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먹다 친구들이 말했다. “인세인(insane, 제정신 아닌) 어떠냐?” 누군가 무심코 뱉은 말이었지만 그럴싸했고, 그날부터 인세인 박이 되었다. 7년 동안 학원 강사를 하던 어느 날 전업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했고, 이후 가난해도 작가의 길만 걸어가고 있다. 선택은 가볍고 즉흥적으로 하고 이후에는 그냥 쭉 밀고 나간다. 그러나 그의 작업물은 한마디로 정의되지 않는다. 정의될 것 같으면 딴 길로 가 버리기 때문에. 즉흥적인 듯 심오하고, 눌변인 듯 달변인 한마디로 정의되기 어려운 문제적 남자를 만났다.

한마디로 정의되지 않는 작가

“수식어가 뭔가요? 예를 들어 ‘OOO하는 예술가’처럼 사람들이 쉽게 인식하는 수식어가 있나요?”, “글쎄요. 없는 것 같은데…. 굳이 말하자면… 미디어 아티스트요? 모임에 가서 인사할 때 몇 번 붙여 봤어요.”

초창기에는 ‘케이블선 작가’로 통했다. 캔버스 위에 열을 맞춘 케이블 선을 그라인더로 피복을 갈고 깎아서 명암을 구사해 인물의 형상을 표현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지지직거리는 흑백텔레비전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회화 전공자의 능력을 살린 것으로 대외적으로 평가도 좋았다. 그렇게 이미지가 고착화되려고 할 때, 케이블 선이라는 소재를 놓아 버렸다. “타이틀이 주는 고정된 이미지가 싫었어요. 계속하면 먹고는 살겠지만 그저 그런 작가가 되겠구나 싶었어요.” 이후 네온사인, 영상, 사진, 포토샵 등 매체를 다변화하며 기존의 이미지를 수집하고 재편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가 입주 작가로 있는 파주 메이크샵 아트스페이스의 오전 10시. 인세인 박 대표의 머리에는 까치집이 지어져 있다. “너무 단정하면 어색해요.” 손가락을 집어넣어 머리카락을 잡고 부스스하도록 뒤흔든다. 그와의 인터뷰는 섣달 그믐밤의 강가를 걷는 기분인데, 더듬더듬 불안한 듯 걸어가 보니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 나타날 때의 환희를 느끼게 한다. 한 글자씩 눌러서 뱉는 눌변에는 듣게 만드는 힘이 있다.

파주 메이크샵 아트스페이스에 위치한 작업실 파주 메이크샵 아트스페이스에 위치한 작업실

UP: 회화를 전공한 것이 지금 하는 일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인세인 박: 만화가가 되려고 생각한 적이 있을 정도로 어릴 적부터 노트나 교과서에 낙서나 만화를 끄적거리는 것을 좋아했어요. 의상디자인을 전공하려 했지만 어찌하다 보니 서양화를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전공 탓일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저에게는 평면 회화가 심상을 가장 자극하는 매체입니다. 지금은 설치와 영상을 주 매체로 사용하고 있지만 언젠가 회화를 통해 발표하기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UP: 평면 회화가 미디어 아티스트의 심상을 자극한다는 건 어떤 뜻인가요 인세인 박: 회화는 붓질 한 번에 느낌이 바뀝니다. 붓질이 중요하죠. 그게 감각이고 직관이에요. 제 작품에는 회화에서 붓질을 하면서 배웠던 감각이 묻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전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좋게 말하면 활용하면서 살아갑니다. 저도 결국 회화를 통해 배웠던 것으로 돌아갑니다.

회화의 붓질, 심상의 변화를 일으키다

‘THE NORTH FACE’는 익숙한 아웃도어 브랜드의 이름이지만 그 옆에 그려진 그림은 구절의 의미대로 ‘북쪽의 얼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얼굴이 보인다. (주)예수라는 네온사인 앞에서, 주 예수그리스도의 박애 정신은 무색해진다.

