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에 대한 뜬구름 잡는 이야기 말고, 지역문화라고 일컬을 만한 현장 이야기를 소개한다. 아직은 척박하지만 지역민과의 다양한 교류활동이 공연단체의 안정적인 운영기반 확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역의 고유한 가치들을 연극을 통해 구체화하는 일상의 이야기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노뜰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후용1리에 있는 후용공연예술센터를 창작공간으로 연극연구와 실험을 일삼는 전문예술단체이다. 후용공연예술센터는 폐교를 리모델링한 곳으로 극장, 스튜디오, 휴게실, 세미나 룸, 게스트하우스 등 창작활동을 위한 기반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곳에 예술가 그룹과 지역주민이 함께 살고 있다. 노뜰은 바로 이곳을 기반으로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비영리단체이다.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지역기반의 예술단체들은 늘 주민들과의 불협화음을 경험한다. 새로운 사람들에 대한 시선도 따가운데, 일 같지도 않은 예술을 한다고 하니 서로의 믿음을 얻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노뜰의 경우도 처음 몇 년은 지역 주민들과의 갈등해소에 노력을 집중했다고 한다. 그런 과정에서 예술단체와 지역주민 간의 믿음을 형성시켜 준 것이 연극이었고, 이제는 그 연극의 실연에 가장 힘 있는 주요관객이 지역주민이 되었다.

예술가와 주민이 함께하는 후용리 예술체험 놀이

노뜰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은 예술가이고,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진 개인들이다. 사람과 관계 맺는 방식도 다양하고,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이 다르다. 각자의 목표가 다르고 각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다르다. 그런 그들이 담론을 주고받고, 하나의 목표달성을 위해 꾸준히 연구하고 실험하고 있다. 때로는 열심히 준비하고 올린 작품에 대해 관객, 평단, 언론 등에서 별 반응 없을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무반응도 하나의 경험으로 삼으며 하던 일들을 계속 한다.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노뜰 대표님이 여느 때처럼 마을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이장님께 인사를 드렸다. “이장님 한가하세요?”(그냥 평범한 인사를 드렸던 거다.) “어~ 막걸리 있나?” “네에?” “막걸리도 없으면서 뭘 한가하냐고 물어?”

이장님은 그 길로 구멍가게에서 막걸리 너덧 병을 사와서는 곳곳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핸드폰으로 일일이 전화를 걸어 얼른 툇마루로 나오라고 한다. 연습하다 말고 꾸물꾸물 정리하는 모습에 이장님께서는 “언제 공연인데?” 물으신다. “6월 말입니다” “아이... 그럼 뭐 아직 한참 남았네. 지금 연습 안 해도 되겠네? 그거 뭐 보름이면 되지” “이장님 그래도 최소 3개월은 연습해야 공연할 수 있어요. 이장님은 어디 모 심고 나서 보름 지나면 수확하실 수 있으세요?” 이장님은 허허 웃으신다. 그러는 사이 운동장을 오가던 주민들 몇 분도 툇마루에 걸터앉으신다.

그렇다. 우리의 연습과정과 그들의 모내기, 우리의 공연과 그들의 벼 수확은 다르지 않다. 거창할 것 없이 그냥 우린 연극 지으며 살고 그들은 농사를 지으며 산다. 뭐해서 먹고 사는가가 다를 뿐이다.

극단 노뜰 단원, 레지던스 예술가, 그리고 후용리 마을주민들그들은 이제 우리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어떤 외국 예술가를 만나도 자연스럽게 “Hello”로 답인사를 해주시고, 거침없는 손짓발짓으로 서로 이웃을 맺는다. 예술체험 놀이시간에 수줍어하면서도 삶의 애환을 조심스레 꺼낼 줄 아시며, 그 때의 기억을 하얀 도화지에 새기기도 한다. “난 못해, 못해” 하시다가도 젊었을 때 불렀던 흘러간 노래로 흥을 돋우시며 춤사위도 마다하지 않으신다. 또 어떤 시간에는 우리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다가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신다. 기억이라도 잘 나질 않으면 또 다른 이웃주민이 이야기를 받아 이내 이야기를 완성한다.

공연을 관람할 땐 햄릿의 갈등과 고뇌, 억압받고 있는 보이첵과 비련의 마리, 본능을 억제하며 살아가는 베르나르다의 딸들, 전쟁과 같은 병사의 삶 등을 자신들의 삶에 비추어 바라보신다. 참 신기하다. 문학, 미술, 음악, 무용, 연극을 총망라한 예술교육(Arts in Education)의 실천이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그들의 눈빛과 웃음과 베품과 겸손함에서 느끼는 깨달음, 다시 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주민들이 제공해주는 자양분은 창작을 촉진시키고, 종종 신기루를 경험하게 한다. 예술단체의 안정적 기반의 기본은 창의하는 힘일진대, 그 힘의 축적에 영향력을 미치는 바로 우리와 이웃해 살고 있는 주민들이다. 수치로 셀 수 없는 그들과의 연대감으로부터 풍요로운 삶을 일구고 있다. 그들과 함께 일구는 삶은 녹록하진 않지만, 매우 매력적임에는 틀림이 없다.

주민들과 함께 한 공연 뒷풀이지역을 기반으로 한 예술가나 단체의 예술운동은 기존의 예술영역을 다루기도 하지만, 다양한 관계로부터 생성되는 또 다른 형태, 그동안 시도되지 못했던 새로운 관계와 활동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일상의 영역이 된다. 문화다양성을 인정하고 소수자의 인권을 존중하라는 문화민주주의의 이념실천이 바로 그런 것일 것이다. 1976년 나이로비에서 채택된 유네스코 권고안에서는 다양한 문화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인간적인 기본가치와 개인의 품위 발전에 필수불가결하다고 전제하고 있고, 유럽의회의 문화정책에서도 성, 인구, 연령, 직업, 지역 등에 있어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강조한다. ‘창의한국’ 역시 실질적인 문화 소외자에 대한 정책적 반성과 자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백경숙

필자소개
백경숙은 2002년부터 공연예술분야에서 공연기획 및 제작, 예술경영의 현장에서 활동하였다. 2006년부터 전문예술단체 극단 노뜰의 기획팀장으로 근무하며 공연기획, 예술경영, 공연제작, 예술가창작지원, 관객개발 및 예술교육을 주업무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유휴공간의 효율적 운영에 대한 관심이 많아 국내외 유휴공간 및 대안공간에 대해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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