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공간, 단체, 작품이 제 고유의 색깔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이제는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가 되었다. 하여 '특성화'는 담론이라기보다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당위'가 아닐까. 그럼에도 경영의 현장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성공적'으로 구현한다는 것은 여전히 가장 핵심적인 과제이면서 또 가장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weekly@예술경영]은 창작단위(단체, 개인 아티스트)와 환경(축제, 공간)을 키워드로 예술경영의 현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현실지형을 살핌으로써 특성화의 '당위'를 확인하는 데에서 나아가 예술경영의 현 단계를 점검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연재순서 ③ 공간(미술관)
한국에서 특성화라는 용어가 가장 먼저, 많이 사용된 것은 '교육'분야다. 변화하는 환경에 적으하지 못하고 도태되어 가고 있는 교육체제 전반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사용된 이 말이 가리키는 의미는 '생존'이다. 즉 외면당하고 사라지지 않으려면 특화된 무언가를 지녀야만 하고, 그것을 통해 이제는 선택당하는 대신, 학교를 선택할 입장에 놓인 젊은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어필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 역시 특화를 추구해야 하는데, 이 경우 문제는 조금 더 심각하다. 여기서는 특화를 통해 '피바다'(red ocean)을 피하고 자원이 풍부한 '너른 바다'(blue ocean)로 나앙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교육이나 산업의 특성화와 미술/문화 영역에서의 특성화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공통점은 후기산업사회를 넘어서면서 교육, 산업, 문화 소비자들의 콘텐츠의 다양성과 질에 대한 요구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이고, 차이점은 문화/미술의 경우 콘텐츠에 대한 평가기준이 모호하거나 복합적이라는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영역은 통제되고, 분류되며, 쉽게 조작이 가능한 것들과는 다른 것들로 채워져 있다(고 여겨진다). 한국에서 예술은 이제까지 상당 부분 예측 가능한 범위의 결과물들로 구성되어 왔다. 상투적이고 반복적이라도 예술적 아우라를 지닌다는 조건 하에서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관객들은 예술작품이 그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다른 경험으로 이끌어주기를 기대한다. 상이한 형식과 장르, 주제와 시각적 특성들이 각각의 역량을 극대화하는 모험을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획일적이지 않은 탁월한 예술을 원한다


한국미술의 경우, 특성화라는 이슈의 제기는 지금까지 모두가 참고 견뎌온 고질적인 몇 가지 문제들로부터 비롯된다. 소위 제도적 예술체제(미술문화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당위적 공감에 의해 타율적으로 만들어지고 보호되어온 제반 시스템)에서 만들어진 상투적이거나 획일적인 스타일, (좌우할 것 없이) 동일한 기준을 강요하는 교조적 담론, 미술교육의 부진으로 인한 예술인 및 일반 대중의 예술에 대한 소극적 태도와 지식 등이 작금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들로 인식되고 있다. 여기에 국가적 문화 브랜드의 필요성과 공동체의 문화적 수월성에 대한 열망, 훨씬 더 많은 문화적 향유를 누리고자 하는 시민들의 욕구가 가세하여 더 다양하고 뛰어난 콘텐츠들을 강력히 요구하게 되었다.


핵심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많은 수의 획일적이지 않은, 탁월한 예술작품들과 그것들을 보여주는 전시공간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대안공간을 몇 개 더 보유하거나, 기무사를 멋진 미술관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으로만 얻어지지 않는다. 특성화는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문제로서, 그 실마리는 정책이나 비평, 시장, 그리고 교육이 함께 찾아야 할 문제인 것이다.


