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예술 현장의 한가운데서 ‘예술경영이란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이가 있다. 1960년대 문화공보부 공무원으로 출발해 전통예술의 해외진출을 위한 첫 단추를 끼우고, 각종 문화예술 기관 및 단체 경영의 모범 답안을 보여준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이다. 국내 유일의 예술경영 전문 웹진 《Weekly@예술경영》이 대망의 300호 발행을 앞두었던 2015년 4월 9일, 명실상부한 예술경영 1세대로서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그를 찾았다.

집주인과 세입자를 맞바꾼 파격 인사의 주인공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공채 1기로 공무원이 된 이 사장은 2년 근무 후 민정 이양 때 문공부로 배치됐다. 영화배우들과 교류하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영화과를 지망했지만, 주변의 만류에 문공부에서 한국 전통예술을 해외에 알리는 문화사절단을 운영하는 일을 주로 담당했다. 이 사장은 당시를 “달러가 모자라 누구든 해외에 내보내는 데 아주 신중했고, 하나라도 내보내고 나면 크게 생색내던 시절”이라고 회고한다.

국제문화교류에 대한 개념이나 인식조차 미비했던 그 시절, 이 사장은 외국에서 국빈이 올 때마다 청와대에서 국악 공연을 열었다. 30분 단위로 만든 소품 7~9편을 엮어서 수제천 같은 아악이나 정악을 소개하고, 춘앵무, 부채춤, 장구춤, 칼춤 등의 하이라이트를 선보였다. 때로는 국가 원수들이 공연을 보다가 잠드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그런 모습까지 촬영되면서 한국의 전통예술은 비로소 해외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2년, 뮌헨올림픽이 열리자 이 사장은 박범훈, 이생강, 故 김소희 등이 소속돼 있던 한국민속예술단과 24개국에서 순회공연에 나선다. 독일을 시작으로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을 돌고 사우디아라비아, 에티오피아, 이집트, 케냐 등을 아프리카를 거쳐 터키, 예멘, 이란 등 중동을 지나 동남아 7개국까지 순회하고 나니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 이생강은 대금 연주로 《르몽드》에 기사가 나고, 故 김소희는 판소리를 세계에 알리며 유명세를 치렀다. 당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하나도 받지 못해 아쉬움이 컸던 각계 인사들은 “한국민속예술단이 바로 금메달감”이라며 치켜세웠고, 이듬해 국위 선양의 공을 인정받아 50명의 단원들은 국민훈장을, 이 사장은 국민표창을 받았다.

이후 문공부 정책연구관을 거쳐 1983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하 문예진흥원) 상임이사를 역임한 이 사장은 1994년 서울예술단에 이사장으로 부임한다. 그리고 국수호, 김용옥, 박범훈, 손진책 등과 함께 서울예술단을 이끌며 국가기관으로 성장시켜가던 그는 두 가지 사안을 마주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도떼기시장’ 같았던 사무실을 옮기는 것과 문화부로의 소속 이전이었다.

서울예술단은 문공부가 문화부와 공보처로 갈라질 당시 문화부가 아닌 공보처에 소속됐다. 기관 성격상 맞지 않는 일이었으나, 방송광고공사로부터 연 70억 원의 예산을 받아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장은 서울예술단 경영에 관한 미니 차트를 만들어 당시 이어령 문화부 장관을 찾아가고, 국회 본회의에서 서울예술단은 문화부에 소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소속을 이전하고 사무실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하로 옮기게 되었다. 문화부는 이 사장의 이러한 추진력을 높이 사 서울예술단 이사장과 예술의전당 사장 자리를 트레이드하는 파격 인사를 시도했다. 집주인과 세입자를 맞바꾼 셈이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예술의전당으로 자리를 옮긴 후 이 사장에겐 또 다른 난제가 찾아왔다. 당시 예술의전당 내 대형 식당이 결혼식장으로 둔갑해 물의를 빚고 있었기 때문이다. 법정관리를 통해 이를 불허했더니 낯선 사람들이 집으로 돈 보따리를 갖고 찾아와 위협하는 일도 있었다. 여기다 지푸라기로 문화부 장관의 모형을 만들어 화형식을 자행하는 일부 악성 노조에 맞서야 하는 일도 있었다. 만류하는 직원들을 뒤로 하고 노조 위원장을 대면한 그는 예술의전당은 고유명사로뿐 아니라 형용사로서도 이름값을 해야 한다며 그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이 사장은 예술의전당 최초로 3년 임기를 꽉 채운 사장이 되었다.

