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거론되는 상주제도의 몇몇 모범사례들은 나름의 필요와 협력에 의한 우연적 결과인 것이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경우 지역극장에서 제공하는 재정지원은 없고 홍보나 행정인력조차도 지원되지 않는다. 거기에다 예술단체들은 매년 일정량의 공연을 해야 하는 실정이라 사실상 힘겹게 눌러앉아 있는 셈이다.

※ 사진은 특정 기사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연말부터 시작된 정기 공모사업이 2월 말에 끝났다. 직원들 입에서는 “금년 농사 다 졌네”하는 소감이 절로 터져 나왔다. 4개월에 걸쳐 작품을 공모하고 접수하고 심사를 진행하는 과정은 까다롭고 힘겹기도 하지만, 일종의 경작행위를 하는 듯한 추상적 체험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하긴 문화(culture)라는 말이 경작하다(cultivate)에서 왔다고 하니 일맥상통하는 면도 있으리라.


“이 시골에서 연극을 뭐 하러 하는 건지”

참조 이미지 - 극단 우투리 <홍동지 놀이>며칠 전 마지막 인터뷰 심사가 진행 중이었다. 후보자 한사람이 인터뷰를 받고 나오는데 낭패스러운 표정이었다. &ldquo;내가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 아무도 안 알아주는 시골에서 연극을 뭐 하러 하는 건지&rdquo;라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보통은 인터뷰를 마치면 본인이 잘 대처한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기 때문에 긴장된 얼굴로 주변을 서성이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지원자들이 제일 많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심사위원들이 꽤나 집요하게 이것저것 물은 모양인데, 일종의 모욕감을 느낀 것처럼 보였다.

그의 기획은 야외광장에 가설무대를 세우고 비교적 웅장한 작품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소요비용이 상당해서인지 심사위원들은 예산출처와 현실성을 꼬치꼬치 따졌다고 한다. 그는 대학로에서 최근에도 히트를 치고 있는 작품의 작가인데, 현재는 고향인 서울 외곽 소도시에서 작은 극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예닐곱 명의 단원으로 어렵게 운영되고 있으며, 몇 년씩 고생한 배우들이 자신의 욕망을 쫒아 대학로로 떠나는 것 때문에 지역에서 연극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작품이야 본인이 쓰면 되지만 전문적이고 소신 있는 배우들을 수급하고 유지하는 것이 만만치 않고, 지역주민들이 연극에 무관심한 터라 열심히 홍보했음에도 불구하고 빈 객석을 바라볼 때면 소모전을 벌이고 있다는 소외감을 호소하곤 했다.

그래도 다행히 얼마 전에 지역대학에서 운영하는 소극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상당히 고무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간은 무상으로 사용하지만 제작에 대한 지원은 힘든 상황이라 연극을 만들 때마다 기금 외의 비용 때문에 빚을 지곤 했던 것이다. 지역에서는 유료로 연극을 보는 사람이 드문 것이 늘 문제였다. 그래서 회원제도 만들어보고 후원모임도 만들어 보았지만 좀처럼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고 한다. 운영이 힘들면 극장에서 나가면 되지 않느냐고? 지하실이나 싸구려 좁은 공간에서 수년 간 고생하다가 겨우 얻은 극장이다. 그동안 고생한 것이 억울해서라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상주단체 모범사례라 꼽히지만

