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웹진에 실린 글의 내용은 (재)예술경영지원센터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TEL 02-708-2293 FAX 02-708-2209 E-mail : weekly@gokams.or.kr
코로나 시대 86,255명과 행진하는 방법
온라인 퀴어퍼레이드 캠페인 제작기"썸머, 곧 프라이드의 달인 6월인데 퀴퍼(퀴어 퍼레이드) 없는 6월이 말이 되나요? 온라인 퀴퍼라도 열렸으면 좋겠다."
"오. 나이키 에어맥스 줄 서기처럼요?"
"네,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그러면 우리가 하면 되지. 헵찌가 리드해볼래요?"
13일 만에 86,225명이 참여한 온라인 퀴퍼, <우리는 없던 길도 만들지>는 동료이자 닷페이스 대표인 썸머와의 대화에서 시작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상을 실현으로 옮겨준 썸머의 힘이 놀랍지만, 그때는 걱정이 앞섰다. 내가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 일이 되었구나! 지금 하고 있는 캠페인만으로도 바쁜데. 그런 걱정을 눌러줬던 것은 다름 아닌 이태원 코로나 사태였다. 5월 초였던 당시 이태원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이후 일부 언론에서는 퀴어 혐오적인 보도가 쏟아져 나왔다. 나처럼 상처를 받았을 퀴어 친구들에 대한 걱정이 컸다. 이럴 때일수록 퀴어들에게 서로 힘을 주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진행에 속도를 붙이기로 했다. 6월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퀴어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온라인 퀴퍼에 길게 늘어선 행렬을 통해 ‘당신의 곁에 당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처음 떠올린 나이키 에어맥스 줄 서기와 같이 인스타그램에 해시태그를 달아 행진 이미지를 온라인 상에 올리는 방식이 제격이었다. 사진을 올리는 개인 피드에서는 각자의 신념과 정체성을 주변에 표현하는 경험을, 같은 해시태그가 모이는 피드에서는 다 같이 모여 서로에게 용기를 주는 경험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방식을 쓰려면 인스타그램에 올릴 이미지가 필요했다. 단일하지 않고 다양한 퀴어, 퀴어 지지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커스텀 캐릭터를 만들 수 있는 웹사이트를 만들기로 했다. 우리가 상상한 긴 행렬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참여자가 많아야 했다. 참여자가 많아지려면 참여 장벽이 낮아야 했다. 장벽을 낮추기 위해 행진에 참여하는 경험만큼 캐릭터를 만드는 경험에서도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하기로 했다. UX(User Experience, 사용자 경험) 초기 기획을 담당한 동료 혬이 ‘겟 레디 위드 미(Get Ready With Me)’ 콘셉트를 제안했다. ‘오늘은 퀴퍼 가는 날. 우리 같이 준비해요!’라는 말을 시작으로 매 단계에 리액션을 넣고 참여자가 처음 입력한 닉네임을 계속 부르며 참여자들과 친밀감을 형성하려고 했다.
매력적인 콘셉트가 준비되었으니, 그에 맞는 디자인이 필요했다. 구체적 의도를 세우고 디자인하기보다 디자인을 일단 해보면서 의도를 잡는 습관이 있다. 일러스트레이터를 켰다. 최소한의 세 가지 기준을 잡고 디자인을 시작했다. 참여자들에게 배제되지 않는 경험을 줄 것, 시각적으로 재미가 있을 것, 닷페이스의 BI가 적용될 것.
'퀴어'라는 단어가 '기묘한, 괴상한'이라는 기존 단어의 뜻을 전복했다는 점에서 외계인 캐릭터를 떠올렸다. 영화 <록키호러픽쳐쇼>의 노래
“헵찌, 사람들이 참여를 많이 하려면 캐릭터에 자신을 대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외계인 캐릭터로는 그런 느낌을 주기 어려워 보여요. 그리고 큰 행진 이미지가 만들어졌을 때 요구르트 광고 속 유산균 느낌이 들 것 같아요. 캐릭터의 매력이 이 이벤트의 성패를 결정할 텐데 좀 더 고민해보면 좋겠어요.”
사람 캐릭터를 그리는 데에 자신이 없었지만, 이 피드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유산균 같다는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다시 일러스트레이터로 작업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자기를 대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기준을 세우다 보니, 길거리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헤어스타일, 옷 같은 걸 참고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시각적 재미가 사라졌고, 닷페이스의 BI도 많이 지워졌다. 그때 개발과 UI(User Interface, 사용자 환경)/UX를 맡아준 스투키 스튜디오에 조언을 구했다.
