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공연예술계는 그 어느 때보다 힘들다. 많은 공연이 취소 혹은 축소되고 있는 가운데 무관중 스트리밍 콘서트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가끔 확진자 증가율이 감소하는 시기에는 교향악 공연도 올라가지만 이마저도 무대 위의 거리두기를 지키면서 현 위주의 소규모 편성으로 진행된다. 4관 편성의 후기 낭만주의 교향곡과 같은 대규모 연주는 무대 위 거리두기로 인하여 무관중 콘서트조차 어렵다.

필자가 제작 팀으로 참여하여 초연 준비를 하고 있는 창작 오페라 한 편이 있다. 이 역시 취소와 축소의 갈림길에서 고군분투 중이다.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포함하여 총 170명이 한 무대에 오르는 대규모 편성으로 작곡되었지만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지속되면서 불가피하게 대면 공연을 취소하였다. 이에 더해 실내 공간 50인 이하 집합 금지 명령에 따라 두 개의 공간으로 나눠 스피커 모니터를 통해 합창과 오케스트라가 동 시간 연주를 진행하고 이를 영상으로 담아 편집 후 송출할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오페라의 중요한 음색을 담당했던 금관 악기 편성이 대폭 생략되고 특수 악기들이 피아노로 대체되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연주보다도 영상 촬영과 음향 녹음 관련된 기술적 숙련도가 더 콘텐츠의 퀄리티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처럼 공연의 변동성이 점점 커지면서 예술가들이 감내하고 고민하고 도전해야 할 일들이 기존의 경험을 넘어서면서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예상외로 코로나 팬데믹이 길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것은 감염병의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베토벤 9번 교향곡 같은 규모의 관현악곡이나 그랜드 오페라를 창작했던 19세기적 음악 전통은 종말을 고할 것인가? 대면에서 비대면 세계로의 전환은 대면 접촉을 감상의 미학적 에센스로 꼽는 공연예술 전반에 재앙이 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장르와 연행 양식을 촉발시키는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킬 것인가?

이 지면에서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대안적 예술 형태가 무엇인가에 대한 어떤 섣부른 답을 내리기 전에 과거에 사회문화적 변동이 음악 장르의 새로운 탄생을 어떻게 추동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근대 예술음악의 사회문화적 환경

한 시대의 사회 및 문화 변동은 음악사회의 변화를 가져오며 음악사회의 변동은 다시 음악의 양식과 장르의 출몰에 영향을 미친다. 음악사에서 구양식을 대체하고 신양식이 출현하는 계기들은 항상 외부 요인들의 충격과 자극 속에서 내적 요인들이 이에 반응하면서 나타났다. 그러므로 음악 내적 흐름에 초점을 맞추는 양식사와 음악 외적 환경에 초점을 맞추는 사회사는 항상 음악사라는 하나의 마차를 떠받치는 양 수레바퀴라 할 수 있다. 특히 18세기 이후의 서양음악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세로부터 르네상스라는 다리를 건너 근대로의 전환이라는 사회문화사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증기기관차, 다축방적기 등이 처음으로 발명된 시대에 살았고 칸트는 『순수이성비판』(1781)에서 인간 지식의 가능한 범주를 정의하려는 시도를 했다. 디드로를 비롯한 프랑스 철학자들은 백과사전 편찬으로 당대의 지식을 총망라함으로써 지식권력의 민주화를 이루려 하였다. 이 시기 정치 이론가들은 절대군주제의 문제점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으며 개인주의의 성장을 촉발시켰다. 요컨대, 18세기는 <이성의 시대>에서 <혁명의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였다.
18세기 이후의 근대 예술음악은 과학기술의 발달, 산업혁명, 그리고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지는 역동적인 사회 변화와 연동되어 있다. 중세음악을 대표하는 장르는 교회를 기반으로 모테트, 미사와 같은 성악 다성음악이었다면 근대를 연 서양음악의 대표 장르는 인간의 육체성을 리듬 패턴으로 담아낸 기악음악(춤곡에서 출발)과 인간의 감정과 극적 정서를 가사와 악곡으로 표현한 오페라라 할 수 있다.

사적 음악회와 현악4중주

18세기 초, 아마추어 음악가들이나 전문 음악가들은 중산계층의 가정이나 부유한 상류층의 응접실에 서로 모여 음악하기를 즐겼고 여러 다양한 배합의 실내악을 위해 많은 레퍼토리가 필요했다. 그중에서 현악4중주는 18세기에 가장 선호되는 실내악이었다. 아마추어 연주가들의 참여를 위해 사실상 초기 사중주들은 단순한 스타일을 가졌다. 청중을 위한 곡이라기보다는 연주하는 사람들이 음악을 만드는 즐거움과 함께 나누기 위한 곡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이든의 초기 현악4중주들을 희유곡(divertimento)라고 한 것은 여흥을 위한 음악, 즐기기 위한 음악이라는 뜻으로 고전주의 초기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다.

