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을 비롯한 모든 예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양분이 필요하다. 그 분야를 구성하는 존재들의 각기 다른 제 역할을 통해 그 양분은 생성된다. 예술가들이 뜨겁게 작품을 뿜어내는 존재라면, 한편에서는 그 열정의 파편을 수거하여 정리하고 보존하는 존재가 있다. ‘공연예술학예사’라는 조금 낯선 직함의 김현옥은 공연예술의 자료를 수집하고 보존하면서 미래의 공연예술계를 위한 자양분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자료원에서 근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공연’의 자료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것은 조금 낯선 일인데요. 선생님에 대한 소개와 함께 하시는 일에 대해서도 알려 주세요. 저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자료원에서 공연예술 자료를 수집하고, 보존하고, 연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인 직함은 ‘공연예술학예사’이고요. 주로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을 담당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학예사라고 하면, 일반적으로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활동하는 기획자나 연구자들을 떠올리게 돼요. ‘공연예술학예사’의 주된 업무는 무엇인가요? 현재 우리나라에서 연간 진행되는 공연과 전시가 약 2만 건 정도 되거든요. 따라서 그에 대한 모든 자료를 수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조금은 무의미하기도 합니다. 그 수많은 정보 가운데, 어떤 자료들이 역사적, 예술사적, 정보적 가치가 있는지 선별하는 것이 공연예술학예사의 일이에요. 연구나 미래의 어떤 작업에 활용될 수 있도록 자료를 분류하고, 조직화하는 거죠.
수많은 정보 가운데, 어떤 자료들이 역사적, 예술사적, 정보적 가치가 있는지 선별하는 것이 공연예술학예사의 일이에요. 연구나 미래의 어떤 작업에 활용될 수 있도록 자료를 분류하고, 조직화하는 거죠.
공연예술은 오히려 아직 출판되지 않은 것들, 혹은 출판될 수 없는 것들이 훨씬 가치 있는 자료일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어, 연극의 창작 과정 전반에서 생산되는 대본, 연출 노트, 배우들의 기록물, 무대미술 자료 같은 거요.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수집 대상이에요.
문헌정보학을 공부한 사서나 미술관 큐레이터들의 역할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문헌정보학은 문헌, 인쇄물 중심의 자료 수집과 보존 활동이 대부분이죠. 반면에 공연예술은 오히려 아직 출판되지 않은 것들, 혹은 출판될 수 없는 것들이 훨씬 가치 있는 자료일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어, 연극의 창작 과정 전반에서 생산되는 대본, 연출 노트, 배우들의 기록물, 무대미술 자료 같은 거요.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수집 대상이에요.
그렇다면 지금 담당하고 계시는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자료들을 다루시나요? 구술채록은 스스로 남기는 ‘말로 쓰는 역사’라고 할 수 있어요. 근대와 현대를 살면서 활동했던 현장 예술가들을 찾아뵙고, 그들이 살았던 당대 예술계 이야기를 당사자의 입을 통해 담아내는 사업이에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들려주는 기억의 파편들이 쌓여 근현대 예술이라는 큰 퍼즐의 빈자리를 촘촘히 메워 간다고 보면 됩니다. 2003년부터 10년이 넘게 진행 중인 장기 연구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죠.
학예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계기나 동기가 궁금해요. 말씀을 들어 보니, 하나만 잘해선 안 되고 연구, 발굴, 수집, 전시 등 여러 가지 가능성을 아우르는 일을 두루두루 잘 알아야만 할 것 같은데요. 저도 처음부터 학예사 일에 관심이 있지는 않았어요.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했고 당연히 연기자가 되고 싶었거든요. 그냥 막연하게 연기를 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죠. 그리고 연기 전공이라 해도, 연출이나 극작, 기획 등에 대해 두루 배우잖아요. 저는 그 속에서 뭘 하든 항상 최고가 되고 싶어 하고, 주목받고 싶어 욕심을 내면서도 그만큼 노력은 안 하는 학생이었어요. 그러니 아무리 욕심을 내도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죠. 그런 가운데 공연을 하나씩 끝낼 때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만족도가 많이 떨어졌고요. 그리고 또, 한 편의 연극을 만들어 내는 일이 저의 정서나 신체적인 흐름과 맞지 않았던 것도 같기도 하고요.