“제가 작업에 접근하는 방식은 회화의 붓질과 비슷합니다. 회화는 표피(껍데기)의 변화가 보는 이에게 심상의 변화를 일으키는 행위입니다. 개념도 중요하지만 요즘은 직관적인 부분에 더 집중해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작업실에서 TV나 컴퓨터 앞에서 뉴스, 컬트영화, 광고, 인터넷 이미지나 댓글, 포르노 무비 등을 보며 이미지를 수집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이미지를 생산하기보다는 기존의 이미지를 수집하고 편집해 작업으로 보인다. 미디어를 통해 수없이 생성되는 이미지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차용해 재편집한다. 전시 ‘디렉터스 컷’에서는 마치 영화감독처럼 영화, 동영상, 인터넷에 떠도는 이미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연출했다. 모든 이미지는 작가의 시선에 따라 재편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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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 의미를 덜어 내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연출을 하는데 이런 방식을 택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인세인 박: 작업에서 의미를 덜어 낸 것은 제가 작업을 보는 방향 때문입니다. 작업을 이성적, 논리적으로 보는 것보다 직관적인 태도로 바라보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어요. 예를 들면 아주 오래전에 감명 깊은 영화를 보았는데 그 스토리의 전반적인 구성 정도만 기억이 나고 영화의 이미지들은 분명히 기억이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그 부분을 작업을 대하는 태도에 대입시켰고 작업의 개념이나 내용도 중요하지만 보이는 이미지 즉 감각적, 직관적인 지점을 좀 더 드러내고자 합니다.

UP: 포토샵, 카메라 등의 비전공 분야 기술은 어떻게 배우셨나요 인세인 박: 인터넷에 보면 무료로 알려주는 소스들이 많아요. 그걸 보고 공부를 했지만 해당분야들의 전문가는 아닙니다. 그리고 전문가일 필요도 없어요. 중요한 것은 기술보다, 무엇을 보여 주고자 하는가 하는 관점이니까요. 사진의 망점노출은 사진 전문가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테지만, 비전문가가 하니 오히려 색다른 시도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돈은 못 벌어도 시간은 번다

인세인 박 대표는 대학시절 내내 대책 없는 아이였다. 군대에서 “너 뭐할래”라는 질문을 받고는 “동대문에서 옷 장사할 건데요”라고 무턱대고 답했고, 제대 후에는 할 게 없어서 복학을 했다. 친구들과 노는 게 좋았고 어떻게 살겠다는 계획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생활비는 벌어야 하니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학원에서는 페이를 더 줄 테니 부원장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학원 선생만 하기에는 내 재능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학을 다니는 내내 7년을 해왔던 일인데 딱 접었다. 왜 그랬는지 이유를 물었지만 본인도 알 수 없단다. 그 길로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UP: 전업 작가를 하기에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나요 인세인 박: 물론 아주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아주 특별하다고 느낄 것까지는 아니었어요. 그래도 내 재능이라면 뭔가를 할 수 있을 거라는 내부에서의 확신은 있었던 것 같아요. 결국 할 사람은 하는 일이니, 자기가 좋아서 하지만 하고 싶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안 된다고 포기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UP: 결심이 흔들리거나 힘들 때,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버텼나요 인세인 박: 한번 결심하면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에요. 결정은 즉흥적으로 하고 심플하게 밀고 나가죠. 초반에는 ‘삼성에 다닌다’는 마음으로 작업실에 나갔어요. 돈은 못 벌어도 시간은 번다는 마음으로 매일 출근하고, 설령 가서 논다고 해도 몇 시간은 처박혀 있었어요. 작업을 한다는 게 사실 별 게 아니에요. 공무원을 해도 잘했을 것 같아요. 공장에서 일을 해도 잘했을 거예요.

우선 그의 자유분방한 풍모를 보고 서울시청의 7급 공무원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아서 순간 멈칫했다. 공무원은 메타포이다. 안정을 원하면 공무원, 돈을 벌고 싶으면 공장, 작품을 하고 싶으면 전업 작가가 되는 것을 선택하고, 그냥 하면 된다는 말이다. “어떻게 흔들림 없이 지속하나”라는 질문에 광고 카피처럼 “Just do it"으로 답했다.

인생UP데이트 멘토링

예술가는 노력과 재능과는 별도로 ‘그냥 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이 길에 들어섰을 때에는 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 현실이라는 것이 사실 체감을 하게 되면 만만치 않습니다. 꼭 현실이라는 부분이 꼭 생활(먹고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꽤 많은 좌절과 낯간지럽지만 창작의 고통 등의 많은 문제와 마주하게 됩니다. 예전에 작업을 시작했을 때 선배들이 버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을 해 준 적이 있는데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버티는 것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합니다. 조바심, 조급한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조급함과 열정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그냥 그때를 즐기며 작업을 꾸준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인세인 박 프로필 - 경기대학교 서양화과

수상
- 2013년 제2회 ETRO 미술상 대상(듀오)
- 2008년 Shin han Young Artist Festa 선정 작가

전시
- 2015년 Summer’s never coming again_Art Project AZ, 상하이, 중국
- 2014년 UNPORTRAIT_백운 갤러리, 에트로 미술상 전시, 서울
- 2014년 Director’s cut_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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