공간 하나도 남의 손을 빌지 않았다. 두 명의 대표 아래 실무를 담당하는 총사(總士) 이동빈이 각각의 공간에 매니저를 두고 기업형 경영을 하고 있다. 문화공간의 흑자경영, 더욱이 부산에서 말이다. 문화공간을 상업공간과 절묘하게 결합시키지 않았다면 용천지랄의 공연 기획력에도 불구하고 1년을 존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치밀한 경영과 기획을 현재까지 늘 같은 속도로 유지하는 데는 냉철한 비즈니스 마인드가 필요했다.


전시장 석류원 퍼브 노가다
전시장 석류원 퍼브 노가다

초기 투자금액을 회수하는 일은 꿈도 못 꾸고, ‘이만하면 안정적인’ 경영을 해내는 데만 3년이 걸렸다. 부산시나 남구청에 비용의 지원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홍보에도 거의 무관심한 관의 태도는 좀 무심하다. 이동빈 총사는 건강한 수익을 내는 예술경영을 배우기 위해 부산의 교육기관들을 찾아다녔으나 그만한 실무경영을 예술과 접합시킨 곳을 찾기 어려웠다.

결국 일주일에 두 번씩 서울로 올라가 동국대학교 예술경영대학원을 다녔지만, 지역에 이런 예술경영 교육의 토양이 부족하다는 것이 더없이 아쉽다. 지방일수록 젊은 예술인들이 자생하기 어렵고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예술을 가르치는 학교는 부산에 많지만 학사 과정에 비즈니스 수업을 넣는 곳은 없다. 예술경영을 주체적으로 하려는 사람들이 필드에 나갔을 때 기본적인 생존의 메소드를 심어줄 수 있는 커리큘럼이 없는 것이다.

젊고 재능 넘치는 예술인들이 모두 수도권에만 밀집되는 것은 소비 계층이 두텁기 때문이다. 자연히 지역은 공동화된다. 단순히 문화에 관심을 갖자는 차원에서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근본적인 구조, 또는 지역이 가진 구조적 모순이 해결되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는 예술인 스스로에게 긴 시간과의 싸움을 의미한다.

부산이 처한 열악한 경제적 상황은 문화 향유를 사치스럽게 여기는 풍조를 낳았고, 공연과 전시를 찾아다니는 일은 먹고 살 만하니 하는 일 정도가 되어버렸다. 30~40대 중산층이 연극 몇 편을 보기 위해 지갑을 열 수 있는 일조차 쉽지 않다. 남천동부터 경성대 앞을 거쳐 광안리, 해운대로 이어지는 베드 라인(Bed Line)을 따라 소극장과 갤러리가 형성되어 있는 것은, 그래도 2~3만원 하는 공연비를 일상적으로 소화해낼 만한 소비층의 밀집 지역이기 때문이다.

공동운명체로서의 지역 파트너

용천지랄 소극장

용천지랄 소극장

문화골목의 용천지랄 소극장은 작년에만 280일 이상의 공연을 했다. 주로 지역에 있는 젊은 극단들의 공연이었다. 지역에 있기 때문에 도와주는 게 아니라 ‘같이 가는’ 마인드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 문화골목의 기본적인 토양에 배인 생각이다. 80% 이상 지역의 극단들과 함께 했지만, 100%를 채우지 못한 것은 365일을 다 채울 수 있을 만큼 공연을 꾸준히 할 수 있는 지역의 팀들이 적었기 때문이다. 적절한 공연팀을 찾아 레퍼토리를 실하게 채워도 공략 연령대를 고려해야 한다.

가마골 소극장이 중장년층을 고정적인 팬으로 확보하고 있다면 용천지랄 소극장은 공연하는 사람이나 공연을 보는 사람이나 20~30대가 많기 때문에 문화 주체가 능동적으로 움직여 그 시선을 맞춰야 한다. 홍보는 주로 트위터를 이용하고 있다. 초기에는 BS조은극장처럼 극장 팬페이지를 관리하는 방법을 시도했지만 필요 이상의 작업인 것 같아 일정을 홍보하는 트위터 주소라도 공연을 알리고 있다.

