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동네에는 이런 말이 있다. “작가로 10년만 견디면 다음 10년을 작업하며 지낼 수 있고 그렇게 20년을 보내고 나면 나름 ‘성공’한 작가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까 힘들어도 버텨라”라고. 그러나 열정적으로 그림만 그린다고 해서 무조건 작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그런 삶을 살아가겠다고 선택했다면 작품 활동과 생활을 분리하지 않고 공존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10~20대의 경험에서 기인한 ‘불안’이라는 주제를 고양이 인간 캐릭터와 연극적 요소가 담긴 화면으로 그려 내는 성유진. 그는 고양이 인간 캐릭터가 주는 강한 인상 때문에 트렌드를 좇는 상업 작가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작품 촬영부터 프린트까지 작품 성향을 가장 잘 보여 줄 방법을 연구해 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포트폴리오를 제작하는 등 편견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해 온 작가이다. 이렇듯 그가 걸어온 지난 10여 년의 길은 아직 성공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는 이른 감이 있지만, 이제 막 작업만을 업(業)으로 삼으려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작가로서의 활동과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합치시키며 살아갈 수 있는지에 관한 이정표를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불교미술은 미술대학에서는 흔하지 않은 학과인데, 어떻게 이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나요? 종교적인 이유에서 불교미술을 선택한 것은 아니에요. 어머니를 따라 절에 몇 번 갔었는데, 겨울임에도 그곳에서 따뜻함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어요. 게다가 벽화나 불화처럼 건축물의 미술적 요소들이 흥미로웠고요. 마침 학교라는 공간에서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다기에 불교미술을 선택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막상 학교에 입학해서는 적응하지 못했어요. 교육 자체가 일반적인 미대와 달랐거든요. 도제식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모호한데, 상하 관계가 있었고 모든 그리는 방식을 선배들에게 배워야 하는 구조였어요. 모사가 기본인 불교미술의 특성 때문이죠. 게다가 공동 작업의 개념이 커서, 학교 동아리라든가 다른 활동은 차단될 수밖에 없었어요. 구속당한다는 느낌에 저는 그 울타리 밖에서 그림을 그릴 방법을 찾아야만 했어요.
이 시점에서 내가 뭔가를 선택하고 그 대가를 치른다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힘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어요. 1년 반 동안 사람들과 연락도 끊고 잠적하면서 내가 평생 죽지 않고 계속할 수 있는 것이 뭘까 고민했어요. 결국에는 작가로서의 삶을 선택하게 되었죠.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기였겠네요.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죠? 4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정했어요. 만약 불교미술학과를 졸업하면 관련된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이 시점에서 내가 뭔가를 선택하고 그 대가를 치른다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힘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1년 반 동안 절에 들어가 사람들과 연락도 끊고 잠적하면서 내가 평생 죽지 않고 계속할 수 있는 것이 뭘까 고민했어요. 결국에는 작가로서의 삶을 선택하게 되었죠.
한 해 배출되는 미대 졸업생 중, 전업 작가로 살아가는 이들은 굉장히 소수죠. 혹여 그렇게 결정했더라도 생계에 문제가 생겨 작품 활동을 중단하는 작가들도 많고요. 제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제 삶을 이어 가게 하는 생명 줄 같은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마냥 그림 그리는 게 좋아 그것만 바라보며 살기보다는 초기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1년 반 동안 잠적하던 시기에 첫 개인전을 해야겠다고 막연하게 결심했죠. 그런데 어떻게 전시를 해야 할지, 전시 공간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그림을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아무것도 몰랐어요. 미술 활동을 하는 선배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봤죠. 그런데 그들로부터 돌아온 답은 “너는 돈도 없고 인맥도 없기 때문에 작업하기 힘들 거야. 절대로 작업을 하면 안 돼.”라는 말이었어요. 그럼에도 저는 어차피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뭘 하든 올라가는 것밖에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기획서를 만들어 충무로 역사 내에 있는 영상센터 ‘오!재미동’을 찾아가 전시를 제안했어요. 그렇게 저의 첫 개인전 <아무도 모른다>(2006)를 열게 되었어요. 그 이후에는 전시를 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전시에 참여했던 것 같아요. 마침 여러 전시 공간에서 젊은 작가들을 위한 전시 및 프로그램이 많이 생겨나던 시기라, 많은 기회가 주어질 수 있었죠.