공공연주회의 발달과 교향곡의 시대

현악4중주와 구조적인 측면에서 - 4악장 구조와 조성적 설계 등 - 같지만 규모와 악기 편성에서 확장된 형태의 교향곡은 본래 17세기와 18세기 서양의 궁정사회가 남긴 유산이었다. 그러나 절대군주제의 몰락 속에서도 교향곡은 더욱 예술적으로 발전하였는데 이를 뒷받침한 배경에는 신흥 부르주아지 중심의 시민사회의 성립과 발전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한 연행 양식은 공공음악회(public concert)였다.

17세기 말 이전에는 음악 연주를 주목적으로 하는 독립적이고 공식적인 무대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음악 활동은 음악 전용홀이 아닌 다른 용도의 장소(교회, 궁정, 시장, 가정 등)에 일시적으로 혹은 행사의 부수적인 순서에 첨가되는 식이었고 귀족들이 주관하는 사적 음악회(private concert)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데 18-19세기에 오면 런던, 파리, 빈에서 음악협회, 음악원, 음악 잡지 등을 매개한 공공음악회가 발전한다. 신흥 부르주아지는 왕과 귀족처럼 교향악단을 독점적으로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협회를 결성하고 시즌 예약을 통한 사전 기부 형태(일종의 티켓 구매 행위)로 재원을 공동으로 마련해서 많은 사람들이 극장에서 함께 모여 감상하는 공공음악회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초기 공공연주회 가운데 하나였던 ‘콜레기움 무지쿰’ 야외공연 모습 초기 공공연주회 가운데 하나였던 ‘콜레기움 무지쿰’ 야외 공연 모습

예컨대 1800년 4월, 빈 궁정 극장에서 이루어진 베토벤 1번 교향곡 초연은 특정 패트론을 위한 작품 연주가 아니라 베토벤의 이름을 내건 첫 아카데미로서 공연 수익을 작곡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공공연주회였다. 이는 당시 교향곡이 공공연주회를 통한 작곡가의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중요한 장르로 자리 잡기 시작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공공음악회는 대조적인 성격의 두 음악회로 동시에 발전되었는데 하나는 대규모의 청중을 수용한 대중음악회(popular concert)이고 다른 하나는 고전음악회(classical concert)였다. 전자는 기예적(virtuoso) 음악을 통해 전문 연주자들의 고도의 테크닉을 화려하게 감상하는, 감각적인 음악의 매력을 중시하는 음악회였다. 파가니니와 리스트의 바이올린, 피아노 리사이틀은 이러한 대중음악회의 정점에 해당한다.

테오도르 호세만, <연주회의 리스트>(1842)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테오도르 호세만, <연주회의 리스트>(1842)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19세기 중엽에 성행했던 기예적인 대중음악회는 20세기 미국을 중심으로 대중매체를 통해 성장한 대중음악 콘서트의 19세기적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고 20세기 클래식 음악시장을 부흥시킨 전문 연주가 중심의 스타플레이어 시스템을 마련한 전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공공음악회의 두 번째 유형은 고전음악회로서 음악협회, 음악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들은 오락적 성격으로 흐르는 당대의 기예적 음악과 대중음악회를 비판하였고 대신에 18세기 하이든 교향곡을 위시하여 과거 예술음악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고전음악회를 주관한 협회들은 이후 100년간 유명 교향악단의 기초를 만들었고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가 이끄는 독일 고전 양식의 안착에 크게 기여했다.

조선 후기 사회 변화와 성악 장르의 발전

한국의 전통음악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장르의 출몰에 당대의 정치 경제적 변화 및 음악사회의 변동이 반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오늘날 전통음악의 주요 레퍼토리로 연주되는 가곡과 현악영산회상, 판소리, 잡가 등은 조선 후기의 음악사회 변동과 연관된다. 특히 18세기 이후 시민 계급의 부상과 공공음악회라는 연행 양식이 교향곡과 같은 서양음악의 근대적 장르 발달에 영향을 준 것처럼 조선 후기 도시를 중심으로 한 중간계층의 대두와 이들이 즐겨 찾은 풍류 음악이 발전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조선 후기에 상공업 및 도시 발달 속에서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한 중인 계층은 역관이나 의관과 같은 전문직 종사자뿐만 아니라 서얼과 향리, 행정직 하급관리인 이서층까지도 포함한다. 이러한 중간계층은 사대부 취향을 모방한 여항문학이나 서화 등을 즐기게 되었는데 음악에서는 관현반주 위에 전문 가객이 노래하는 가곡의 발달로 나타났다.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중간계층의 소비적이고 유흥적인 예술 취향이 두드러짐에 따라 가곡의 노랫말은 연애나 애정 문제로 채워졌고 선율은 장식적이고 유려해지는 ‘번음촉절’ 양상을 나타냈다.

