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격언은 때론 많은 것을 생략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면 마치 뜻만 있으면 길이 저절로 생길 것 같지 않은가. 이 문장을 정확히 쓰면 이렇다. ‘뜻이 있고 적절한 기술을 가지고 있을 때 일정 시간과 필요한 재료를 모아 길을 만들 수 있다.’ 뜻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실행을 위한 방법이 수반되어야 결과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건 기술도, 시간도, 돈도 아닌 길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 다름 아닌 ‘뜻’이다. 이 긴 문장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짧게 쳐낸 이유도 이 때문이다. 최근 영화계의 새로운 제작비 마련의 수단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크라우드 펀딩은 그야말로 ‘뜻’으로 만든 길이다. 함께 모여 함께 이루고자 하는 장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크라우드 펀딩은 제작 자본을 모으는 대안의 하나로 각광을 받고 있다.

왜, 지금 크라우드 펀딩인가

크라우드 펀딩이란 대중으로부터(crowd) 자금을 모은다는(funding) 의미로 대중의 자발적 참여가 핵심 요소인 자본 조달 시스템이다. 개인의 이익과 수익 창출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사회적 이익과 환원의 개념으로 자본을 기부하는 방식, 그것이 크라우드 펀딩의 기본이다. 대형 투자 업체나 금융권의 시스템 바깥에서 잠재적인 소비자에게 직접 끌어들인 자금. 크라우드 펀딩이 문화예술 영역에 적합한 자금 확보 방식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터넷의 발달로 대중들의 상호직접 소통이 가능해지면서 자본을 중심에 둔 시스템에서 벗어나 소위 ‘독립’의 이름이 붙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크라우드 펀딩이 이루어지고 있다. 미국의 킥스타터(Kickstarter)가 대표적인 사례로 킥스타터의 경우 2013년 현재까지 약 2만 개가 넘는 프로젝트들이 목표 금액을 달성했으며 그중에는 100만 달러 이상을 모금한 경우도 적지 않다. 국내에서도 굿펀딩, 텀블벅, 펀듀 등 펀딩 사이트들이 2007년부터 꾸준한 결과물을 내어 놓고 있다. 기본적으로 크라우드 펀딩은 크게 지분투자형, 대출형, 기부후원형으로 나뉘는데 현재 국내 문화산업에서 활용하는 방식은 대부분 기부 후원형이다. 법적인 규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는 애초에 기부후원방식이 문화산업과 잘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요컨대 현재 크라우드 펀딩은 자본의 투자와 수익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문화연대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어떤 문화 영역보다 상업 시스템이 견고한 영화계, 그중에서도 독립영화 진영에서 이 같은 크라우드 펀딩에 주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 방식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다. 그동안 견고한 시스템 바깥에서 시도하지 못했던 일들을 수행할 수 있는 대안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독립영화 진영에서는 제작비를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예전에도 후원금의 형태로 널리 퍼져 있던 형태가 인터넷 기반의 SNS를 통해 체계를 갖춘 시스템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뿐이다. 본질은 자본으로부터의 독립, 만들고(혹은 보고 싶은) 영화에 대한 후원인 셈이다. 현재 국내 크라우드 펀딩은 2007년 대출형 크라우드 펀딩 포털로 처음 문을 연 이래 꾸준히 성장, 현재 15개의 법인에서 약 17개의 플랫폼을 운영 중이다. 2013년에만 83편의 영화에 크라우드 펀딩을 시도했고, 그중 40편이 모금에 성공했다. 단순 수치로만 봐도 한국영화 제작에 상당 부분 기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엔 특히 크라우드 펀딩을 통한 마케팅의 효용이 수차례 입증되며 상업영화 쪽에서도 제3의 자금 확보 통로로 크라우드 펀딩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중이다.