참조 이미지 - 클래식 공연반면 같은 날 인터뷰 심사에 온 다른 사람은 대규모 발레단을 운영하는 꽤나 유명세를 타는 안무가였다. 심사위원들이 겸손한 태도로 임할 정도로 그의 아우라는 상당했고 당당한 태도로 재정지원을 호소했다. 그가 운영하는 발레단의 한해 예산은 13억 정도에 달한다고 한다. 허나 규모가 크다고 해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여서 공공기금, 후원, 공연수입을 통해 겨우겨우 수지를 맞춰가는 형편이었다. 이 발레단은 소도시의 문예회관에 상주하며 연습공간과 사무실을 배려 받고 있지만 할인된 임대료도 내야하고, 의무적으로 연간 2~3회의 공연을 해야 하는 처지다. 많은 연구 자료에서 이 단체의 사례는 상주제도의 &lsquo;모범&rsquo;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대표는 실상은 다르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행히도 무용단 자체는 귀속력이 단단해 보였다. 무용수들에게 지급되는 보수는 충분치 않지만 공연레퍼토리나 횟수가 많아 자기계발에 도움이 되고 발레단의 높은 명성이 경제적 열악함을 상쇄할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민간공연단체의 지역극장 상주제도는 단체의 안정된 거점 확보와 지역주민에 대한 예술교육 환류라는 장점 때문에 수년 간 정책현장에서 논의되어 왔고, 관련연구까지 마친 상태지만 아직 본격적인 제도화에 이르지는 않고 있다. 현재 거론되는 몇몇 사례들은 나름의 필요와 협력에 의한 우연적 결과인 것이 대부분이다. 문예회관 등의 극장에서 제공하는 재정지원은 없고, 홍보나 행정인력조차도 지원되지 않는다. 거기에다 예술단체들은 매년 일정량의 공연을 해야 하는 실정이라 사실상 힘겹게 눌러앉아 있는 셈이다. 그래도 때로는 이 힘겨움이 두 번째 장점으로 거론했던 예술교육 환류를 스스로 찾아나서는 계기가 되고 있다. 위의 발레단은 지역관객 개발을 위해 발레강좌를 몇 년간 지속해오면서 상당수의 예비 발레리나를 길러냈고 아이들의 가족과 이웃은 자연스레 관객이 된다. 그래서 최근에는 공연 때마다 객석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고 한다. 예술단체의 사회적 역할이 공공극장을 통해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지역극장 상주제도 기획력이 관건

참조 이미지 - 대전문화예술의전당 원형극장현재 정부기관에서 준비하고 있는 상주제도는 지역극장과 상주계약을 맺은 예술단체에게 재정지원을 해주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고 들었다. 지역극장이 공모를 통해 단체를 뽑거나, 서로의 필요에 의해 결합이 되면 예술단체의 활동을 집중지원해준다는 것이다. 물론 반가운 소식이지만 이것만으로는 두 상대의 행복한 결합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지역극장들 다수가 시설의 운영에만 집중하고 있어 기획인력과 사업비가 부족하니 예술단체와의 협업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기 때문이다. 극장 자체의 이익이나 장점을 체감할 수 없는 극장은 상주단체 유치에 적극적이지 않게 되거나 피상적으로 입주시킬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지역극장의 동기유발을 위한 추가적인 지원들, 예를 들어 인턴 제도를 활용한 인력지원 및 양질의 프로그램 지원을 통해 부담스러울지 모를 예술단체를 들이는 것에 명분을 맞춰주어야 한다. 또한 사전에 예술단체 상주제도와 관련된 사례 및 실무 워크숍 등을 통해 일방적인 계약관계가 되지 않도록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도 필요할 것이다. 현재 문예회관 등의 공공극장 건립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가는 시점에서 개별극장의 독자적인 콘텐츠에 대한 중요성은 커지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많은 극장이 상주제도를 통해 극장의 활로를 찾아냈던 것처럼, 국내에도 우리에게 걸맞은 민간예술단체 상주제도가 자리 잡기를 기대해본다.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지자체와 호흡을 맞추는 지점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고 사려 깊게 제도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무모하지만 의기충천하여

연극을 왜 하는지 잠시 회의에 빠졌던 그에게서 오늘 전화가 왔다. 그는 의지에 찬 목소리로 &ldquo;이번에 심사에서 떨어진 야외극! 어떻게든 올릴 거예요. 그리고 우리 이번에 획기적인 시도를 할 거예요. 주민을 모두 만나겠다는 각오로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연극을 알리고 극장에 오게 할 거예요. 꼭 한번 오세요.&rdquo; 일종의 가가호호 마케팅을 하겠다는 것인데, 무모함 없이는 현재의 난국을 타개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하여튼 의기충천한 목소리였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예술 현장에 뛰어든 이들은 모두 무모한 시도로 시작하게 된 것이고, 여전히 무모한 하루하루를 사는 것 아닌가.


오세형

필자소개
오세형은 연극분야에서 연출, 기획, 제작에 참여하였고, 2005년부터 경기문화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예술가들의 만남과 자극을 위한 국제 레지던스 프로그램, 젊은 예술가 집중육성 등에 관심이 많고 독일의 탄츠하우스 같은 현장과 제도와의 흥미로운 만남을 주선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본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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