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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정치인을 뽑으라면 단연 하시모토 도루(橋下徹·43) 오사카 시장이다. 변호사 출신으로 TV 법률 상담을 통해 유명해진 그는 2008년 초 자민당과 공명당의 공천으로 오사카부(府) 지사 선거에 출마, 38살이라는 최연소 나이로 당선됐다. 당시 5조2487억엔(약 75조원)에 이르는 엄청난 부채 때문에 파산 직전이었던 오사카부는 공무원 감축 및 임금 삭감, 낙하산 인사 철폐 등 하시모토 지사의 과감한 행정개혁 아래 2년 만에 흑자로 돌아서며 부채를 줄여가고 있다.
장기불황과 리더십이 부재한 정치판에 지친 일본 사회는 거침없는 언변과 행동력을 보여준 하시모토에 열광했다. 우파 성향인 그는 ‘독재자’라는 비판도 받지만 기성 정치인에 환멸을 느낀 국민들 사이에 점점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2010년 지방정당인 오사카 유신(維新)회를 설립한 그는 지난해 11월 오사카시와 오사카부의 통합을 기치로 자신은 오사카 시장에 출마하고 측근은 오사카부 지사로 내세워 압승을 거뒀다. 나아가 지난 9월 전국 단위의 신당 ‘일본 유신회’를 창당한 뒤 일본의 양대 정당인 민주당과 자민당으로부터 뜨거운 구애를 받고 있다.
문화예술 ‘파괴자’, 하시모토 도루
그러나 지금, 그는 문화예술과 관련해 일본 최고의 ‘파괴자’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가 지사 취임 이후 단행한 행정 개혁 가운데 문화예술 지원금의 대대적인 삭감과 문화예술 기관의 폐지가 포함돼 오사카를 기반으로 한 문화예술이 존폐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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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을 시찰하는 하시모토 시장
▲ 오사카인권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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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취임 초기 박물관, 자료관 등의 오사카부립 문화기관 83곳 가운데 도서관 2곳을 뺀 나머지 시설들의 필요성을 재검토한 뒤 대부분 예산을 삭감했다. 박물관 중 일본의 농경시대를 조망하는 야요이문화박물관, 고분문화를 전시하는 지카쓰아스카박물관과 센보쿠 고고자료관, 고대 토지개발을 보여주는 사야마이케박물관 등은 폐지가 결정되면서 당장 전시회를 개최할 돈줄마저 완전히 끊겼다. 이에 놀란 원로 학자들의 항의성명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고고학계와 역사학계 학자들의 저지 서명 운동이 벌어졌다.
하지만 하시모토 지사는 이런 집단반발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문화예술 시설뿐만 아니라 단체나 아티스트에 대한 지원도 대폭 삭감했다. 오사카에 있는 4개 오케스트라는 지원금 대부분이 깎였는데, 이 가운데 오사카부 문화진흥재단 소속인 오사카 센추리 오케스트라는 2011년부터 지원금을 전혀 받지 못해 현재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앞서 폐지가 결정됐던 박물관 4곳은 최근 지카쓰아스카박물관으로 통합이 확정됐다. 그리고 일본 내에서 차별을 받아온 부락민이나 재일한국인, 아이누족, 오키나와 주민, 한센병 환자의 인권 문제 관련 자료를 보관하고 전시해온 인권박물관은 올해를 끝으로 보조금이 완전히 중단된다. 인권박물관은 기업과 개인의 기부를 받아 운영하겠다는 방침을 밝히긴 했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될 것 같다. 이 외에 2014년에 착공할 예정으로 소장품까지 수천여점 모았던 오사카 시립 근현대미술관 건설 계획도 완전히 백지화가 되는 등 오사카의 박물관과 미술관은 하시모토의 칼바람에 떨고 있다.
