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의 다양화에 힘입어 동시대 예술가와 예술이 재인식되고 있습니다. 미디어가 예술의 작업 과정과 결과를 온전히 비춰낼 수는 없지만, 예술의 유통과 소비를 촉진할 수는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시작된 댄스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인기는 무용계 관객 개발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미디어가 예술을 본격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지금, 미디어와 예술의 상관관계를 다시금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이슈] 현대미술 예술가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바라보는 시선➀/[이슈] 현대미술 예술가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바라보는 시선②/[이슈] 댄스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바라보는 시선

예술가의 아우라가 가공되는 시대

사진__아스코 지면광고 MC도전자(스프레드)

추상표현주의의 드립핑 기법을 연상시키는 노란색 안료가 허공을 가르며 비행한다. 무엇을, 왜 전복해야 하는가의 질문이 누락된 채, ‘아트스타코리아(ART STAR KOREA)’의 포스터와 홍보 영상은 그렇게 시작된다. 지난 세기 미국 아방가르드의 다소 철 지난 미학적 강령을 환기하면서, 이 세계가 지향하는 바는 당혹스럽게도 ‘한국의 앤디 워홀을 찾아라’ 같은, 전적으로 탈-전위적인 노선이다.

하지만, “아티스트는 누구나 될 수 있어도 아트스타는 아무나 될 수 없다”로 시작하는 이 세계의 거의 모든 것들은 이미 충분히 뒤집혀 있다. 미션을 제공하는 것을 통해 아트는 문제해결 기술과 등가치가 되고, 아티스트는 문제해결사의 낯선 이미지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게다가 그 미션이 제한된 시간 내에 완성할 것을 독촉하는 것에 의해 순발력이나 노동의 조합 능력 등으로 구성되는 숙련도 같은 부차적인 요인들의 비중이 과도하게 부풀려진다. 그러한 밀도나 질의 노동으로는 분주한 현대적 삶 속에서 쉽게 박탈당하고 마는 사색과 사유의 가능성을 경작해낼 수 없으리라는 오랜 교훈은 손쉽게 폐기된다. 그렇더라도, 대체적으로 적어도 한번은 입시를 거쳤을 이 땅의 아티스트들에게 시간과의 부조리한 싸움까진 제법 친숙한 장애물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당락에 초조해하면서, 결국 동료의 것으로 돌아갈 탈락을 면하는 것으로 자기 검증의 잣대를 삼고, 안도의 숨을 내쉬는 아티스트의 출현은 전혀 다른 문제다.

스타 만들기의 기술은 그 안에 내재하는 모순에 의해 자신의 비밀을 폭로하고, 뇌관을 만지작거리며 노는 극히 위험한 놀이다. 폭로는 이중적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처음은 예술가를 궁극적인 신화의 지점으로까지 밀어붙이는 것을 통해서다. ‘아트스타코리아’는 미디어로서 TV의 한계가 얼마나 가까운 곳에 있는가에 대한 탁월한 리포트로서 손색이 없다. 레지스 드브레(Régis Debray)가 지적했듯, TV는 예술가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것 외에 예술을 보여주는 다른 가능성을 알지 못한다. 이러한 매체적 속성 안에서 심오한 예술 가치가 아트스타로 등치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귀결이다. 정신과 심리와 관련된 기획들이 유독 TV에서 더 극적인 방식으로 실패를 거듭하는 이유다.

하지만 이러한 매체론적 접근만으론 예술가-예술이 아니라-에 대한 이 시대의 편집광적 몰입을 다 이해할 수 없다. 그 배경에는 예술가를 감상과 소비의 전면으로 내세워야 하는, 감추고 싶은 요인이 있다. 이는 작가의 신화로 시급히 매워져야 할 만큼, 예술작품의 의미론적 결핍이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삶의 신비와 존재의 심연, 역사의 복잡성을 포촉해내는 예술(품)은 갈수록 드문 사건이 되어가고, 그 빈 공간만큼 예술가의 아우라가 가공되어야만 하는 게 이 시대의 상황인 것이다. 벌써 반세기도 더 전부터 한때 ‘정신의 빛’을 발하던 텅 비어버린 구멍을 은색 가발을 덮어쓰거나 가죽 조끼 차림의, 또는 구찌 양복을 빼입은 브랜드화된 예술가가 몸소 땜질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아트스타의 시대? 그것은 아트의 기념비적인 부재의 시대를 일컫는 우회적인 지시어에 지나지 않는다. 아트스타는 과도한 자의식으로 초조해하고, 타자화된 욕망에 매몰되어가는 현대인의 농축된 드라마와는 현저하게 구분되는 다른 어떤 존재인가? 아트스타는 솔제니친이 슈호프를 통해 제시하고자 했던, 일테면 다음과 같은 ‘생각하는 존재의 원형’과는 실로 거리가 멀기만 한 존재다 :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운명과 타협하지 않고, …인간을 꼭두각시나 고깃덩어리로 타락시키기 위한 제도에 결코 놀아나지 않으리라는 뜨거운 몸부림 속에서… 권력의 목구멍에 걸린 생선가시가 되고, 자신과 동료들에게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참인간의 하나로 존재할 수 있음에 대한 존재적 입증…”