예술 현장과 학교에서 후배 예술경영인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 사장은 “미래와 과거를 연결시키는 이 순간, 미친놈처럼 열정적이고 즐겁게 일해야 한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구상 시인의 詩 「꽃자리」가 담긴 액자를 가리켰다. 외부에서 보기에 좋은 기관에서 덜 좋은 기관으로 자리를 옮길 때 지인에게 선물받았다는 액자 속에는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라는 시구가 적혀 있다. 이 사장은 이 시구를 자리를 옮길 때마다 가슴에 새기며, 가는 곳 모두를 꽃자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혹여나 좌천되거나 기대하지 않았던 인사이동으로 직원들의 마음이 불편할 때마다 이 시구를 보여주며 위로하고 있다.

이 사장이 가는 곳은 꽃자리가 맞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그곳을 꽃자리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모임과 단체를 조직했다. 서울예술단 이사장 시절 지방으로 공연을 다니면서 훌륭한 공연장에 비해 낙후된 운영 형태를 보고 아쉬움이 많았던 그는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를 설립했다. 지방의 예술행정 수준을 높이려면 제도를 고쳐나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는 35년 전부터 강의할 때마다 굳은 의지로 강조했던 생각이다.

또, 아시아태평양아트센터연합회, 예장로터리클럽, 예술의전당 초대 후원회, 세종문화회관 초대 후원회 등 이 사장의 의지에서 비롯된 모임과 단체는 한두 개가 아니다. 그는 자칭, 타칭 문화예술 분야의 개척자다. 아이 때문에 공연장, 전시장을 찾기 어렵다는 주부들의 이야기를 듣고 예술의전당에 어린이보호소를 만드는가 하면, 한 달 월급을 몽땅 털어서 후원회를 조직했다. 예술의전당의 울퉁불퉁한 길이 하이힐 신은 여성들에게 위험하단 생각에 대리석 길을 만드는가 하면, 토월극장에 주단을 깔아 관객들이 이동하는 소리에 배우들이 공연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예술경영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이 사장은 “군인이 군복 벗으면 인생이 허무하다고 하듯이 공무원도 똑같다”라면서 문공부를 떠나 문예진흥원 상임이사로 갔을 때 본인도 그러했다고 했다. 허허벌판에 선 기분이었지만, 더 이상 공무원이 아니기에 틀에 박힌 관료가 아니라 창의적으로 공연계 활성화를 이끌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도 했다. 예술인과 대인관계를 맺고 정책을 다루며 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도 바로 그때부터였다고 회고한다. 그렇기에 이 사장은 예술경영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맥을 쌓는 것”이라 말했다.

“인맥이 없으면 버려지기도 하고, 몰랐던 것을 인맥 때문에 알게 되는 것도 많다. 물론 쌓는다고 다가 아니라 어떻게 진실성을 보여주는가가 문제다. 그리고 책임감과 남을 배려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충무아트홀 사장으로 부임하자마자 ‘창조’와 ‘도전’과 ‘배려’라는 슬로건을 만들었다는 이 사장은 100일 만에 15년 후 충무아트홀의 모습을 백서로 펴냈다. 그리고 3개년 단기 계획을 책으로 만들었다. 이로써 직원들에게 구심점을 제시하고 함께 실행해 나가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장은 그냥 있다 가는 사람이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사진촬영_박창현(Chad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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