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2005년 아시아미술포럼에서 발제중인 리버풀비엔날레 부집행위원장 폴 도메라몇 년 전 아시아미술포럼을 진행할 때, 외국에서 온 큐레이터들과 심포지엄 직전에 잠시 짬을 내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영국에서 온 큐레이터가 문득 "왜 한국에서는 항상 물에 젖은 휴지를 재떨이에 넣느냐?"고 물었다. "담뱃재를 털다가 젖은 재떨이 때문에 불이 꺼지기도 하고, 담배를 재떨이 위에 잠시 올려놓지도 못한다."며 불평 아닌 불평을 이어나갔다. 그러고 보니 필자도 어느 나라에서든 젖은 재떨이를 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에게 "이게 훨씬 청결하고 재떨이를 비울 때도 편리하다."고 대답했다.

즉각 되돌아 온 그의 말은 "재떨이는 담배 피우는 사람을 위한 것이지 재떨이를 청소하는 사람의 편리를 위해 제공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짧은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나는 그에게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필자는 그때까지 젖은 재떨이를 흡연자의 청결한 주변 관리를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니 젖은 재떨이는 사용자의 편리보다는 청소하는 사람 즉, 소유자의 편리를 위함이 더 큰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젖은 재떨이에 익숙해져왔고 이제는 모두들 당연시 여기는 일종의 문화가 되어버렸다.


장면 2.

2008 부산비엔날레 바다미술제에 출품한 이진경의 수영구청문화센터 간판 작업바다미술제 전시감독이 되자마자 비엔날레 큐레이터 경험이 있는 외국의 친구에게 전화를 했더니 대뜸 그가 하는 말이 "넌 이제 죽었다. 전쟁터에 들어간 거야"라며 걱정 반, 축하 반의 인사를 한다. 사실 여느 전시들과는 달리 비엔날레는 전쟁터와 비슷하다. 아무리 잘 훈련된 팀일지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1백여 명에 이르는 작가들의 온갖 요구를 전시로 구성해 내는 일은 마치 전장에서 백병전을 치루는 기분을 가지게 한다. 작가와의 의견 조율, 지역 미술인들의 의견에 관한 문제, 지역주민들과 관공서와의 협조와 같은 진행과정에서의 온갖 합의에 관한 문제들은 전시 개막식까지 줄곧 이어진다. 당연히 모든 스태프들은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조그마한 일에도 상처받기가 쉬워진다.

그리고 현장에서의 마지막 작품제작과 설치단계에서 예상과 달리 전시회의 완성도가 떨어지면 작가는 물론 스태프들도 모두 패닉 상태에 빠지고 만다. 이때부터 큰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몇몇의 눈에서는 눈물도 보이기 시작할 때다. 지휘를 맡은 전시감독에게 결국 모든 책임이 있다.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 수렴, 조정하는 ';당연함';은 여기서 스톱이 걸리고 만다. 어느 큐레이터의 말이 생각나는 시점이다. "예술작품이 민주적 합의과정으로 만들어지나? 예술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전시회도 전시감독의 리더십 없이는 표류하고 만다."


장면 3.

4월24일까지 국회헌정기념관에서 열리고 있는 상해 임시의정원 개원 90주년 특별전시회 전경이것도 좋은 경험이다 싶어, 며칠 전 여의도 벚꽃놀이행사에 맞추어 개막한 독립운동과 관련된 공공기록전시회의 감독을 맡았다. 전시콘텐츠와 프로세스를 이해 못하는 전시대행사 직원과 공무원들 틈바구니에서도 나름대로 일을 끝내가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생각지 못한 일들이 벌어졌다. 관계자들이 전시장에 설치한 사진 패널들을 이리 저리 바꾸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전시장 입구의 이미지 사진은 아예 사진 자체를 교체하란다. 이유는 다른 독립유공자의 가족들이 보면 불만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알기로는 어느 전시회이든지 전시회의 목표는 전시 관람을 통해 관람객이 그것에 감동을 받고, 종국에는 그들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한 기록물이 전체의 구성을 위해 강조가 될 수도 있고 생략도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필자는 역사적 기록과 관계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임을 곧 이해하게 되었다. 필자는 일반관람객만을 최우선으로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전시의 주체와 대상 그리고 개념에 이르기까지 전시의 연출이 고려해야 하는 ';상황의 관계';가 있는 법이다. 개막식 직전, 공부 많이 했다고 책임자에게 인사를 하니 이내 무슨 말인지 알아차린다. "감독님도 좋은 경험이든 나쁜 경험이든 많이 하는 게 좋아요. 그래야 점점 더 좋은 전시를 만들지 않겠어요?" 의례적인 인사말이지만 필자의 귓전을 때렸다.


전승보

필자소개
전승보는 1963년 부산에서 태어나 세종대학교 회화과와 런던대학교(골드스미스) 대학원 큐레이터 학과를 졸업했다. 2008부산비엔날레 바다미술제 <비시간성의 항해> 전시감독과 <열다섯 마을 이야기><에피소드><복숭아꽃, 살구꽃><또 다른 풍경> 등의 국제전과 <아시아미술포럼> 등을 기획했다. 현재 독립큐레이터로 <요코하마 프랑스 비디오 컬렉션>전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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