미술대학은 미술 영역에서 활동하거나 향유하는 대다수의 인원을 교육하거나 양성한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미술대학은 오늘날 급격하게 미술의 내용과 표현형식이 변화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대응할 것을 주문받고 있다. 변화의 주된 이유는 세계화와 그 안에서 활동하는 미술인구의 빠른 수준향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술 및 문화 지식, 정보의 순환과 배급은 이미 미술대학의 역량을 앞지르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미술대학의 교육은 학생들이 스스로 커나갈 수 있는 토대와 자질을 제공할 수 있을 만큼 고급화, 전문화 되어야 한다. 여기서 특성화는 이러한 교육적 환경과 역량을 어떻게 획득할 것인가라는 방법의 문제로 드러나게 된다. 런던의 골드스미스가 채택하는 튜토리얼 제도, 암스테르담 리트펠트 아카데미의 순환 교수제에 의한 현장성, 전문성 강화, 일본 타마대학의 원스톱 워크숍 시스템 같은 것들이 굳이 말하자면 교육의 특성화 전략인 것이다.




비전과 미션에서부터 차별화 필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전경, 영국 발틱 아트센터


전시공간들을 유형별로 살펴보면 미술관, 갤러리, 그리고 비영리 전시공간(대안공간) 등을 들 수 있다. 미술관의 경우, 비영리성을 추구한다는 점 외에 스스로 어떤 비전과 미션을 부과하는 지가 오늘날 핵심적인 차별화를 이루어낸다. 공공미술관으로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을 비롯한 여러 시립미술관들이 있으나, 근대미술, 드로잉을 위주로 하는 덕수궁, 소마미술관 등의 미술관 외에 별도로 특화가 되어 있는 미술관은 거의 없다. 전시 콘텐츠의 생산과 전시는 사실상 어떤 전시공간이라고 해도 무관할 정도로 서로 유사하다. 무엇보다도 웹사이트 등에 다른 미술관과 내용적인 차별성을 보여주는 미션을 적고 있는 미술관이 없다. 덕수궁이나 소마의 경우조차도 기능적인 차이들일 뿐 구체적으로 어떤 비전이나 미션을 언급하는 경우는 없다.


예컨대, 뒤늦게 비평가들의 주도로 출범했으며 동시대미술의 담론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컨템포러리 미술관(MACBA)은 미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20세기 후반의 미술에 대한 비평적 기억을 구축하는데 있어 두 가지 목표를 추구한다. 첫째, 지역-국가의 신화화를 꾀하는 수사적, 헤게모니적 세력들에 반대하기 위해 도심에 위치하는 제 3의 경제체제를 위한 능동적 매개로서의 문화기관을 활용한다. 둘째, 일반적으로 구경거리로서 제공되는 원작이라는 보편주의적 신화에 기반한 미술관의 지배적 모델의 불충분함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마찬가지로 영국의 뉴캐슬에 있는 발틱 아트센터 역시 상설 컬렉션을 두지 않는 대신 동시대미술 활동에의 독자적이고 흥미로운 성찰을 제공하는 상시 변화하는 전시 및 활동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이 미술관은 지역 공동체에 기반한 미술관이면서 동시에 세계적인 위상을 갖추고 있는 중심지로서의 특수성을 미션에 담아내고 있다.




컬렉션 및 운영 전문성 보여주는 사립미술관들


공공미술관의 정책적 특성화는 반드시 고려해야 할 중요한 사안이다. 그리고 그 방향은 동시대미술에 대한 뚜렷한 기여로 이어져야 한다. 사립미술관의 경우는 운영과 수준에 있어 공공미술관들을 훨씬 앞서고 있다. 독자적인 컬렉션을 기반으로 전문적 운영을 하고 있는 리움과 간송미술관, 환기미술관, 현대미술의 주요 이슈들을 짚어온 토탈미술관과 조각 중심의 뛰어난 개인전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김종영미술관 등이 있다. 일민미술관과 선재아트센터는 기업의 주도로 탄생했으며 흥미로운 기획전시들을 보여줘 왔다. 그 외에도 지난 90년대를 거치면서 많은 사립미술관들이 생겨났다.