문제는 문화예술 지원의 필요성에 회의적인 하시모토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사카 지역에서는 오사카 유신회가 이미 부와 시 의회의 과반을 차지한데다 오사카부 지사 역시 측근으로 앉히고 자신은 시장이 됐기 때문에 사실상 그의 독재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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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라쿠 극장 앞의 하시모토 시장
▲ ‘세계무형유산 분라쿠는 오사카의 자랑,
하시모토 시장은 보조금 삭감하지 말라’는
신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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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계 역시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가부키, 노와 함께 일본의 3대 전통예술인 분라쿠(文樂)는 하시모토의 등장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인을 위한 인형극인 분라쿠는 오사카 지방에서 탄생됐기 때문에 국립분라쿠극장도 오사카에 있다.
그런데, 지사 시절에도 분라쿠에 대한 예산을 반액으로 자른 바 있는 하시모토는 올해 오사카시 분라쿠협회에 대한 지원을 지난해보다 25% 삭감했다. 이에 대해 분라쿠협회가 성명을 내는 등 반발하자 하시모토는 협회에 지원금의 투명성에 대한 공개토론을 제안했다. 분라쿠협회는 “분라쿠를 이해하지 못하는 하시모토 시장과 토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입장이었으나 지원금이 아예 들어오지 않자 결국 10월 초 하시모토의 공개토론에 응했다. 하시모토는 “지원금은 세금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사용처가 확실해야 한다”고 훈계한 뒤 그제서야 지원금을 줬다.
하시모토와 분라쿠협회의 갈등은 최근 일본 문화예술계에서 최고의 핫이슈였다. 이와 관련해 일본 예술계와 지식층은 하시모토 시장의 예술에 대한 무지와 문화 경시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하시모토는 “지적(知的)인 척하는 사람들이나 오케스트라나 미술 이야기를 한다” “분라쿠 등 전통예술은 특권에 사로잡혀 있다” “문화는 행정이 지탱해주는 것이 아니다”며 맞섰다. 게다가 여론은 문화예술계보다는 하시모토 편이었다. 시민들 역시 ‘돈 먹는 하마’인 문화예술에 대해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최근 산케이신문도 사설을 통해 “하시모토 시장의 태도는 문화 경시로 비판받고 있지만 문화행정이 성역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세금을 투입하는 만큼 개혁을 요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라며 하시모토의 입장을 변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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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로 인한 문화예술의 위기, 그 해법은
현재 일본 문화예술계는 오사카에서의 문화예술 파괴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 일본 지자체 가운데 상당수가 재정난에 처해 있어서 ‘제2의 하시모토’가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데다 민주당과 자민당 사이에서 캐스팅보트를 쥔 하시모토가 가까운 시일 내에 총리가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하시모토의 등장에 따른 오사카 문화예술의 위기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에서도 지자체들의 재정자립도가 갈수록 악화돼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이 점점 줄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나 스페인에서 문화예술 지원을 거의 삭감하는 것을 보면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국가나 지자체에서 문화예술을 언제까지나 지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선 아직 오사카에서와 같은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공공 의존도가 매우 높은 한국 문화예술계에서 하시모토 같은 지자체 단체장이 등장하면 그 충격은 훨씬 클 것이다.
게다가 일본 문화예술계가 하시모토를 비판하는 것과 달리 시민들 가운데선 지지하는 목소리가 높은 것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한국 예술가들은 문화예술이 공공재인 만큼 국가나 지자체의 지원이 당연하다는 입장이지만 시민들도 과연 여기에 동의하고 있을까. 현재 한국에서 예술이 부유한 일부 계층의 향유물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예술가들이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술계가 지원금 사용 내역을 투명하게 관리하는지 등 한국 예술계도 일본 사례를 보면서 한 번 생각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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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장지영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와 동 대학원(미술사 전공)을 졸업했고, 성균관대 공연예술협동과정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7년 국민일보에 입사해 사회부를 거쳐 문화부에서 오랫동안 공연예술과 문화예술정책을 담당했으며, 2009년 9월부터 1년간 한국기자협회 지원으로 도쿄대학대학원 문화자원학과에서 연수를 받았다. 이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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