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교차로(로터리)를 영국에서는 라운드어바웃(Roundabout)이라고 부른다. 차들이 둥근 로터리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제 갈 길을 찾아나가는 시스템이다. 한동안 곤혹스러웠던 일은 이곳에 들어서기만 하면 차들이 상향등을 깜빡거리는 통에 난처했던 일이다. 한국에서 상향등을 켜는 것은 상대방에게 위험신호를 보내는 약속으로 사용된다. 특히 우리의 경우엔 자신이 먼저 진입했으니 상대방에게 조심하라는 신호로 주로 사용하는데, 영국에서는 이게 무슨 신호인지를 당최 짐작하기 어려웠다. 차들이 상향등을 깜빡거린 후에도 먼저 지나가지 않고 계속 신호만 보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상향등을 깜빡거리는 것은 자신이 양보하겠다는 신호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와는 정반대로 신호를 사용하는 셈이다. (물론 이것 말고도 동서양의 ';같은 형태, 다른 내용';의 문화는 많이 있다.)

벌써 십 수 년이 지났지만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어느 날 집으로 되돌아오는 늦은 밤. 낯선 숲속의 라운드어바웃에 들어서면서 위험한 순간을 맞았다. 먼저 진입한 차를 미처 보지 못하고 들어선 것이다. 요행히 옆에서 들어 온 차가 먼저 발견하고 급히 깜빡이를 켜주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하면서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했다. 자동차 속의 운전자가 외부의 세계로 보내는 유일한 신호를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장면 2.

퇴근 시간 교통정체는 런던도 서울과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은 상습정체 구간에서 볼 수 있다. 뻥튀기나 오징어 같은 먹을거리를 파는 행상이 아니라 장미꽃을 파는 아저씨들이 거기에 항상 서있다. 플라스틱 양동이 속에서 꺼낸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서있는 행상을 보면서 필자는 “아따, 멋있네. 여유도 있고.” 혼자서 이런 속말을 하곤 했다.

어느 날 동기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장미꽃 행상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는 차가 밀릴 때의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푸는데, 너네는 희한하다. 장미꽃 냄새를 맡다니. 부럽기도 하고.” 나의 말에 친구는 박장대소를 했다. 말인즉슨, 정체구간에 걸린 운전자가 장미꽃 한 송이를 사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란다. 퇴근을 기다리는 아내, 애인 혹은 미팅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산다고 한다. 시간에 늦게 도착해서 장미꽃 한 송이를 내밀면 상대방이 교통정체 때문에 늦게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세월이 한참 지난 후 지금 필자는 엉뚱한 상상 하나를 해 본다. 장미꽃 행상을 전국의 상습정체지역에 갑자기 출현시킬 수는 없으니, 다음부터는 만약에 길이 밀릴 때 뻥튀기 한 봉투씩 사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에게 전해주자. (뻥튀기의 문화적 기호는 이렇게 해서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지난 6월 일본 요코하마 레드블릭 갤러리에서 열린 <요코하마 프랑스 비디오 컬렉션>전의 실내 풍경. 필자와 함께 프랑스 2명, 캐나다 1명의 큐레이터가 참여해 모두 17명의 비디오아티스트를 초청했다.



장면 3.

햄튼코트 근방의 집에서 학교까지 가려면 동네 길을 벗어나 국도 A3 길을 타고 간다. A3로 올라가는 길은 2차선 일방통행이다. 처음엔 아무런 의식이 없었지만 이상한 장면을 종종 목격하곤 했다. 한쪽 차선을 텅 비워놓고 한쪽으로만 줄을 지어 A3로 진입하는 것이다. 혼자 생각으로 &lsquo;조심성 많은 사람들이라 안전한 길 가장자리 쪽으로만 진입하려고 그러나보다.&rsquo; 라고 여겼다. 물론 나는 여유 있게 빈 차선으로 돌진해 &lsquo;별로 위험하지도 않은&rsquo; 길 안쪽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 기분이 자꾸 들었다. (내가 아무리 터프한 운전자라 하더라도 그렇지.)

시간이 꽤 지난 후 이웃집 아주머니 ';슈브린';에게 물어보았다. 왜 그렇게 한쪽으로만 차가 진입하는지를.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한쪽으로만 진입해도 기다리는 시간이 길지 않기 때문에, 한쪽 차선은 응급차량이나 급한 볼 일을 보러가는 사람들을 위해 비워둔다고.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결론은 &lsquo;나는 항상 급한 한국사람&rsquo;이었던 것이다.




전승보

필자소개
전승보는 1963년 부산에서 태어나 세종대학교 회화과와 런던대학교(골드스미스) 대학원 큐레이터 학과를 졸업했다. 2008부산비엔날레 바다미술제《비시간성의 항해》전시감독과 《열다섯 마을 이야기》《에피소드》《복숭아꽃, 살구꽃》《요코하마 프랑스 비디오 컬렉션》등의 전시회를 기획했다. 현재 독립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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