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극장법 제정은 극장의 법적인 위상을 처음으로 명확히 한 점과 극장을 단순시설이 아니라 전문가가 필수적인 기관으로 정의한 점이 큰 의미를 지닌다.

지난 3년간 일본 공연계의 뜨거운 감자였던 극장법이 지난 6월 27일 드디어 의회에서 통과됐다. 정식 명칭이 ‘극장, 음악당 등의 활성화에 관한 법률’인 이 법의 취지는 간단히 말해 전국 공공 극장(한국의 문예회관에 해당)이 원래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국가와 지방자치제가 나서야 한다고 명시한 것이다.

그동안 일본에는 박물관을 대상으로 규정한 박물관법과 지방자치단체 및 공익법인이 설립한 도서관을 대상으로 한 도서관법 등이 있었지만 극장에 대한 법률은 없었다. 문화예술진흥기본법이나 흥행장법, 소방법 등에 다목적으로 이용되는 문화회관은 나오지만 공연을 실연하는 극장 자체를 정의하는 조항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도 마찬가지여서 극장에 대한 법적 근거는 문화예술진흥법이나 공연법, 문화예술교육지원법 등의 ‘문화시설’ 조항을 따르고 있다.

이번에 의회에서 초(超)당파 의원으로 구성된 음악의원연맹의 참의원(하원) 입법발의 후 중의원(하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극장법의 내용을 보면 “지역에서 극장과 음악당의 기능을 가진 시설의 대부분이 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문화회관이라는 이름의 다목적 시설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극장의 원래 목적인 공연 기획과 제작을 할 수 있도록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극장 운영 주체, 예술단체 등이 협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국가와 지자체는 극장과 음악당의 환경을 정비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극장의 법적인 위상을 처음으로 명확히 한 점과 극장을 단순시설이 아니라 전문가가 필수적인 기관으로 정의한 점이 큰 의미를 지닌다.

극장법 제정을 이끈 일본예능실연가단체협의회 홈페이지
극장법 추진에 앞장섰던 히라타 오리자

▲▲ 극장법 제정을 이끈
일본예능실연가단체협의회 홈페이지

▲ 극장법 추진에 앞장섰던 히라타 오리자

극장법 논의의 시작 - ‘극장활성화 프로젝트’ 연구

극장법은 2001년 12월 시행된 문화예술진흥기본법에 의거해 사단법인 일본예능실연가단체협의회(이하 예단협)가 발족시킨 ‘극장 활성화 프로젝트’ 연구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단협은 배우, 가수, 연주가, 무용가, 연출가, 무대감독 등 프로 실연자 단체로 구성된 민간 공익법인으로 1965년 설립됐다. 71개 단체가 정회원으로 가입해 있으며 산하 실연자 수가 9만 명에 이른다. 프로 실연자들의 권리와 예술 환경 개선을 위해 각종 정책연구와 국내외 사례 조사를 실시하며 일본 문부성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극장 활성화 프로젝트도 예단협이 문화예술진흥기본법 시행에 앞서 ‘연령과 성별, 주거지역 등에 상관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풍부한 문화예술을 체험할 수 있도록 문화에의 참여 기회가 보장되도록 문화예술기관에 법률적 지위를 줘야 한다’고 문부성에 제언한데서 비롯됐다.

예단협의 극장 활성화 프로젝트는 1980~90년대 버블경제 시대에 전국 각지에 지어져 2100여개에 달하는 공공극장을 활성화시키고 공연예술의 공공적 가치를 사회로 연결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위해 2003년부터 2008년에 걸쳐 극장과 관련한 다양한 연구가 행해졌지만 가장 시급했던 극장의 안전이나 무대 기술자의 연수 및 자격 문제에 가려져 극장법 자체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예단협이 2009년 3월 발표한 &lsquo;사회의 활력과 창조적인 발전을 만들어내는 극장법(가칭)의 제언&rsquo;에서 극장법이 구체화된데 이어 같은 해 9월 자민당을 무너뜨리고 정권교체에 성공한 민주당이 문화정책의 정비에 들어가면서 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특히 <서울노트> <과학하는 마음> <강 건너 저편에> 등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극작가 겸 연출가 히라타 오리자가 내각 관방자문관(한국의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비서관과 유사)에 임명되면서 예단협과 함께 극장법 논의를 본격화했다.