사진_‘아트스타코리아’ 첫 미션 소개 현장 사진_첫 번째 최종 심사를 기다리는 15인의 도전자 (사진출처_아티스트 코리아 홈페이지)

▲▲‘아트스타코리아’ 첫 미션 소개 현장
(사진출처_아트스타코리아 홈페이지)

▲첫 번째 최종 심사를 기다리는 15인의 도전자
(사진출처_아트스타코리아 홈페이지)

여기가 ‘아트스타코리아’의 두 번째이자 결정적인 자기 폭로가 성립되는 지점이다. ‘아트스타’의 산실을 자처하는 그곳에서 정작 아티스트는 일렬로 도열해 초조하게 자신의 평가를 기다리는 집단의 일원, T.S. 엘리엇이 자신의 시에서 비유했던 ‘속이 비워진 봉제인형’ 같은 무력한 존재로 재규정된다. 그는 스스로 사명(calling)을 만들어내는 주체가 더 이상 아닌, 호출(interpellation)을 기다리는 객체로서, 고정관념에서 조금도 더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 전문가들로부터, 평론을 가장한 훈계와 꾸중을 듣는 타자의 자리로 내려앉는다. 두 주체 간에 현기증 나는 역할의 전도가 이 이야기의 핵심 가운데 하나다. 아티스트는 주어진 미션에 부응하고, 질문에 답하는 것 이외의 자유가 제한되도록 되어 있는 계약에 충실하다. 이 계약적 상황 안에서 예술 창작이, 그것도 멘토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는 기술적 조정 능력으로 재정의되는 것에 대한 불편함 같은 것은 눈에 띠지 않는다. 이 수용은 그들이 자신의 고유한 창작에 대해서조차 타자의 언어로 심문되는 것이 정당한 것이 되기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과정이다. 예술가는 더 이상 자신의 진실로 사람들을 몰아붙이는 불편한 존재이기를 그쳐야만 한다. 사람들의 진실로 자신을 몰아내는 데 충실하기 위해. 그것은 혹 비용을 지불해가면서까지 지켜내야 하는 자신만의 진실이 부재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이로부터 ‘아트스타코리아’가 추대하려는 예술에 관한 하나의 추론이 가능하다. 그것은 정작 문제 삼아야 할 세상에 대한 의구심을 철회하고, 그 가치 체계와 강령의 영토에 스스로 정주하는 어떤 것이다. 동시에 그 정주는 바로 그 정주가 역설적이게도 폭로하는 진실, 즉 자유란 끈질긴 거부와 저항의 대가로만 주어지는 것이며, 자유가 공격당하면 존엄성마저 공격당한다는 사실에 의해,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한 것이 되고 마는 정주다. ‘아트스타코리아’로부터 어떤 깊은 내상을 남기는 깊은 통증이 유발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트스타가 아니라,
아티스트로서의 존명을 고민할 시기

사진_아티스트들의 작업 현장 사진_아티스트들의 작업 현장

▲아티스트들의 작업 현장
(사진출처_아트스타코리아 홈페이지)

경쟁에서의 최후 생존이 궁극의 가치로 설정되는 이 자유시장화된 이 틀(frame)은 완벽한 통제가 가능하도록 설계된 스키너 박사의 박스(Skinner Box)를 놀라울 정도로 모방하고 있다. 그 안에 넣어지는 순간, 행동을 절대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가를 알고 싶어하는 상자 밖 주체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박스 내의 존재는 통제자의 가치와 이데올로기에 반응하는 방식을 학습하도록 인도된다. 복종하고, 반항하지 않으며 미워하지도 않을 때까지, 어떤 인식의 진공 상태에 이르도록,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이라면 틀림없이 ‘주체적 상징성이 전적으로 박탈당한 상태’로 보았을 그런 상태에 놓이게 된다. 스스로 선택한 ‘서바이벌 게임’의 불구적인 설정 안에서 인간으로 나아가는 길은 막막하기만 하다. 나의 생존이 타인의 몰락에 의해서만 가능한 상황에서 이웃, 우정, 소통, 연대 같은 가치들을 동시에 부양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므로. 경쟁자를 앞지르기에 대한 이 고도로 외설적인 집중 안에서 소멸되는 것은 단지 활력과 생기를 주는 불확실성과 개방성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홉스(Thomas Hobbes)가 말한 리바이어던(Leviathan)의 축소판이다. 에티엔 드 라 보에티(Étienne de La Boétie)가 경쟁을 ‘간악한 군주의 책략’으로 정의했음을 기억하자. 경쟁에 몰입하면서 우둔한 시민들은 이기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굳게 믿게 되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경쟁에 심취함으로써 그들은 오히려 “노예가 되었다는 것을 환호하며, 흔쾌히 군주에게 봉사한다.” 그곳에서 규범은 기계적이고, 참여자 모두를 압도하면서 거부할 수 없는 통제력을 발휘한다. 군주의 권위를 의심하거나 통치에 저항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여기서 승리는 최후의 복종을 제공한 보상이다. 그러므로 트로피와 상금은 패자들이 차례로 벗어나는 족쇄에 마지막까지 묶여준 것에 대한 기만적인 선물로 다시 정의되어야 하리라. 최후생존은 그래서 명예와는 무관한 것이 되고 만다.

