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난 흰 벽으로 둘러싸인 미술관이나 갤러리의 전시장을 흔히 ‘화이트큐브';(white cube)라고 부른다. 브라이언 오도허티(Brian O';Doherty)는 이 “그림자가 없는 하얗고 깨끗하고 인공적인 공간”을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성의 공간이라고 부르면서, 화이트큐브는 “교회가 지닌 신성함이나 법정이 지닌 형식성, 그리고 실험실에서 풍기는 신비감”을 요구한다고 말한 바 있다. 오늘날 미술 전시장들은 모더니즘 시대의 화이트큐브처럼 전적으로 표백된 공간으로 간주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처럼 삶의 열정과 땀방울로부터 격리된 다른 세계처럼 여겨지곤 한다. 시끄러운 일상사를 잊고 조용한 사색에 빠져들 때는 좋은 공간이지만, 뭔가 세상이 어수선하고 급박한 일이 많이 터질 때는 그만큼 무기력하고 답답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천국의 계단(부분), 안현숙, 2009미술판에서 10년 넘게 일하면서 무수히 많은 전시장을 들락거렸고 일과 관련 없이도 전시 보러 가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나지만, 요즘은 내가 몸담고 있는 곳과 다른 현실들 사이에서 정체모를 답답함을 자주 느낀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뉴스에서 접할 때마다 마음을 어둡게 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서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얼마 전 용산 재개발 예정 상가 옥상에서 일어난 그 참사는 평소 사회문제에 별 관심이 없는 나마저도 화나게 하고 답답하게 만들었던 사건이었다. 미술은 미술이고 다른 일은 다른 일임이 분명한데도, 왠지 이런 세상에서 미술을 한다는 것이 너무 무기력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 사건이 과거의 비슷한 사건들과 어느 정도 같은지 다른지는 잘 모른다. 단순히 갈 곳 없는 철거민들을 공권력이 진압한 사건이 아니라 조직적인 시위꾼들이 정부를 상대로 조금이라도 이득을 더 얻으려고 하다가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이 여섯 명이나 죽었다는 것이며, 그것이 민간인 대 공권력이 대치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현장의 시위대가 들고 있던 피켓 하나에는 “살릴 수도 있었다. 진압이 아니라 구조였다면”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사건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경위야 어쨌든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국민을 우선 보호해야 하는 경찰이 이런 극한 충돌을 예고하거나 최소한 방조하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등등의 생각을 하고 있다가, 이걸 모티브로 전시를 하나 만들어야겠다 싶었다. 현실이 우울하니 미술이 무슨 소용이냐고 할 게 아니라 미술의 공간과 현실의 공간이 겹치는 지점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기획하게 된 전시, 이것이 대안공간 풀에서 4월 29일부터 시작하는 ';드림하우스';전이다.

RAKE, 조민호, 2009
전시를 직접적인 프로파간다로 간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프로파간다를 하고 싶다면 차라리 시위대에 참가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전시장을 선택한 이상, 우리는 미술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전시장은 현실에 대해 우회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곳이고, 그렇기 때문에 무기력한 곳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고유의 힘을 갖는 곳이 아닐까? 이곳에는 거리의 소음이 없는 대신 소음 속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무엇이 있다. 그렇게 믿으면서 나는 이 전시를 ‘공간’의 문제로 풀어보기로 했다. 용산참사의 옥상과 화이트큐브의 공간이 겹쳐지는 곳. 혹은 성장제일 개발독재 시대의 논리로 무장하고 나라 전체를 갈아엎을 기세로 진행되고 있는 도시 재개발 사업을 둘러싼 풍경들, 그 와중에 사라져 가는 공간들, 일상의 공간을 규정하는 ‘부동산적 시선’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물론 작업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 작가들이 하는 것이다. 좋은 작업을 보여줄 수 있는 작가들을 섭외했다. 이쪽 문제라면 일가견이 있는 대안공간 풀의 다른 운영위원들이 작가 선정을 도와주었다.

몇 달 간 건강이 좋지 않았고 박사논문을 아직 쓰고 있어서 사실 요즘 전시기획에 에너지를 쏟을 여력이 없는데, 왠지 이것만큼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몸을 움직이고 있다. 미술관을 그만두면서 더 이상 하고 싶은 전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조금은 바뀐 것 같다. 화이트큐브를 선택하길 잘 했어, 라고 생각할 수 있는 전시를 아직은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조선령

필자소개
조선령은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서 1998년에서 2007년까지 일했으며 현재는 독립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오감만족>, <쾌락의 교환가치>, <일상의 역사>, <정정주_INSIDE OUT>, <방정아_세계> 등의 전시를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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