공공극장을 대관공간에서 &lsquo;만드는 극장&rsquo;으로, 도쿄가 아닌 &lsquo;지역&rsquo;으로

당시 극장법과 관련된 논의를 보면 대관이나 흥행을 위한 공간에 머무르는 공공극장을 창조적인 공간으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공공극장을 &lsquo;만드는 극장&rsquo; &lsquo;보는 극장&rsquo; &lsquo;교류 및 집회 시설&rsquo;로서 나눠 지원 방식을 다르게 한다는 계획이다. 무엇보다 현재 일본에 부족한 &lsquo;만드는 극장&rsquo;을 도쿄가 아닌 지역 곳곳에서 키우겠다는 것이다. 지역의 공공극장 가운데 일부를 제작 중심의 극장으로서 활성화하는 한편 이들 극장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의 작품을 유통시키겠다는 취지다. 사실 극장법은 문화청이 10년 전부터 실시해온 &lsquo;거점형성사업 지원&rsquo; 프로그램과 상당히 유사하다. 거점형성사업이란 도쿄에 집중돼있는 문화예술을 지역에서도 활성화하기 위해 지역의 문화회관, 극장, 미술관, 박물관 등이 시행하는 자체 기획 사업 및 제작공연 등을 지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단협이 극장법을 들고 나온 배경으로 일본의 &lsquo;지정관리자제도&rsquo;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지정관리자제도란 지방자치단체가 주민 복지를 위해 설치한 공공시설의 관리를 공공 또는 민간단체에 맡기는 것으로 2003년 지방자치법 개정에 따라 주민서비스의 향상, 행정비용의 삭감, 민간 노하우의 활용을 기치로 도입됐다. 그전까지 관리위탁제도의 수탁자가 공공단체에 한정돼 있었다면 지정관리자제도에서는 문호를 넓혀 민간도 맡을 수 있게 했다.
현재 일본의 극장, 박물관, 도서관 등 일본 전국 공립문화시설의 2/5 정도가 지정관리자제도로 운영되고 있으며, 그 수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지정관리자제도가 이렇게 빠르게 늘어난 것은 일본의 지역 공공극장이 대부분 도쿄에서 제작된 공연을 구입해 보여주거나 지역 단체에 대관하는 것을 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런 식의 극장 운영이라면 공무원이 직접 운영하기보다는 민간에 맡기는 것이 여러 면에서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지정관리자제도 도입 이후 일본의 공공극장들은 영업능력이 향상되고 관객중심의 의식이 제고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지자체가 이 제도를 너무 예산축소 방편으로 운영하다 보니 예술단체 입장에서는 예전보다 공연 환경이 가혹해졌다는 불만이 나온다. 여기에 최근 지역 공공극장들이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을 좀 더 끌어내기 위해 &lsquo;시민 오페라&rsquo;나 &lsquo;시민 뮤지컬&rsquo;처럼 시민 참가형 사업에 힘을 쏟다 보니 프로 예술가나 예술단체에 돌아갈 지원이 줄어든 것도 무시할 수 없다.

하시모토 토오루 오사카 지사
토오루 지사의 문화예술 파괴 행정을 비판하는 아사히 신문 기사에 포함된 표 - 하시모토 토오루 지사의 문화행정 관련 발언들

▲▲ 하시모토 토오루 오사카 지사
▲ 토오루 지사의 문화예술 파괴 행정을
비판하는 아사히 신문 기사에 포함된 표 -
하시모토 토오루 지사의 문화행정 관련 발언들

공연계 우려에도 불구, 지자체의 문화예산 삭감이 극장법 제정을 앞당겨

그러나 예단협이 추진해온 극장법이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공연계의 반응은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공공극장의 활성화를 위한 지원은 타당하지만 일본 공연계가 오랫동안 민간기획사과 예술단체 중심으로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배우좌나 문학좌 등 많은 지원금을 받는 대형 극단일수록 극장법에 반대했으며, 음악과 무용계 역시 연극과의 형평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또 일부 문화예술 관련 법률 전문가는 극장법의 내용이 지원금과 연관되어 있는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예단협은 극장법을 제정해도 극단에 대한 지원금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극장 환경에 따라 연극뿐만 아니라 음악과 무용 등도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해명했다. 또한 극장법의 명칭이 초래하는 오해를 없애기 위해 한때 &lsquo;사회의 활력과 창조적인 발전을 만들어내는 실연예술의 창조, 공연, 보급을 촉진하는 거점을 정비하는 법률(가칭)&rsquo;이라고 바꾸기도 했다. 그리고 각종 토론회나 세미나를 통해 공연계 관계자들을 설득하고 나섰다.

여기에 예단협이 워낙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지만 극장법이 예상보다 빨리 제정된 것은 최근 지자체들의 잇단 문화예산 삭감에 위기감을 느낀 예술가들이 동의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도쿄에 이에 일본 제2의 도시인 오사카는 하시모토 토오루 지사 취임 이후 재정난을 이유로 무차별적으로 문화예술 예산을 삭감했다. 공공 극장에서 공연을 올릴 예산이 없고 박물관은 전시를 기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문화예술의 존재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하시모토의 지사의 효율성 제일주의 원칙 아래 오사카는 점점 문화예술의 불모지가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극장법 제정 이후 남은 그러나 필요한 논의들

극장법이 시행되긴 했지만 극장과 음악당의 사업 활성화에 필요한 사항에 대한 지침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문화청은 10월까지 기본안을 만들고 공연계의 의견을 청취한 뒤 12월 중에는 확정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예단협은 최근 여러 차례 좌담회를 열어 극장법을 어떻게 활용할지 의견을 모으고 있다.

그런데, 극장법을 잘 읽어보면 그동안 예산을 삭감하고 효율성만 따져온 국가나 지자체가 극장의 활성화를 지원 하도록 권고하고 있지만 강제성이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국가와 지자체의 지원에 대한 내용도 없다. 이 때문에 극장법이 일본의 지역 공공극장의 발전에 큰 전기를 마련할 것이라는 기대감과 함께 공연계에 얼마나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지는 미지수라는 의견이 공존하고 있다.

따라서 극장법이 일본 공연계에서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킬지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다만 공연예술의 서울 집중 현상 해소와 지역 공공극장의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일본과 똑같은 고민을 가진 한국 공연계에게 일본 극장법은 앞으로 연구해야 할 대상인 것만은 분명하다.



<극장, 음악당 등의 활성화에 관한 법률 전문(출처: 일본 문화청)>

<기사 관련 링크>
일본 문화예술계에 파문을 불러일으킨 「극장법」(가칭)의 행방 (2010.08.11)
하토야마 신정부의 문화예술정책을 살펴본다 (2010.02.03)

장지영 필자소개
장지영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와 동 대학원(미술사 전공)을 졸업했고, 성균관대 공연예술협동과정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7년 국민일보에 입사해 사회부를 거쳐 문화부에서 오랫동안 공연예술과 문화예술정책을 담당했으며, 2009년 9월부터 1년간 한국기자협회 지원으로 도쿄대학대학원 문화자원학과에서 연수를 받았다.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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