베네세 아트 사이트 나오시마의 치추 미술관(Chichu Art Museum, Benesse Art Site Naoshima)
여전히 성격이 모호하거나 제대로 기능을 못하는 미술관들이 많이 있으며, 지나치게 일본의 문화관광 콘텐츠 모델을 따르다가 흐지부지된 경우도 많다. 일본의 경우, 소규모 컬렉션들을 보여주는 지역 미술관들이 활성화되었으나 현재 운영과 지속적인 관객유치에 있어 어려움을 겪는 곳들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에는 독일의 인젤 훔브로이히나 일본의 나오시마미술관이 잘 알려져 있으나 이와 같이 성공적인 미술관의 경우 매우 지속적이고 혁신적인 건축 프로그램 혹은 컬렉터의 예외적인 취향을 반영하는 환경과 함께 장기간에 걸쳐 구축된 것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상업갤러리 시장 변동에 따른 특화


상업갤러리의 경우는 시장의 퍼포먼스에 따라 각자 주어지는 역할이 달라지기 때문에 자연적인 특화가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국내의 300여 개가 넘는 갤러리들 가운데에는 국제, 현대, 가나, 아라리오, PKM 등과 같은 메이저 갤러리들이 있는가 하면, 브레인팩토리, 팩토리, 쿤스트독과 같은 젊은 실험적인 작가들을 주로 소개하는 대안공간에 가까운 갤러리들도 있다. 오늘날 상업갤러리들은 끊임없이 프로그램의 혁신을 통해 보다 커다란 시장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받는다. 특히 주요 아트페어에 진입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독자적인 기획 프로그램과 탁월한 신진작가 발굴, 글로벌 스탠더드에 접근하는 전시구성 등이 충족되어야 한다.


물론 해외의 유수한 갤러리들의 경우 2~30년 넘게 갤러리스트가 자신의 취향을 고집해 온 경우들이 많다. 이러한 갤러리들은 그 자체로서 문화지형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뿐 아니라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국에서 국제, 현대, 선화랑 등이 맡아온 역할이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차제에 새로운 갤러리들이 그 역할을 맡을 수 있어야 하며 참신한 취향과 흐름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대안공간, 90년대 미술계의 새로운 지형


대전 갤러리 반지하, 부산 대안공간 반디


대안공간은 90년대 말에 미술계의 새로운 지형을 만들어내면서 신진작가들의 등용문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오랜 기간 많은 기여를 했던 쌈지가 최근 문을 닫았음에도 현재 루프, 휴, 풀, 사루비아, 정미소 등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이러한 형태의 공간은 인사미술공간, 창동-고양 아카데미와 같은 공적 기관이나 상상마당과 같은 사립기관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현재는 지방에도 대안공간이 확대되어 부산의 반디와 대전의 반지하 등이 잘 알려져 있다. 대안공간은 대부분 비영리로 운영되고 있으며 공공재원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반면 비영리라는 점은 활동의 자율성을 보장하는데 중요한 조건이 된다. 따라서 각 공간의 성격이 강하게 부각될 수 있으며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 강점이다. 공모를 통해 공간의 성격에 맡는 작가들을 발굴해내는 과정이 따르게 되며, 정치적 진보성, 형식적 실험성, 미디어 기반, 개념성 등이 강조된 작업들이 주된 프로모션의 대상이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미술에 있어 특성화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의도적인 조정에 의해 획득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의 취향과 신념, 그리고 그것들이 각기 자신들을 가장 잘 반영하는 방향으로 극대화될 수 있도록 지지해 줄 수 있는 환경이다. 사람이 떠나면 공간은 시들어버린다. 마치 돌보지 않는 정원이나 온실과 같은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야생의 풀이나 나무가 되어 뿌리를 내리고 풍경을 이루는 환경을 관용하고 허용하고 지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것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특성화는 그것의 표현이 되어야 한다.



유진상

필자소개
유진상은 서울 생으로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조형예술학, 영화, 철학 등을 전공했다. 미술비평 칼럼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공장미술제';';, ';';아시아프';'; 등을 기획했다. 현재는 계원디자인예술대학 교수로 있으며 국제갤러리 사외이사, 한국화랑협회 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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