"헤어나 의상 아웃라인, 팔 동작이 다양하면 좋겠어요. 색깔과 채도를 완전 RGB(적색(Red)·녹색(Green)·청색(Blue) 기반의 색상모델) 느낌으로 하면 어떨까요? 사람들은 퀴퍼에서 평소에 못 해본 헤어스타일, 옷차림을 하고 싶을 거예요.“
금 같은 피드백이 쏟아졌고 '평소에 못 해본 차림'이라는 기준이 새로 추가되었다. 이전에는 길거리의 사람들을 상상하며 디자인을 했다면, 이 피드백 이후에는 '퀴퍼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을 상상하며 작업을 했다. 결과적으로 나온 디자인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시각적 재미는 해결이 되었으나 어떻게 해야 참여자들에게 배제되지 않는 경험을 줄지 고민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이 고민을 하면서 시각적 재미를 더 많이 줄 수 있었다. 이를테면 여성형, 남성형을 딱 구분할 수 없는 헤어스타일을 고민하다 보니 분수 머리, 불꽃 머리 같은 재미있는 헤어스타일을 만들 수 있었다. 옷을 그릴 때도 성별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다 보니, 홀터넥과 한복 바지, 저고리와 그물 스타킹 같은 재미있는 조합이 많이 나왔다.
반대로 시각적 재미를 위해 '아예 사람 피부색이 아닌 색을 피부에 입히자'라고 결정했더니 이모지, 레고 등에서 인종 중립적으로 쓰이는 샛노란 색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인권에 관해 이야기할 때 자주 쓰이는 '상상력'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디자인에서 쓰이는 '상상력'이라는 단어가 어쩌면 같은 것을 향할 수도 있겠다는 배움을 얻었다. '정치적으로 너무 올바른 결과물이 나와서 재미가 없으면 어떡하지?'라는 우려를 꺾어주는 배움이었다.
만반의 준비를 거쳐 오픈 날이 되었다. 그날 저녁, 팀원들이 “일 안 하고 이것만 보고 싶어요.”라고 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상상했던 참여 인원을 훌쩍 넘기도 했고 재미있는 참여자들이 정말 많았기 때문이다. 온라인에서만 할 수 있었던 반려동물들의 행진도 눈에 띄었고 생수, 뻥튀기 사진을 올리는 분들도 있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는 분들은 커스텀 캐릭터를 그려서 참여하기도 했다. 한정된 옵션 안에서 조합을 선택해야 하는 특성상 '퀴퍼처럼 각자의 다양한 모습으로 참여하는 게 가능할까?'라는 걱정이 들었는데 역시 참여자들의 상상력은 나를 뛰어넘었다.
오픈 후 참여자들의 피드백도 많이 있었다. 도움이 됐던 여러 피드백이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전맹 시각장애인을 위한 대체 텍스트를 추가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스투키 스튜디오에서도 문제에 크게 공감해주셔서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개발자 태경 님은 대체 텍스트 외에도 그것을 인스타그램 이미지와 함께 올릴 수 있는 복사 기능 등 더 구현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하셨지만, 오픈 기간이 짧아 모두 구현하지 못해 아쉬워하셨다. 이후에 어떤 정보를 제공할 때는 접근성을 꼭 체크해야 한다는 기준이 생겼다.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의견을 낼수록 온라인 퀴퍼가 더 안전하고 열린 이벤트가 되는 것을 보며 감사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닷페이스에서 4명, 스투키에서 2명, 총 6명의 팀원. 한 달이 조금 넘는 작업 기간과 13일간의 오픈 기간. 작업이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이런 형식의 캠페인을 해보는 것도 닷페이스로서는 처음이었기에 많은 사람이 참여할 거라는 확신도 없었다. 하지만 준비를 하는 내내 동력을 잃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처음부터 ‘큰 규모의 온라인 캠페인을 해서 8만 명 정도의 사람을 모으자'라는 목적으로 캠페인을 시작했더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퀴어 퍼레이드에 대한 그리움에서부터 기획을 시작했기 때문에 매 순간을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퀴어들의 이야기를 오랫동안 전해왔기 때문에 신뢰를 기반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고, 퀴어 퍼레이드에 3년 동안 참여했기 때문에 퀴어 퍼레이드만의 재미와 의미를 이해하고 이 경험을 설계할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그것들이 모여 기대 이상의 멋진 행진을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행진에 쏟아진 관심에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많은 언론사와 미디어가 온라인 퀴퍼에 대해 보도해주었고, 인스타그램 코리아는 직접 <마케팅 써밋>이라는 행사에서 온라인 퀴퍼를 소개하고 싶다는 제안을 해오기도 했다. 비대면 시대에 온라인 캠페인을 기획하는 분들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 질문을 해오시기도 했다. 그때마다 매끄러운 UX 기획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좋은 협업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빼놓을 수 없는 건 이 행진의 주인공인 퀴어들에 대한 애정이다. 나 또한 한 명의 퀴어로서 ‘우리가 이 상황에도 불구하고 모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퀴어 퍼레이드에서 가장 즐거운 경험이 어떤 것인지' 같은 질문을 계속했고 그 답을 결과물에 녹일 수 있게 노력했다. 이러한 태도는 내가 2년간 기획단으로 서울퀴어문화축제를 준비하며 만난 멋진 퀴어들께 배울 수 있었다. 이 글을 읽는 분도 비슷한 일을 기획하고 있다면, 참여자들을 ‘모아야 할 숫자’로 생각하기에 앞서 ‘어떤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싶은지’, ‘그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그 사람들과 나의 공통점은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보셨으면 좋겠다. 그런 진심이 누군가에게 가닿았을 때 또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날지 정말 기대가 된다.