빅토르 위고가 상처 입은 마리위스의 몸을 들쳐 안은 장발장을 ‘빛나는 도시’가 아니라 파리의 거대한 지하도 안으로, ‘리바이어던의 창자’로 피신시켰음을 기억하자. 언젠가 세네카가 말했듯 ‘사회란 야수들을 불러 모으는 집단’이고 무대는 야수들의 힘이 유달리 과시되는 곳인 반면, 지하도야말로 사회적 질서의 기반을 무위로 돌리는 ‘전복의 왕국’이요, ‘거대한 평등과 새로운 정의가 잠재하는 세상’ 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를 무대 위에 세우고, 광대 역할을 요구하는 이 시대 안에서 문명이 다시금 신(新) 야만의 시대로 방향을 틀려고 꿈틀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펠릭스 페네옹(Félix Fénéon)은 큐레이터의 역할을 ‘예술가와 대중의 가교’로 정의하면서 정작 예술가에 대해 정확하게 짚은 바 있는데, 그것은 예술가의 자리가 (무대가 아니라) 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섬’이 아니라면, 굳이 가교가 필요할 이유가 어디에 있으랴! 예술가에게 조금이라도 가치 있는 이야기를 듣기를 원한다면, 그들을 무대에 세우기를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장 뒤뷔페(Jean Dubuffet)가 말했듯, ‘예술은 사람들이 마련해 놓은 침대에서 잠들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예술은 결코 무대에서 성취되지 않는다. 무대에서는 예술이 아니라 예술처럼 보이는 것, 즉 이미지의 가공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감싸고 있는 것은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스펙터클을 가공해내려는 욕망이다. 뒤뷔페는 다시 자신의 반(反)정립의 각을 세운다 : “진정한 예술은 예술이라고 불리는 동시에 사라지기에, 익명으로 남기를 원한다. 예술의 최고의 순간은 그 이름마저 잊을 때이다." 엔터테인먼트 회사는 자신의 운명 방침 안에 그러한 예술을 포함시키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싶어하는 것은 그 이름 위에 왕관을 쓴 채, 기억에 남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예술일 것이기 때문이다.

1) William R.B. Acker, kyudo:The Japanese Art of Archery (Boston: Tuttle, 1998)

예술은 이제 박스 안에 거의 정착했고, 자유의 함축적 재현으로서의 예술은 항구적인 불가능성의 영역으로 계속해서 흘러들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가치들을 다시 가능성의 공간으로 재배치시키기는 길을 찾고, 통치와 선동적 소비주의와 구경거리주의의 덫에서 건져낼 것을 궁리해 내도록 하자. 아트스타가 아니라 아티스트를 꿈꾸고, 보상에 앞서 진정한 성취를 여전히 꿈꾸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는 하나의 토대적 진실을 환기하는 것에서 시작하도록 하자. 성공하려면 성공하려는 집착에 대해서는 실패해야 한다는 점, 윌리엄 애커(William R.B. Acker)도 『활의 기술(Art of Archery)』에서 동일한 길을 확인해준다. 과녁을 맞히기 위해서는 과녁을 맞히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1) 그렇게 해야 하는 시급한 이유는 여기 충분히 있다. 지금야말로 아트스타가 아니라, 오히려 아티스트로서의 존명이 고민되어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아티스트로서의 생존인가? 예술가로서의 행동방식을 영위하려는 의지를 잃지 않으면서 이 위기의 시대를 견뎌내는 사람, 그 정신까지 살아남는 예술가가 바로 그다.

사진제공_CJ E&M

필자사진_ 심상용 필자소개
심상용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1989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제8대학에서 조형예술학 석사와 박사(D.E.A.), 파리 제1대학에서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시장미술의 탄생』, 『속도의 예술』, 『천재는 죽었다』, 『현대미술의 욕망과 상실』, 『그림 없는 미술관-대중시대 미술관의 모색과 전망』, 『명화로 보는 인류의 역사』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제9의 예술 만화』가 있다. 현재 동덕여자대학교 예술대학 큐레이터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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