창작 지원 프로그램인 아트 레지던시에도 여러 번 참여하셨죠? 레지던시를 지원하게 된 것은 정말 작업실이 없어서예요. 제가 사는 집이 너무 좁아 옥상에 천막을 치고 그림을 그렸거든요. 그런데 레지던시의 더 좋은 점은 저와는 다른 성향의 작가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과 대화하며 작품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작가님의 작업은 고양이 캐릭터가 주는 강한 인상 때문에 대중에게 인기가 많잖아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부분 때문에 상업적인 작가라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을 듯해요. 저는 작업에 있어 일러스트와는 확실하게 경계를 둬요. 그러나 종종 작품을 직접 본 것이 아닌 온라인상의 작품 사진만을 보고 저를 일러스트레이터로 단정하는 사람들이 꽤 있죠. 그래서 이러한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작품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것에 공을 많이 들여요. 작품의 사진 촬영과 프린트를 업체에 맡기지 않고 장비를 구매해 제가 직접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죠. 이런 노력 덕인지 이제는 포트폴리오를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제 작품을 일러스트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어요.
▲ <성유진 개인전> 전경. 갤러리 아리랑. 2013
포트폴리오의 중요성은 거듭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부분이죠. 작가들은 이것을 굉장히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작가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 중 하나가 작품 활동과 관련된 포트폴리오 제작, 그리고 데이터 관리예요. 저의 경우 포트폴리오를 만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데이터 관리를 고려하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작품이 판매되거나 그림을 그리다 손실되면 그것을 찾을 길이 없기 때문이죠. 게다가 자기만의 체계적인 아카이브를 만드는 것은 굉장히 중요해요. 포트폴리오는 그 작가의 작업 정체성을 단시간에 대신해서 설명해 주거든요. 때론 이것이 작품 판매로 이어지기도 하고요.
▲ 성유진의 작품 포트폴리오. 아르코미술관 아카이브. 2012
작가님의 작품이 일러스트와 구별되는 지점 중 하나가 콩테라는 재료를 사용한다는 점이죠. 그런데 이 재료가 워낙 잘 번지고 가루가 손에 묻어날 정도로 캔버스에 고착시키기 어렵잖아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실험 과정을 거쳤나요? 제 그림이 콩테로 그려졌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쉽게 알아채지 못해요. 그래서 초반에 재료에 대한 설명을 많이 했죠. 첫 개인전 <아무도 모른다>를 지하철역에서 진행했다고 했잖아요. 그때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그림을 많이 만졌어요. 그 다음 손에 묻은 콩테를 그림의 흰 여백에 쓱 닦고 가곤 했죠(웃음). 그때 번지거나 묻어나지 않게 마감할 필요성을 느꼈어요. 1여 년간 콩테를 고착시킬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연구했죠. 정착액(픽사티브)을 대량으로 뿌리기도 하고, 송진이나 우뭇가사리 등 전통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했어요. 그렇게 노력하다 찾은 방법이 바니시[varnish, 도막형성(塗膜形成)을 위해 사용하는 도료]의 농도를 조절해 마감하는 것이었죠. 지금은 재료에 따라 농도가 달라지는 계산 방식이 생겼을 정도로 능숙해졌어요. 이렇게 연구하다 보니까 손가락으로 문질러서 아크릴 물감이나 유화 물감과 같은 효과를 내는 등 콩테로 작업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도 알게 되었어요. 이뿐만 아니라, 바탕제(캔버스)에 대한 테스트를 하게 되었어요. 작업 초기에는 광목천을 주로 사용했는데, 이것을 짜는 과정이 까다롭고 천의 밀도가 다양해서 콩테를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거든요. 그렇게 헤매다 찾은 바탕제가 현재의 ‘다이마루’라는 천이에요. 이중으로 된 천인데 신축성이 좋고 습도에 강해서 흩날리는 콩테 가루를 고정하기에 적합하거든요.