▲ 수집 자료 초벌 분류 작업 중, 예술자료원 사진자료실, 2013
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정성을 바쳐야 연극 한 편이 겨우 만들어지잖아요. 자신의 성향과 하고자 하는 일이 맞는지 판단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이 든 이후에는 어떻게 하셨어요? 연출도 조금 해 보다가, 국립오페라단에 입단해서 정책과 근무도 해 봤어요. 연기, 연출, 또 극단 생활을 하면서 거의 10년 정도를 방황한 거죠. 그런데 그때마다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늘 따라다녔어요. 그러던 중에 예술자료원에서 최초로 공연예술 분야 학예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 됐죠. 왠지 지난 10년간 방황하며 축적한 모든 지식과 경험을 이 일에 쏟아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생각이 적중한 거네요! 질리지 않고 끝까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2010년에 입사했으니 올해가 6년 차인데, 지금까지 한 번도 지치지 않았어요. 연극할 때는 내 개인적인 일상이 없는 것, 계속해서 사람들과 협업하고 끊임없이 조율해야 하는 과정이 진짜 힘들었거든요.
▲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사업> 성우 김소원 선생 구술 현장, 2014 ⓒ 최정호
아무래도 작품을 만드는 것은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것을 반복하는 일이니까요. 정말 그래요. 그래서 결국은 사람과의 관계가 제일 중요한 일이 되는 거죠. 저는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편이라 그 점이 힘들었어요. 물론 제가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배우였다면, 그래도 연기자로 남았겠지만 저는 그만큼 노력하지는 않았거든요.
그래도 전공을 하셨고, 어떻게 보면 그것이 꿈이었는데 포기하실 때 아쉽지는 않으셨어요? 저는 오히려 짧았지만, 한때 하고 싶은 일을 했었다는 사실에 더 만족하고 있어요. 예술가로서 나의 재능과 개성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는 데 걸린 시간이 짧지는 않았지만, 결국 잘 맞는 일을 찾았으니까요. 지금은 좋아하는 공연을 일로 보게 되니까 또 그 점도 좋고요. 이 일이 제겐 더 맞는 일이에요.
연극을 전공한 것이 공연예술학예사로 일하는 데 도움이 되나요? 그럼요. 우리 공연예술사에서 어느 지점이 중요한지, 혹은 어떤 부분이 부재하는지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되죠. 예술의 본질, 특성, 역사적 측면에서 배우는 지식이 있으니까요. 반면에 부족한 점이라고 한다면 자료를 분류하고, 등록하고, 구분하는 것에 대한 기술이 없었던 걸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것은 문헌정보학이나 기록을 전공한 분들만 알 수 있는 그야말로 전문 분야에 해당하는 일이니까요.
▲ <연출가 임영웅과 고도를 기다리며 아카이브 展>(2014) ⓒ최정호
저는 오히려 짧았지만, 한때 하고 싶은 일을 했었다는 사실에 더 만족하고 있어요. 예술가로서 나의 재능과 개성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는 데 걸린 시간이 짧지는 않았지만, 결국 잘 맞는 일을 찾았으니까요.
그런 부족한 부분들은 어떻게 헤쳐 나가시나요? 자료원 내부에서 교육을 받아요. 내부 전문가가 없으니 외부에서 모셔 와 특별 수업도 진행하고요.
마지막으로, 공연예술학예사로서 그리고 있는 꿈에 대해 듣고 싶어요. 꼭 이 기관에서가 아니더라도 관련된 일을 평생 하고 싶어요. 좋아하는 예술가를 가까이서 만나고, 예술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또 내 지식을 축적해 나가는 일이기도 하고요. 단순히 물리적이고 반복적인 일은 분명히 아니거든요.
사진촬영_장우제
※ 참고링크 문화예술 청년, 인생 UP 지원사업 가이드 문화예술청년, 인생 UP 데이트: 문화예술선배 30인의 서른 가지 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