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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선택마저도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현대미술에 대한 일반 대중의 생각도 이와 유사하다. 사람들은 미술을 미술가의 전유물로 여김으로써 오늘날의 미술에 참여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니콜라 부리요(Nicolas Bourriaud)를 일약 중요한 현대미술 비평가로 발돋움 시킨 『관계의 미학』은 바로 이러한 통념을 깨고 미술을 상호 교류의 장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에게 있어 “비평의 첫 번째 임무는 특정한 한 시기에 제기된 문제들의 복잡한 게임을 재구성하는 것과 그것에 주어진 다양한 대답들을 검토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예술의 실제적인 쟁점은 무엇이고, 그것이 사회·역사·문화와 맺는 관계는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것은 그에게 가장 큰 숙제이다. 여기에는 이미 미술과 현실을 하나로 보는 그의 관점이 투사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신념을 토대로 1990년대 예술이 사회적 맥락과 인간 사이의 상호 관계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것을 ‘관계의 예술’로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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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부리요 저, 현지연 옮김,
미진사,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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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이끄는 과정에 주목
관계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틈’과 ‘형태’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의 틀을 벗어나는 교환 공동체를 부르기 위해 틈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말하자면 지배적 사회 체계와는 다른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지칭하는 것이다. 부리요는 이러한 틈의 개념을 예술에 도입하여 그것이 ‘사회적 틈’으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는 모닝콜 서비스와 자동매표기로 대표되는 기계화가 필연적으로 관계적 공간을 축소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는 예술이 바로 이러한 지배적 현실에 일종의 틈으로 작용함으로써 또 다른 인간관계의 장을 열어준다고 말한다. 즉, 틈의 개념을 통해 부리요는 보다 자유롭고 열려 있으며 상호 인간적인 교류를 가능케 할 수 있는 예술의 오늘을 제안한다. 또한 그는 과거 형식주의 미학이 규정했던 ‘형태’의 개념이 아닌 ‘지속적인 만남’으로서의 형태 개념을 현대미술에 도입했다. 사실 형태란 고정적이고 물질적인 단일한 것이라고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그는 형태가 “평행한 두 요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탈과 우연적인 만남으로 태어난다”고 말하며 그것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이제 현대미술에 있어 형태는 고정된 불변의 어떤 것이 아닌 유동적이고 비물질적인 것을 포함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현대미술은 하나의 완결된 오브제를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대신 “의미로 이끄는 과정을 전시하고 탐색”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부리요의 틈과 형태 개념은 1990년대의 미술을 “자율적이고 배타적인 공간이기보다는, 인간의 관계 전체와 사회적 맥락을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출발점으로 삼는 예술적 실천 전체”라는 ‘관계의 예술’로 정의내릴 수 있는 배경이다. 따라서 그가 주목하는 예술가 세대들은 상호주체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전시의 공간 자체를 열려 있는 상호작용의 공간으로 간주한다. 요컨대 현대미술은 “관계의 시공간, 즉 매스 커뮤니케이션에서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의 구속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인간 사이의 경험들”을 창출하고자 하며, “일종의 대안적인 사회성, 비평적 모델, 구축된 상생의 순간들”을 생성시키는 과정을 보여준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관계의 예술이 지배적 사회 현실을 전복시키고 새롭고 단일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것은 전시라는 제한된 시·공간을 통해 형성되는 ‘마이크로 공동체’를 통해 다양한 관계의 가능성을 제시할 뿐이다. 부리요가 굳이 틈의 개념을 도입한 것도 그것이 “전체 체계에 그런대로 개방적이며 조화롭게 편입되면서, 전체 체계 안에서 현재 시행 중인 교환의 가능성과는 다른 가능성을 암시하는 인간관계의 공간”이라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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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마이크로 공동체로부터의 발현
관계의 예술의 이 같은 특성은 예술 작품에 있어 관객의 역할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만들었다. 작가는 이제 작품의 구성에 있어 관객을 빼놓을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작품은 작가에 의해 완성되어 제시되는 것이 아닌 관람객의 참여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변모했다. 부리요가 리크리트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나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Felix Gonzalez Torres)의 작업을 반복해서 언급하는 이유 또한 그것이 관람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필요로 하는 상호작용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전시에서 관람객은 단순한 응시자가 아닌 작품과 그것의 의미를 창출하는 참여자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된다. 이를 근거로 부리요는 예술 작품의 아우라가 관객을 향해 이동했다고 천명한다. 일찍이 벤야민은 기술복제로 인한 예술 작품의 아우라 상실을 주장했다. 아우라는 작품이 지니는 유일무이성에서 비롯되는데, 기술 복제는 그것을 소멸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리요에게 있어 이는 작품의 유일무이성이 오직 작가로부터 비롯된다는 전제에서 가능하다. 작품에 관객의 참여가 필수적이 된 이 순간 아우라는 그들로부터, 즉 전시라는 일시적 시·공간이 만들어낸 마이크로 공동체로부터 발현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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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크리트 티라바니자 <음식점의 요리> |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사탕드세요> |
우리 모두가 예술의 주체
지금까지의 논의를 미루어 볼 때, 부리요의 관계적 예술은 모더니즘 예술과 일종의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오늘날의 예술에 모더니즘적 잣대를―무의식적이든 아니든―여전히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동시대 미술이 지니는 특성과 상관없이 여전히 눈앞의 대상으로부터 선험적이고 결정적인 의미만을 취하려 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작품 앞에서 그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닌지 두려워한다거나, 미술을 여전히 어렵기만 한 무언가로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술은 관람객을 하나의 주체로 인정하고자 하지만 그들은 대화자가 아닌 응시자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관계의 미학』은 우리 모두가 작품의 의미를 생산하는 주체라고 강조한다. 즉, ‘작품을 통한 작가와의 만남’이란 말은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이해하고 수용한다는 일방향적 의미가 아니다. 특히 동시대 미술과 마주할 때 관객은 스스로 작품에 참여하고 그 의미를 생성해 나가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부리요의 『관계의 미학』은 그 중요성만큼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가늠하는 데 얼마만큼의 효용을 지니는지 의문인 것도 사실이다. 1998년에 프랑스에서 최초로 출판되어 2002년에 영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기에 2012년의 대한민국과 꽤나 큰 시간적, 공간적 거리가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질문해보아야 한다. 과연 현재 우리의 예술 또한 관계의 예술이라는 개념으로 포용될 수 있는지를 말이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부리요의 비평적 태도는 얼마간 수용할 필요가 있다. 그가 서문에서 밝혔듯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예술에 맞는 새로운 이론적 척도를 제안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의 예술이 우리의 현실과 맺고 있는 관계의 양상을 지속적으로 파악해 나감으로써 예술이 현실로부터 이탈된 사적이고 고립된 영역이 아님을 자각해야 한다. 이런 조건이 충족될 때, 관객은 예술작품과 예술가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며, 예술 또한 자기 안에 갇혀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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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장정민은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상명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디지털이미지학과에서 순수 사진을 전공했다. 2010년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주최 신인미술평론에 당선되었으며, 재단법인 광주비엔날레에서 근무하였다. 현재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viumgraphy@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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