젊은 작가들에게서 “돈이 없을 때 어떻게 하느냐?”라는 식의 질문을 많이 받아요. 그때 저는 버티라고 말해요. 참 불편한 말이죠. 그 버팀이 오로지 그림만을 열심히 그리는 것을 말하진 않아요. 작업과 연관되어 만들 수 있는 콘텐츠가 있으면 그것을 활용하는 등 활동하는 부분에 집중하며 작업과 생활을 공유해 나가는 게 필요해요.
올해가 작가로 데뷔한 지 딱 10년이네요. 그동안 경제적으로 힘들지 않았나요? 젊은 작가들에게서 “돈이 없을 때 어떻게 하느냐?”라는 식의 질문을 많이 받아요. 그때 저는 버티라고 말하는데, 그게 참 불편한 말이죠. 저 역시 처음에는 공과금을 내지 못해 전기나 수도 등이 서서히 끊길 정도로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었어요. 2006년 첫 개인전 시점에 잠깐 아르바이트를 했거든요. 그런데 일이 끝났음에도 노동이 고되다 보니 보상 심리 때문에 그림을 안 그리는 거예요. 이렇게 하다 보면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게 되고 내가 작가로서 활동할 수 있는 범위가 줄어들겠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끊고, 힘들어도 내가 선택한 거니까 그림을 그리고 전시를 하자고 결심했죠. 그렇게 버티다 보니, 작품이 조금씩 판매되었고 그 돈으로 최소의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지금은 조금 남는 돈으로 작품을 위한 장비들을 사고 있고요.
휴대전화 케이스 브랜드와의 협업도 금전적으로 조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른 곳에서 아트 상품으로 만들자는 제의는 없었나요? 초반에 제안이 많이 왔는데, 대부분 거절했어요. 제가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에 있었던 일러스트와 회화의 경계에서 작업하는 이들이 나중에는 상업적인 요소로 인해 작품의 좋은 요소들을 잃어버리거나, 아트 상품 회사에서 사용되다가 버려지는 경우를 몇 년 동안 지켜봐 왔기 때문이죠. 순수미술을 아트 상품화하기에는 아직 수익 구조가 불안정하고 콘텐츠 개발도 안 되어 있어 쉽게 접근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휴대전화 케이스 브랜드인 ‘자니코’와 협업하게 된 것은 이전에 몇 번 같이 일한 적 있어서예요. 작가를 배려하는 기본 태도 등 자니코의 일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작가님의 경험에 비춰 봤을 때, 작가로서의 삶을 선택하려는 예비 청년예술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조언이 많을 것 같아요. 아르바이트하는 주변의 후배 작가들을 보면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하지만 안타까운 게 있어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다 보면, 보상 심리가 있어서 맛있는 것을 먹는다든가 여행을 간다든가 하는 등 그 돈이 생겨도 작업하는 데에 다 쓰지 않거든요. 그건 결코 작업에 도움이 되지 않아요. 서서히 작업과 생활이 멀어지게 되니까요. 정말 힘들 때 활동을 더 많이 하려고 노력하면 그것이 나중에는 더 큰 수입으로 돌아올 수 있어요.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이 오로지 그림만을 열심히 그리며 버티는 것을 말하진 않아요. 작업과 연관되어 만들 수 있는 콘텐츠가 있으면 그것을 활용하는 등 활동하는 부분에 집중했으면 해요. 힘들수록 움직이면 뭔가 나올 것이라 생각하거든요.
사진촬영_장우제
※ 참고링크 문화예술 청년, 인생 UP 지원사업 가이드 문화예술청년, 인생 UP 데이트: 문화예술선배 30인의 서른 가지 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