가곡이 시를 노래로 만든 성악 장르라고 한다면 극적 이야기를 노래로 엮은 판소리는 모노 오페라에 해당하는 성악 장르이다. 판소리 역시 조선 후기 음악사회의 변화와 매우 직접적으로 연동되어 있으니 조선 후기 대동법 실시 및 상업 경제와 도시 발달과 연관성을 갖는다는 측면에서 가곡의 사회 문화적 배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가곡이 중인이나 사대부의 사랑방 음악(일종의 실내악(chamber music)인데 비하여 판소리는 장시의 발달이나 삼일유가로 알려진 과거급제 행진 이벤트 등 야외 활동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소리 광대 옆 ‘모흥갑’이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평양감사 부임도>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품 소리 광대 옆 ‘모흥갑’이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평양감사 부임도>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품

이후 20세기 초 협률사 광무대, 단성사 등 근대식 극장이 생기고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공공음악회가 성행하면서 판소리도 이러한 극장 시스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여러 인물을 여러 소리꾼이 나눠 맡는 창극을 파생시켰다.

광무대 내부 모습(무쌍신구잡가집) 광무대 내부 모습(무쌍신구잡가집)

코로나 시대 새로운 장르 변화

지금까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새로운 음악 변화 양상을 예견하기에 앞서 과거의 역사적, 사회적 격변기에서 새로운 예술 장르들이 어떠한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 출현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20세기 이후 보편화된, 음악 전용홀에서 대면 접촉으로 실연과 감상이 이루어지는 방식은 서양 클래식 음악과 한국 전통음악을 불문하고 모두 18세기 이후 서구 시민 계급의 출현과 공공음악회라는 근대적 패러다임의 연속성에 놓여 있다. 그런데, 코로나의 장기화가 이미 진행되어 왔던 디지털 혁명을 한층 가속화함으로써 극장 중심의 공공음악회와 기존 장르의 연행이 쇠퇴 혹은 종말의 시점에 다가온 것은 아닌지 회의적인 시선이 증가하고 있다.

코로나 이전에도 대중매체의 발달과 디지털 기술 혁명의 진전으로 비대면 음악 감상과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기반한 새로운 실험들이 상당한 정도로 시도되어 왔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찌 보면 코로나 팬데믹으로 21세기적 음악 생산 및 수용에 대한 패러다임 시프트가 좀 더 빨리 왔다고 보는 편이 맞을 수도 있다. 이후에는 대면과 비대면이 공존하고,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하나의 콘텐츠를 구성하며 음악과 타 예술 분야, 예컨대 미디어 아트와 같은 새로운 분야가 통합되는 융복합 예술이 고전적인 장르들을 대체하거나 보완하면서 새로운 창작 트렌드를 견인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아가 하이테크닉이 창작을 보조하는 기술 지원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창작의 소재 및 콘텐츠가 되는 시대가 앞당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첨단 기술이 기존 예술과 접목되고 융합되려면 예술적으로 새로운 상상력에 상응하는 기술력과 자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현재로서는 기술과 자본을 겸비한 진영과 그렇지 않은 진영 사이의 양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구양식과 신양식의 대결과 갈등으로 나아갈지, 구양식의 보존 위에 새로운 양식이 첨가되면서 다양한 장르와 양식이 적층되는 방식으로 파이를 키우며 공연예술의 생태계가 더욱 확장될지는 아무도 예단할 수 없다.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중요해질 것이다.

  • 이소영
  • 필자소개

    이소영은 서울예고와 서울음대 기악과를 피아노 전공으로 졸업하고 2007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일제강점기 신민요의 혼종성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95년 <국악기 개량의 현황과 전망>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음악평론상 당선 이후 음악평론집 『나는 다르게 듣는다』, 『이소영의 음악비평- 생존과 자유』, 학술저서 『한국음악의 내면화 된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와 『20세기 한국음악의 혼종적 음악하기』를 출간하였다. 음악평론가로서 월간 《객석》을 비롯한 다수의 저널에 음악 리뷰 및 칼럼을 기고하였다.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서양음악과 전통음악, 대중음악 활동 전반에 걸쳐 비평적 글쓰기를 전개해왔다. 현재는 명지병원 예술치유센터장으로 음악치료 관련 일을 통해 음악의 치유성과 관련한 새로운 글쓰기 영역을 넓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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