극단이나 공연팀의 팬층 형성은 긍정적이지만, 극장이 사람을 몰고 다니는 데 대해선 그리 내켜 하지 않는다. 극장이나 갤러리 때문이 아니라 거기서 공연내용이나 전시되는 작가를 보고 사람이 모여야 한다는 것이다. 초창기에 했던 메일링 서비스도 극단들이 각자 활발히 하고 있기 때문에 중단했다.

열정과 비즈니스 사이

문화골목은 비교적 안정권에 들어선 요즘도, ‘살아남는 게’ 목표다. 망하지 않고 꾸준히 유지하는 것. 그만큼 문화라는 타이틀을 달고 움직인다는 게 힘들다. 순수예술을 하는 사람들보다 자본을 갖춘 편인데도 자생이 힘들었다.

“아무리 좋은 걸 만들어놔도 사람이 찾아주지 않으면 존속이 힘들지요. 꽃도 이름을 붙여줘야 의미가 있잖아요.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이동빈 총사는 비문화인 출신으로 상업적이면서도 문화적인 공간을 완성시킨 사람답게 냉정하다. 문화에 대한 순수한 열정에서 시작되었던 문화골목의 경영 주체가 연세 지긋한 대표 둘에게서 그의 젊은 비즈니스 마인드로 대물림된 것 역시 문화소비와 공략에 대한 현재의 풍조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반영한다.

“미술도 문학도 지방대학에서 학사를 마치면 혼자 일어서기가 너무 힘들어요. 대학원이라도 서울로 가려고 수도권으로 다들 진출하잖아요. 학부를 졸업했을 땐 다들 의욕이 넘쳐요. 그런데 벌이가 안 되니까, 20대 때는 집에 신세지다 30대가 되면 전공을 포기하고 다른 일을 찾고 그러는 거죠. 서울로도 못가고 지역에서 성공하지도 못하니까요. 그래서 부산엔 30대 예술인이 적어요.”

문화골목 입구 문화골목 입구
문화골목 입구

척박한 지역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연히 형성된 사회 인식엔 문화골목이 지역에 가지고 있는 애착이 묻어난다. 올해는 더 다양한 콘텐츠들을 시도할 예정이다. 1년에 두세 차례 라이브 공연을 해왔지만 횟수를 더 늘리고, 저녁시간을 이용한 클래식 4중주도 기획되어 있다. 새로운 공연팀들이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게 극장의 외부작업이 더 활발해질 것이다. 최대한 지역 팀들로 내용을 꾸리게 될 것임은 물론이다.

6월 11일부터 8월 15일까진 극단 무대공감의 <열대야>가 공연된다. 무대공감 역시 전 연령이 함께 즐기고 공감하는 연극을 지향하는 공연팀이다. 2007년에 본격적으로 창단한 이후 연극 만이 아니라 오페라, 뮤지컬, 음악, 전통예술 등의 장르를 통해 다양한 연령층과의 접근을 시도하는 이 극단은 문화골목이 골몰하는 바와 여러 면모가 닮았다. 이 둘이 마주보는 면면에서 현재의 지역 문화 텃밭이 새롭게 구상하는 콘텐츠가 시작된다. 쉽게 빠졌다가 쉽게 질리곤 하는 20대가 득시글거리는 유흥가 한가운데서 무모하게 시작했지만, 30대를 매혹하는 문화 향유 공간으로 자리를 잡고, 40대에게는 익숙해진 노련한 기술로 관객몰이를 하고, 진득한 50대에겐 삶의 향기를 느끼게 하기 위한 공간으로 도약하는 문화골목 말이다.



김유리 필자소개
김유리는 드라마 원작의 소설 『옥탑방 고양이』를 썼고, 전방위 글쓰기를 지향하며 글쓰기 강좌를 활발하게 열고 있다. 로맨스 전문 출판사 키스더북스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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