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쿰은 ‘나머지’라는 뜻이다. 소위 말하는 잉여 인간 즉, 소외되고 남겨진 사람들이 아닌, 우리 삶에서 회복하고 싶은 것들을 위해 ‘스스로 남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메이커스들의 모임인 릴리쿰의 활동을 통해, 인공지능 알파고가 도래하는 시대에 예술은 어떤 가치가 있고 왜 존재하는지 돌아보게 된다.

콘셉트를 잡고 시각화하는 능력

연남동 주택가의 골목길을 꺾어 들어가니 릴리쿰이 보인다. 1층 차고를 개조해서 만든 건물에 자리를 잡았는데, 안으로 들어서니 평소에는 보지 못하는 신기한 물건들이 가득 들어 있다. 코딩, 목공예, 도자기, 레이저 커팅, 실크스크린, 3D프린트 등 원하는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는 공간이다. 선윤아 대표는 보다 직접적으로 삶과 연결된 제작 환경을 만들고 싶어서 <릴리쿰>을 열었다.

서울 연남동 주택가에 위치한 릴리쿰 서울 연남동 주택가에 위치한 릴리쿰
서울 연남동 주택가에 위치한 릴리쿰

“이과생이었는데, 생물 공부를 하면 노트에 장기를 그리고 색칠하는 걸 더 즐겼어요.”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갑자기 미술대학으로 진학하고 싶었다. 당시에는 직업에 대해서 인터넷에서 알 수 있는 정보가 별로 없었다. 우연히 잡지를 보다가 편집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알게 됐는데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선윤아 대표에게 인생의 직업으로 느껴졌다. 수능을 3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미술 학원에서 연필 한번 잡아 보지 않았으니 다들 어려울 것이라 말했지만 그해 수능 점수만 보는 전형으로 한 번에 합격한다. 그러나 입시 미술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열린 가능성이자, 한계이기도 했다.

UP: 입시 미술을 전혀 하지 않고 대학에 입학을 했는데, 장단은 무엇이었나요 선윤아: 입시 미술로 기초를 다진 친구들에 비해서 표현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었고 제가 바로 따라잡을 수 있는 부분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표현보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작업에 몰두하게 됐습니다. 솔 바스, 브루노 무나리처럼 혁신적으로 심플하게, 강력하게 그래픽을 사용하는 것들에 관심을 가졌어요.

UP: 디자인을 전공한 것이 지금 하는 일에 어떤 도움이 되었나요 선윤아: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디자인, 예술의 가치를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삶의 방향을 잡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셈입니다. 또한 학부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면서 디자인 발상이나 시각화 능력을 훈련했던 경험은 이후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필요한 부분이라 큰 도움이 되곤 합니다.

잉여력이란 무엇인가, 쓸데없는 것의 힘

무엇을 시각화할 것인가, 그리고 어떤 도구를 쓸 것인가는, 선윤아 대표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매달린 의제이다. 시각디자이너라면 이상적인 디자인을 하고 싶다고 해도 현실은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원하는 것을 만들어 줄 수밖에 없다. “디자인만 해서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으니, 기술을 융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대학 시절부터 퍼블리싱, 웹, 영상 등 다양한 능력을 습득하면서 낯선 것들이 내는 시너지에 관심을 가졌다. 해외에서 발간되는 한국어교재 ‘지나인’의 아트디렉터로 일하면서 우리에겐 공기만큼 익숙한 한글을 새롭게 바라보고 퍼블리싱했는데, 틀에 갇혀있었다면 외국인에게 사랑받는 교재를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어떤 활동을 할 것인가, 예술적인 삶을 살고 싶다”라고 꿈꾸던 중 기회가 찾아왔다. 하자센터에서 운영한 사회적기업 인큐베이팅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당선되면서 지원금으로 ‘땡땡이공작’을 시작하게 되었다. 멤버들은 직장을 가진 상태에서 가볍게 느슨하게 참여했다. 땡땡이공작은 노는 것과 예술적 창의성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땡땡이 선언]
선언1. 우리는 놀면서 만들고 만들면서 논다.
선언2. 우리는 쓸데없는 것의 힘을 안다.

쓸데없는 것, 잉여적 가치의 힘을 믿는 땡땡이 선언
쓸데없는 것, 잉여적 가치의 힘을 믿는 땡땡이 선언

UP: 땡땡이공작은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어떤 의미를 거뒀나요 선윤아: 땡땡이공작은 잉여력 발산을 위해 모인 집단이었어요. 메이커들의 모임인데 쓸데없는 고퀄리티의 물건들을 만들어 내는 워크숍을 계속 열었어요. 반응이 아주 뜨거웠어요. 남들이 보면 왜 저런 것을 하나 싶겠지만 땡땡이 선언처럼, 놀이를 통해서 예술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찾고 싶었어요. 수익보다는 기회를 만들고 가능성을 포착하는 게 목표였어요.