영화판 다양성을 위한 씨앗 뿌리기

사진_영화 26년 사진_영화 또 하나의 약속

▲▲영화계 크라우드 펀딩 활성화를 주도한
상업영화 <26년>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제작된 상업영화
<또 하나의 약속>

시작은 독립영화와 소규모 프로젝트 위주였지만 활성화된 것은 상업영화인 <26년>부터라고 볼 수 있다. 영화 <26년>의 성공사례는 크라우딩 펀딩을 활용한 상업영화도 흥행할 수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기부후원에 한정되어 있던 펀딩의 가능성을 확장했다. 모금액 자체도 상당한 액수였지만 그보다 유효했던 건 모금 과정에서 잠재 관객과의 소통과 프로젝트의 정당성에 대한 부각이었다. 굿펀딩의 신형욱 대표는 &ldquo;매력적인 프로젝트에 모인 참여자의 수는 고스란히 다른 투자자를 설득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rdquo;이 크라우드 펀딩의 힘이라고 설명한다. 이후 <지슬>, <또 하나의 약속> 등 크라우드 펀딩의 성공 사례가 늘면서 일정 규모 이상의 상업영화에서도 이러한 방식으로 자금을 모을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는 극히 이례적인 일에 불과하며 지분투자형에 대한 규제가 풀리지 않는 한 크라우드 펀딩은 자본 확보의 보조 수단이지 주요한 통로가 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크라우드 펀딩은 기본적으로는 소규모 독립영화에 적합한 방식이다. 2013년의 펀딩 성공 사례가 유독 다큐멘터리 장르에 몰려 있는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더불어 제작 여부에 대한 확신이 크지 않기에 제작 후원보다는 개봉 후원 위주로 진행되는 것도 국내 크라우드 펀딩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펀딩 모금액의 규모 자체가 크게 늘어난 사례는 그리 많지 않지만 프로젝트의 숫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에 따라 크라우드 펀딩 사이에서도 후원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해졌다. 실제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텀블벅의 경우 2012년 모금액이 1억 5천만 원 정도였지만 2013년에는 2억 7천 원가량으로 2배 이상 늘어났다. 초기에는 단순히 프로젝트의 목적, 또는 사회적인 의미만 가지고도 어느 정도 홍보가 가능했지만 프로젝트끼리 경쟁이 생기면서 차별화 전략이 필요해진 것이다. 리워드 방식의 다양화는 이에 따른 필연적인 변화다. 프로젝트 수가 늘어나 경쟁이 치열해진 만큼, 소규모 프로젝트의 경우 후원자들과의 직접적인 소통이 불가능한 일이 아닌 만큼 프로젝트마다 색다른 방식으로 리워드를 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후원자들의 재후원으로 이어지도록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현재 소규모 독립영화의 경우 종잣돈을 모을 수 있는 유효한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한 사람들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후원한 만큼 프로젝트에 대한 만족도와 신뢰를 줄 수만 있다면 지속적인 후원자로 확보할 수 있는 여지도 충분하다. 게다가 이들은 단순히 자본을 후원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인 마케팅 자원으로도 참여하는 추세다. 실제로 일정 이상 규모의 크라우드 펀딩의 경우 당장의 제작 자본 확보보다는 이 같은 홍보 효과를 노리고 진행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일정 이상 규모의 영화는 종잣돈 확보보다는 이쪽이 주요 목적인 경우가 다수다. 최근 명필름이 제작 중인 <카트>가 좋은 사례다. 당장의 시드머니 확보 혹은 충성도 높은 관객층의 확보. 어느 쪽이든 크라우드 펀딩에서 후원자들과의 지속적인 유대 관계는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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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딩21을 통해 제작비 87,160,000원(목표액 50,000,000원의 174%)을 모금한 영화 <카트>



크라우드 펀딩이 기부후원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한 무엇을 위해 어떤 영화를 만드는가는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다. 사회적으로 반드시 만들어질 필요가 있는, 하지만 제작이 쉽지 않은 영화들의 제작 창구가 되어준다는 점에서 크라우드 펀딩은 일종의 사회 참여적 공공재 역할을 수행 중이다. 일례로 씨네21에서 운영 중인 펀딩21은 투자와 수익의 개념보다는 필요한 영화, 의미 있는 영화, 다양한 영화를 지원하는 데 힘을 기울이는 중이다. 돈이 되는 영화보다 보고 싶은, 봐야 하는 영화에 먼저 손을 내미는 일종의 공공사업. 지금 이 시각에도 십시일반 의식 있는 관객의 뜻을 모아 만든 모내기 판 위에서 한국영화를 풍성하게 할 소중한 새싹들이 자라고 있다.

필자사진_송경원 필자소개
송경원은 14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우수상을 수상하며 영화평론가 활동을 시작했다. 영화평론가협회 총무간사, 2013~2014년 인디 다큐 페스티발 프로그래머, 2013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한국단편예심 심사위원을 맡았다. 현재 부산일보, 네이버 등 여러 매체에서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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