UP: 쓸데없는 고퀄, 재미나게 놀아 보기 위해서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했나요 선윤아: ‘수리수리 자가수리’는 아이폰을 자기 손으로 직접 수리하는 워크숍이었고, 연날리기 워크숍에서는 어릴 적 날리던 연에 기술(tech)을 결합해서 재미를 더하기도 했어요. 특히 야매공작단을 모집해서 제주도로 가서 ‘고스트 버스터즈’ 영화를 촬영해 봤어요. 전문가도 아니고 처음 본 사람들이 모여서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정말로 신나고 즐거웠어요. ‘똘끼’ 있게 놀아 보자는 구호를 외쳤는데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분들이 신청하고 관심을 가져 주셨어요.

메이커 무브먼트! 민간이 주도하는 새로운 변화

이런 ‘쓸데없으면서도 고퀄리티’의 지적 유희에 사람들은 관심을 보였고 여기저기에서 제안을 받게 된다. 워크숍을 열어달라는 제안을 받기도 하고 과학창의재단에서 지원금을 받았으며,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지속 가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게 된다. 가능성을 맛본 멤버들은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그게 릴리쿰의 탄생이다. 지금은 친구 2명과 함께하고 있다.

릴리쿰의 작업실은 코딩, 목공예, 도자기, 레이저 커팅, 실크스크린, 3D프린팅 등 기술과 결합된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공간이다. “팔기 위한 콘텐츠가 아니라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어요.” 선윤아 대표는 메이커 무브먼트가 정부 주도가 아니라, 민간에서 이렇게 활동하고 있다는 데 의미를 부여한다.

제작과 자립, 놀이의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고 제품으로 만드는 릴리쿰 제작과 자립, 놀이의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고 제품으로 만드는 릴리쿰
제작과 자립, 놀이의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고 제품으로 만드는 릴리쿰

UP: 땡땡이공작의 활동에서 릴리쿰은 어떤 점이 달라졌나요 선윤아: ‘땡땡이공작’ 활동은 DIY 활동과 놀이라는 주제를 접목해서 함께 놀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려고 했다면, 릴리쿰에서 공동의 주제를 가지고 연구할 사람들을 모으기도 하고, 각자의 작업을 프레젠테이션을 하거나 주제를 가지고 모이는 자리에는 되도록 참석해 이야기를 들으려 합니다.

UP: 릴리쿰의 3년 동안 어떤 변화와 성과가 있었나요 선윤아: 처음에는 공유 제작 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크게 그렸지만 공간을 연 지 3년 차인 지금은(정부 주도이긴 하지만) 이런 공간들이 많이 생겨났고, 릴리쿰의 역할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제작과 자립, 놀이의 새로운 방식들을 시도하고 콘텐츠와 제품으로 만드는 작업에 조금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전자요리>와 같은 전자회로 관련 콘텐츠를 만들거나 정기 행사인 <월간상점> 포맷을 통해 릴리쿰 멤버들이 제작한 물건 또는 작품 등을 전시·판매하기도 합니다. ‘만들기’라는 삶의 방식과 연결된 지금까지의 실험과 고민, 생각할 지점들을 담아 정리한 책이 곧 출간될 예정인데, 이 책은 다른 무엇보다도 대중과 만날 수 있는 콘텐츠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선윤아 대표는 다양한 기술, 사물, 환경에 대한 얇고 넓은 관심 그리고 호기심이 인생을 풍부하게 하고 예술적 감각을 키우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시각디자이너라고 하면 웹만 생각하던 시대는 지났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융합의 시대가 오고 있다.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는 지금, 인간의 예술은 무엇을 담아야 할 것인지 예술과 유희에 대한 답을 선윤아 대표의 활동을 통해 엿보았다.

인생UP데이트 멘토링

예술 전공자의 삶은 누구보다 자기 주도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프레임에 갇혀 있으면 생활도 목표도 매몰되어 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탈출하거나 또는 그 구조를 함께 바꾸어 가려는 연대 의식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작업의 방향을 놓지 않으면서도 현실과 계속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숙명을 받아들여야 한달까요.

선윤아 대표 프로필 - 경희대학교 예술디자인학부 시각디자인 학사
- 홍익대학교 국제디자인전문대학원 IDAS 디지털미디어디자인 석사
- 前 지나인 디자인 디렉터
- 前 노리단 디자이너
- 現 땡땡이공작 대표
- 現 릴리쿰 공동 대표


주요활동
- 2008~2012 미디어아트전문채널 앨리스온 에디터
- 2008~2009 예비사회적기업 FACTORY 36.5 아트 디렉터
- 2011 뉴아트 레이블 THE MEDIUM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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